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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한국의 명승명산] 백제 건국의 땅… 한국 등산의 메카 ‘북한산’

글·사진 박정원 선임기자
  • 입력 2021.11.3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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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승’ 명산 <11> 북한산]
조선시대 최고의 명산… 단위 면적당 등산객 세계 최고 기록도

삼각산이란 지명을 낳은 형상인 백운대(오론쪽)와 만경봉(중간), 그리고 인수봉(왼쪽)이 마치 삼각점처럼 우뚝 솟아 있다.
삼각산이란 지명을 낳은 형상인 백운대(오론쪽)와 만경봉(중간), 그리고 인수봉(왼쪽)이 마치 삼각점처럼 우뚝 솟아 있다.

북한산北漢山(836.5m)은 역사적, 기록적, 현대적 의미로 한국 최고의 명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 접근성이 좋아 사람들이 가끔 북한산의 무궁무진한 가치를 잊어버릴 때가 많은 것 같다.

먼저, 역사적으로는 일찌감치 〈삼국사기〉부터 등장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삼산오악으로 전략적으로 나눠 국가의 중요 제사를 지낼 때 금강산霜岳, 설악산 등과 함께 소사小祀 부아악負兒岳으로 지정됐다. 삼국의 격전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백제가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가 끊임없이 침입을 하고, 신라가 영토 확장을 위해 호시탐탐 노린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으로 중심을 옮겼으나 한때 삼각산으로 천도를 검토했을 정도로 국가적 논란의 핵심에 있기도 했다.

〈고려사〉열전 우왕편에 ‘남경의 진산 삼각산은 화산으로서 목성을 가진 나라의 수도가 될 땅이니, 그곳을 수도로 삼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읍으로 천하의 명당과 명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의 서쪽을 남북으로 가르는 북한산(왼쪽 능선)과 도봉산 능선이 길게 펼쳐져 있다.
서울의 서쪽을 남북으로 가르는 북한산(왼쪽 능선)과 도봉산 능선이 길게 펼쳐져 있다.

여러 문헌에 가장 많이 등장한 명산

기록적으로 삼각산은 문헌이나 고지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산으로 꼽힌다. 그만큼 기록할 가치가 많았다는 얘기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풍수적으로, 국행제로, 명산 지정 등 다양한 주제로 소개된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지〉에 소개된 내용도 다른 명산의 분량을 압도한다. 조선 선비들의 〈유산록〉 중 북한산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편에 속한다. 또한 고대부터 이름도 가장 많이 가진 산이다. 역사적으로 명산일수록 여러 지명을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현대적 의미로는 한국 등산의 메카로 꼽힐 만큼 근대에는 산악인들이 암벽 루트를 개척했고, 현대 들어서는 인수봉과 더불어 주변 암봉들을 암벽 등반의 필수코스로 여겨 왔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암벽루트명을 가진 봉우리가 바로 인수봉이다. 뿐만 아니라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으로 1990년대부터 일찌감치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기록을 보유한 명산이다. 또한 수도권 2,000만 시민들의 건강과 여가를 책임지고 해소하는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찾는 만큼 환경훼손도 심하지만 국립공원공단의 관리와 시민의식수준의 향상으로 보존상태가 날로 개선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을 찾는 이유는 서울 어디서나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뛰어난 접근성과 더불어 산의 형세도 한반도 여느 산 못지않기 때문이다. 정상 백운대에 올라서면 확 트인 조망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늘어선 능선들의 빼어난 풍광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20년에는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흔들 때 코로나블루에 빠진 사람들의 위안처로서 큰 역할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여행을 가지 못하고 갑갑해할 때 북한산이 그나마 사람들의 탈출구가 됐다. 한국의 모든 산에 등산객이 줄었지만 유독 북한산만 등산객이 오히려 증가했을 정도였다. 코로나가 없었던 2019년에 557만 명이 찾았지만 한창 극성이었던 2020년에는 전년보다 100만 명이나 증가한 656만 명이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고 공단은 밝혔다. 역사적으로나, 기록적으로나, 명승적으로나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명불허전’ 명산 북한산이다.

조선시대 한반도의 경치가 뛰어난 명승지를 기록한 다섯 문헌 중 〈해좌명승〉을 제외한 〈동국산수기〉, 〈와유편〉, 〈팔선와유도〉, 〈청구남승도〉 네 문헌에서 삼각산을 명승지로 꼽을 정도였다.

현재 문화재보호법에서 ‘명승’을 ‘경치 좋은 곳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뛰어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명승을 지정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역사문화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명승은 단순히 경치가 아름다운 장소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감상의 대상이 되어 역사문화적으로 정립된 승경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비슷한 개념으로 명승으로 꼽았다.

따라서 북한산이 국가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지난 2003년 문화재청이 명승으로 지정하면서 밝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삼각산은 북한산의 중심으로 백운대白雲臺(836.5m), 인수봉仁壽峰(810.5m), 만경대萬鏡臺(787m)로 구성된다. 이들은 쥐라기에 생겨났으며, 여러 모양의 화강암 돔granite dome들이 수려하다. 산 사면의 경사는 70℃에 달하고, 백운대 정상에는 약 500㎡의 평평한 곳이 있어 등반객과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만경대의 옛 이름은 국망봉이며, 정상부의 산세가 불규칙하다. 고구려의 왕자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본 곳이 삼각산이며,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 후보지를 찾아다닐 때 백운대와 만경대에 이르러 비봉에 오르니 비석에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고 쓰여 있어 길을 바꾸어 내려가 궁성터(오늘의 경복궁)를 정하였던 곳이 바로 이 산이다. 조선시대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산의 역사와 유래와 형승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만경봉(대)을 국망봉이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북한산이란 지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북한산이란 지명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우뚝 솟은 인수봉과 주변 능선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우뚝 솟은 인수봉과 주변 능선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조선시대 명승 기록에도 가장 많이 언급

북한산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고구려본기에 ‘고구려 장군(왕이)이 말갈과 더불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고 횡악橫岳 아래에 나아가 주둔했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역습하여 싸우므로 물러났다’는 내용이다. 북한산의 최초의 지명은 횡악이라는 얘기다. 왜 횡악이라고 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설명은 없었다.

얼마 전 아차산~용마산을 종주하면서 그 답을 어렴풋이 찾았다. 용마산 정상에 올라 북한산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래서 횡악이라고 했구나’가 바로 떠올랐다. 동쪽의 용마산에서 바라 본 북한산은 남북을 완전히 가로지르는 천혜의 요새 같았다. 당시 아차산과 용마산도 삼국의 격전지였다. 바로 한강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에 최전방 방어와 공격의 진지였다. 아차산·용마산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유물에서 ‘북한산성’이란 표기가 나와 일부 학자들은 당시 북한산은 현재 북한산이 아닌 아차산·용마산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다른 내용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요약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니,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는 듣지 않고… (후략)’

여기서 몇 가지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한산. 아직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지금의 북한산 일대, 즉 서울의 옛 지명이 한산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산의 유래도 여기서 나온다. 한산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명명됐다는 설이다. 풍수적으로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은 양陽으로 봤다. 산과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은 강을 우선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한수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한양이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북한산과 한수가 한양이란 지명을 낳은 셈이다.

이어 나오는 부아악은 북한산을 가리킨다. 삼각산의 앞선 봉우리 인수봉과 뒤편에 있는 또 하나의 바위, 즉 백운대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명명됐다는 유래다. 한수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지금 한강을 가리킨다. 다른 이름은 광개토왕비에 아리수阿利水라고 소개한다. 지금 한강을 정수해서 수돗물로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이름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삼각산은 한성부 북쪽 15리에 있고, 백제에서는 부아악이라 했다. 또 횡악, 화산이라고도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삼각산이나 북한산이란 지명을 찾아볼 수 없다. 이로 미뤄볼 때 북한산은 삼국시대까지 주로 횡악이나 부아악, 화산으로 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산의 옛 지명 부아악이란 이름을 낳은 인수봉(앞쪽 봉우리)과 그 뒤로 백운대가 나란히 연결돼 있다.
북한산의 옛 지명 부아악이란 이름을 낳은 인수봉(앞쪽 봉우리)과 그 뒤로 백운대가 나란히 연결돼 있다.

조선까지 삼각산, 현대 들어서 북한산 지명 사용한 듯

고려시대 들어서도 삼각산이란 지명이 대세를 이룬다. 〈고려사〉 여러 곳에서 삼각산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하지만 횡악, 부아악, 화산이 왜 삼각산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단지 널리 알려진 대로 정상 백운대, 인수봉, 만장봉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멀리서 보면 마치 세 개의 산으로 이뤄진 듯 보인다 해서 삼각산으로 명명됐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북한산은 천하의 명산과 명당으로 자리매김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삼각산은 도성 밖 정북에 있으며 일명 화산이다. 신라 때는 부아악이라 일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악’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 외 〈국조보감〉, 〈동국여지지〉 등에는 중악으로 소개한다. 〈동국여지지〉 한성부에 대한 형승을 ‘한양은 북쪽으로 화산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을 앞에 두고 있으며, 토지가 평탄하게 펼쳐져 있어 백성은 많고 부유하며 번화하다’고 극찬하고 있다. 천혜의 요새라는 내용까지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 ‘삼각산은 화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 했다. 평강현의 분수령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한북정맥의 한 봉우리를 풀어서 설명) 빙빙 둘러서 양주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의 진산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온조가 남쪽으로 와서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 (후략)’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연려실기술〉, 〈동국여지비고〉와 〈성호전집〉 등 숱한 개인문집에서 북한산에 대한 내용을 빠지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까지 대부분의 문헌과 고지도에서 삼각산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산이란 지명은 조선 숙종 때 승군도총섭(지금 총사령관)을 지낸 승려 승능이 북한산성 축성기록과 연혁을 자세히 기술한 〈북한지〉에 북한산군과 북한산이란 지명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일제가 한반도 행정구역을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삼각산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봐서 현대 들어서 북한산이란 지명을 널리 사용하게 된 것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북한산 등산로는 접근로가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 사실상 지면낭비다. 단 한 가지, 종주하기 위해선 불광동에서 출발해서 우이동으로 하산하거나 그 역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으로 등산객이 지나고 있다.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으로 등산객이 지나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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