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산]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물리친 곳

  • 글·사진 김희순 광주샛별산악회 산행고문
    입력 2021.11.10 09:51

    남원 고남산 847m
    숱한 영욕의 현장 여원치…솔향기 진한 능선길은 둘레길처럼 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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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원치 마애불’은 이성계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온다.
    백두대간 총 도상거리 1,400km와 남한 701km 거리 중 남원 여원치女院峙에서 고남산古南山(846.8m) 구간은 고도가 가장 낮은 곳 중 하나다. 470m 높이의 여원치는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전라도와 경상도로 이어지는 큰 길목에 있어 굵직한 역사적 현장의 주 무대가 되었다.
    여원치는 고려 말, 함흥 출신의 변방 무사가 중앙무대에 존재감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380년 고남산 아래 운봉읍과 황산(698.7m) 일대에서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3,000 병력으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1만이 넘는 왜구를 섬멸했다. 이 싸움이 바로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큰 싸움에서 승리한 후 12년이 지나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이 산을 태조봉太祖峰 또는 제왕봉帝王峰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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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가 울창한 고남산에는 동학농민군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굵직한 역사의 현장 여원치
    여원치라는 지명은 이성계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여원치 인근에 ‘여원치 마애불’이 있다. 불상은 특이하게 오른쪽 가슴을 가리고 있는 모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성계가 여원치 인근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한 노파가 나타나 왜구를 쳐부술 비책을 알려 주었다.
    노파는 여원치에서 주막을 하는 주모인데, 왜구에게 가슴을 희롱 당하자 스스로 오른쪽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꿈속의 노파는 그 주모의 원혼이었던 셈이다. 여원치 마애불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여원치에는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안내문이 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넉 달 전인 1597년 4월, 이순신 장군은 합천으로 백의종군하던 도중에 여원치를 넘어 운봉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권율 장군을 만나기 위해 구례로 방향을 바꿨다.
    이순신 장군이 지난 여원치 옛길에 명나라 장수 유정劉珽(1558~1619)이 바위에 ‘유정과차劉珽過此(1596년)’ ‘유정부과劉珽復過(1597년)’라는 글귀를 새겼다. 즉, ‘유정이 이곳을 지나가고’, ‘유정이 다시 또 지나간다’는 뜻이다. 이후 이순신 장군과 유정은 순천 왜교성을 향해 육지와 바다에서 수륙양공을 펼치게 된다.
    여원치는 동학농민군에게는 뼈아픈 패전의 장소다.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은 김개남金開南(1853~1894) 장군과 함께 운봉읍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여원치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과 토호들에 의해 동학군은 백두대간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고, 갑오농민전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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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남산 정상 인근에는 ‘한국의 야생 바나나’로 불리는 어름(으름) 열매가 지천에 있다.
    고남산은 남원 출신의 명장 황진黃進(1550~1593) 장군의 고향과 멀지 않다. 임진왜란의 4대 대첩(한산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 이치대첩) 중 황진 장군은 이치대첩을 이끌어 내며 왜군이 정유재란 전까지 호남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이는 임진왜란의 전세를 반전시키는 변곡점이 되었다. 특히, 이치대첩은 오는 적을 막아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을 먼저 공격해서 승리를 거둔 것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고남산이 팔을 벌려 안고 있는 형태의 남원시 운봉읍은 지리산 서북능선인 바래봉과 백두대간 사이에 있는 400m 높이의 고원분지다. “운봉에서 배고파서 죽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들판과 지리산이 만들어준 약초, 산나물이 풍부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남원 추어탕’의 유래도 황산전투 중 논두렁에서 미꾸라지와 피라미를 잡아서 풀시래기탕을 해먹으며 군량미를 보충하고 전투력을 높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물산이 풍부하면 자연스럽게 문화도 융성해진다. 운봉읍은 국악의 성지다. ‘가왕歌王’으로 추앙받는 명창 송흥록宋興祿(1801~1863)이 태어났고, 흥록, 광록 형제에 의해 ‘동편제東便制’가 창시되었다. 이후 아들 우룡雨龍과 손자 만갑萬甲으로 명문가의 계보가 이어진다.
    송만갑(1866~1939)은 근대 최고의 명창으로 통하며 판소리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는 전설적인 여류명창 이화중선과 박초월 등의 제자를 양성했고, 그 제자는 다시 박초월의 아들 조통달과 그의 아들 가수 조관우까지 이어진다. 동편제 마을 입구에는 100여 그루 소나무가 장관이다. 근처에 황산대첩비지, 어휘각, 피바위, 송흥록 생가, 박초월 유택 등이 있다.
    여원치에서 고남산 산행을 시작한다. 지도상에 있는 ‘백두대간 여원치 휴게소’는 작은 펜션 정도의 규모이고, 그나마 오래전에 폐업하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여원치를 산행 초입지로 하면 잠시 동안 장동마을 골목길을 통과하는 외에 매요마을까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지나며 그 행기에 흠뻑 취하게 된다. 백두대간 줄기의 등산로답게 길이 잘 나 있고 주요 지점마다 이정표가 잘 갖추어져 있다. 둘레길처럼 급하게 오르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는다.
    여원치에서 1시간 정도면 방아치에 닿는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방아치’ 안내판에는 ‘1894년 11월 김개남 장군의 농민군이 이 고개를 통해 운봉읍으로 진격했다’는 명문으로 민초들의 함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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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로 곳곳에는 상세한 이정표가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적다.
    이성계가 산신제를 올린 정상
    정상 직전부터 발달한 굵직한 화강 암릉 사이로 조망이 열린다. 정상에는 삼각점, 산불감시초소와 철탑, 오래전에 쌓은 듯한 석축이 남아 있다. 안내문에는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직전 이곳에 석축으로 제단을 쌓고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있어서 군사작전지도를 펼치고 산과 길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동남쪽으로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지리산 서북능선 덕두산(1,151m), 바래봉, 세걸산(1,220m)이 보이고, 북으로는 대성산(882m), 만행산(909m) 등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정상석은 정상 50여 m 아래쪽에 있다. 무선중계소 부근에서 시멘트도로를 잠시 지나기도 하지만 매요마을까지 약 4.5km는 평탄한 둘레길 수준이다. 산 아래 운봉고원 황금들판을 바라본다. 이 지역에서는 역사에 묻혀버린 동학농민들의 외침을 보듬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산행길잡이
    여원치~장동마을~방아치 전적지~암릉 구간~정상~헬기장~통안재~매요마을(약 9.7km, 약 5시간 소요)
    교통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남원공용버스터미널까지 하루 8회 고속버스(첫차 06:00, 막차 22:20)가 다닌다. 요금 우등 2만5,000원,  고속 1만7,100원. 약 3시간 10분 소요.
    동서울터미널에서 타면 정안휴게소에서 갈아타는 불편함이 있다. 06:00부터 22:20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며, 요금은 우등 2만3,300원, 고속은 1만5,800원이다. 
    남원공용버스터미널에서는 운봉행 버스를 타고 장동마을(여원치)에서 내린다. 매요마을에서 여원치까지 택시(운봉개인택시 063-634-0555)를 이용할 경우 요금 1만2,000원.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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