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낭만야영] 쓰레기 봉투 한 개 챙기는 게 그리 힘든가?

글·사진 민미정 백패커
  • 입력 2021.11.25 10: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기도의 알프스 원적산 1박2일, 단풍에 반하고 버려진 양심에 분노하다

천덕봉 오르는 길에 뒤돌아 보면
정개산으로 이어지는 산그리메가 펼쳐진다
천덕봉 오르는 길에 뒤돌아 보면 정개산으로 이어지는 산그리메가 펼쳐진다

초보 백패킹 딱지를 뗀 친구 김정미는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산으로 떠나고 싶어 했다. 요즘은 백패킹으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라 장소를 택하느라 고민했다. 최근에는 주로 캠핑장에서 야영을 했으며 당일산행 위주로 했기에 모처럼 능선에서 낭만적인 밤을 보내고 싶었다. 백패킹 초보 때 올랐던 경기도 이천 원적산이 떠올랐다. 눈이 수북이 쌓인 한겨울에 얼어붙은 급경사 능선길을 내달리며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원적산(634m)은 이천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동쪽으로 여주시, 서쪽으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길게 이어져 있다. 지금은 백패킹 성지라 불리며 백패커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언제 올라도 명당자리를 독차지할 만큼 한적한 곳이었다. 정미의 애견 ‘초코’도 함께하기로 했다.

영원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택시를 타고 동원대학교 뒤편 넉고개 주차장으로 갔다. 넉고개 주차장에서 바로 등산로로 들어설 수 있지만, 가을 향기가 물씬 풍기는 ‘걷고 싶은 둘레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빨갛게 익은 단풍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정미를 위해 최대한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종주 코스로 진입하기로 했다.

‘걷고 싶은 둘레길’은 길이에 따라 남정리, 도암리, 산수유 마을로 하산하는 3가지 코스로 나뉘어 있다. 편안하게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가볍게 배낭을 꾸리고 둘레길을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중면의 불끈 솟은 산이 원적산 정상 천덕봉이다. 동원대학 부근 넉고개에서 능선을 따라 원적산에 닿을 수 있다.
중면의 불끈 솟은 산이 원적산 정상 천덕봉이다. 동원대학 부근 넉고개에서 능선을 따라 원적산에 닿을 수 있다.

단풍이 장악한 산그리메의 감동!

형형색색의 단풍나무마다 맛집 탐방하듯 멈춰서 가을을 음미하느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강아지 초코도 풍성한 가을 냄새에 취해 목줄이 팽팽해질 때까지 앞서 가느라 바쁘다.

풍경에 취해 걷다 보니, 몇 개의 등산로 입구를 지나쳤다. 둘레길 따라 4.5km를 걸었다. 더 지나면 종주 코스와 너무 멀어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골짜기의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산길은 자연에 동화되어 있었다. 우거진 잡목이 옷깃을 쉴 새 없이 잡아끌었다.

경사가 가팔라지고, 심술궂은 잡목은 더욱 성가시게 굴었다. 좀 전까지 만끽했던 단풍의 낭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개척산행 모드로 돌입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은 그나마 희미하게 보이던 길을 숨겨 버렸다. 산행을 자주 다닌 초코이지만, 험한 산은 처음이라 당황한 모습이었다.

GPS로 방향을 읽으며 최대한 쉬운 길을 찾아내야 했다. 그나마 덜 험한 길을 고르느라 무아지경인 사이, 결국 초코는 친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험한 산길에 초코까지 안고 있어 구슬땀을 흘리는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걷고싶은 둘레길’의 빨간 단풍나무 아래에서 김정미씨가 애견과 휴식을 취하고 있다.
‘걷고싶은 둘레길’의 빨간 단풍나무 아래에서 김정미씨가 애견과 휴식을 취하고 있다.

초코를 넘겨받아 안고 다시 길을 찾아 앞장섰다. 원적산 종주는 산꾼들에게 인기가 많으니, 능선에 올라서기만 하면 길이 잘 나 있을 터였다. 30분을 쉴 새 없이 오르니 잘 닦인 오솔길이 나타났다. 개척산행 경험이 적은 정미에게 괜찮냐고 물으니,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괜찮다고 하여 안심이 되었다.

다년간 네팔 트레킹으로 단련된 그녀의 체력을 과소평가했나 싶어 멋쩍었다. 잠시 땀을 식히고 길을 이어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마른 단풍잎이 고사리 손처럼 오그라져 있었다. 성급한 가을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간 듯했다. 나뭇가지는 대부분 잎이 떨어져 앙상했다. 삭막할 만도 하지만 오후의 햇살이 낙엽을 비추고 있어 포근함이 느껴졌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황금빛 산길은 가을 그 자체였다. 길 위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초코의 귀여운 총총 걸음소리와 어우러져 박자가 맞았다.

한겨울 원적산을 처음 종주할 때는 급경사 길에서 고꾸라질까봐 발끝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었다. 이제는 계단이 놓여 한결 수월해졌다. 몇 번의 비탈길을 오르내린 후에야 숲을 벗어나 탁트인 전망이 나타났다. 원적산 정상인 천덕봉과 원적봉을 잇는 능선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숙영지 근처의 쓰레기를 주워 담은 탓에 필자의 배낭이 높이 솟았다.
숙영지 근처의 쓰레기를 주워 담은 탓에 필자의 배낭이 높이 솟았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정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중첩되어 보였다. 산그리메였다. 능선 색깔이 옅어지면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오후 햇살을 머금고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뽀송뽀송한 억새가 바람에 하늘거렸다. 황금빛 능선 위에 하얗게 흔들리는 억새를 보고 있자니 그곳이 바로 가을천국이었다. 과연 경기의 알프스라 불릴 만했다.

천덕봉에는 벌써부터 쉘터 하나와 텐트 몇 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워낙 인기가 많은 야영지라, 서둘러 올라와 자리를 맡은 듯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도 남았고, 능선 길목의 어디든 경치가 좋으니 좀 더 가보기로 했다. 원적봉으로 이어진 능선 군데군데 공터가 있었지만, 이미 형형색색의 텐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비어 있는 공간을 골라 자리 잡고 앉아 배낭에 있는 먹을 것은 몽땅 꺼냈다. 아침을 거르고 김밥 하나로 달려온 탓에 허기진 배를 허겁지겁 채웠다. 포만감이 느껴지고 나서야 낭만도 되살아났다. 해가 기우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명언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텐트를 설치하고 셋이서 좁은 텐트에 끼어 앉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천덕봉에서 원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는 군데군데 칠성급 호텔 못지않은 경치의 숙영지가 있다.
천덕봉에서 원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는 군데군데 칠성급 호텔 못지않은 경치의 숙영지가 있다.

충격! 인기 야영 봉우리의 민낯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갔다. 원적산 능선의 각 야영지마다 일출을 맞이하는 백패커들이 사진을 찍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원적산은 백패킹 장소로 최적이었다. 사이트를 정리하고, 원적봉으로 향했다.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부 백패커들의 개념 없는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곧 원적산도 백패킹 금지 구역이 될 것 같았다. 한쪽 구석에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쓰레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흩어져 있었다. 본인이 잠드는 집에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쓰레기를 버리지는 않을 것인데….

자연의 좋은 것만 취하고 양심은 눈곱만큼도 없는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자연을 누리고 싶어 하는 선량한 백패커들을 싸잡아 욕먹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쓰레기봉투 하나 들고 다니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에서만 욕먹는 백패커들이 더욱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사람 통행이 많은 길목에서는 진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반려견을 안는 것이 에티켓이다.
사람 통행이 많은 길목에서는 진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반려견을 안는 것이 에티켓이다.

백패킹 문화도, 인식도, 우리나라만 시대에 뒤쳐지고 있다는 게 서글퍼졌다. 게으른 관리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백패커들의 발을 ‘금지’라는 방관적인 대처로 묶어 놓았다. 최소한의 기본 상식도 갖추지 않고, 잘못된 백패킹을 하는 어리석은 백패커들만 욕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백패킹도 하나의 정상적인 아웃도어 활동으로 인정하고, 양지로 나와 올바른 백패킹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계몽해 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들었다. 갓 초보 백패커 딱지를 뗀 정미와 말없이 씁쓸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헬기장에서 숙영할 경우, 비상사태를 대비해 헬기 착륙 공간은 비워 둬야 한다.
헬기장에서 숙영할 경우, 비상사태를 대비해 헬기 착륙 공간은 비워 둬야 한다.

원적봉 정상에도 사람들이 빼곡했다. 일출을 본 백패커들이 사이트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인파에 밀리는 일이 없도록 서둘러 하산했다. 기분이 씁쓸한 와중에도 햇살을 품은 가을 원적산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에서도 내 맘속에 낭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산 길에 올라오는 첫 등산객을 마주쳤다. 일찍 철수하기를 잘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영원사에는 벌써 만추를 만끽하려는 인파로 북적댔다. 강렬한 단풍을 뒤로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영원사를 빠져나왔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원적산을 뒤로한 채.

산행 소요 시간

첫째날 넉고개(158m)~천덕봉(633m)~숙영지(582m)  

산행거리 9.7km,  소요시간 5시간

둘쨋날 숙영지~원적봉(558m)~영원사(246m)  

산행거리 2.6km,  소요시간 1시간 20분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