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사찰] 북한이 실록을 먼저 '한글번역'한 이유는?

입력 2021.11.10 09:48 | 수정 2021.11.10 09:48

안국사와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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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 보관돼 있던 적상산 사고지.
고려와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조정의 동정을 기록했다. 실록이 편찬되면 별도 장소에 보관했는데 이를 사고史庫라 한다(고려실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왕조는 서울에 내사고인 춘추관, 외사고인 충주, 성주, 전주 총 4곳에 사고를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자 조정은 전쟁이 끝난 뒤 전주본을 원본으로 1603년(선조 36년)부터 3년간 다시 편찬했다. 
'이후에는 시내가 아닌 전란을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중이나 섬에 보관했다. 원본인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에 두었다가 정족산 사고로 옮기고 나머지 사고를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으로 분산 배치한 이유다. 조정은 사고와 실록을 지키기 위해 정족산 사고는 전등사,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 묘향산 사고는 보현사,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 등 수호 사찰을 지정했다. 
후금 위협에 안국사로 사고 옮겨
만주에서 후금 세력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정묘호란 직전, 묘향산 사고를 무주 적상산으로 옮긴다. 1,000m의 고지대인 데다가 내륙 깊숙한 지점이고, 적상산 자체가 요새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공격하기가 어려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 거기에다가 적상산 정상 부근이 비교적 평탄한 평지였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적상산이 산성의 최적지로 주목받아 온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 말 최영 장군도 적상산에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다. 
이후 전국에 5대 사고가 존재하게 된다. 서울 내사고에 춘추관, 외사고는 강화도 정족산의 전등사, 무주 적상산의 안국사, 태백산의 각화사, 오대산의 월정사에 설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억불숭유로 탄압받던 불교 사찰이 보관하고 관리한 셈이다. 유생들이 기록한 조선 역사를 절에서 지켜냈으니 아이러니하다. 
6·25 때 인민군이 빼내 가
조선 25대 왕 472년의 기록, 1,893권 888책 분량인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졌다. 오대산 월정사 사고에 있던 ‘실록’은 일본인들이 도쿄로 가지고 갔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도쿄에 있던 오대산 사고 실록은 학자들이 빌려갔던 몇 권을 빼놓고 거의 불타 버렸다. 오대산 실록은 월정사 등의 반환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되돌려 받았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월정사는 현재 원래 자리인 월정사로 환수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도 ‘조선왕조실록’에 욕심을 냈다. 서울에 있던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북한 인민군이 빼내 갔으며, 현재 김일성대학에 있다고 한다.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해 <리조실록>을 만들수 있었던 것은 안국사가 지킨 적상산 사고 덕분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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