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12월의 섬 굴업도] 개머리언덕에서 만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월간산
  • 입력 2021.12.17 09: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머리언덕 백패킹과 덕물산 산행…
부드러움과 강함의 완벽한 조화 간직한 섬

굴업도의 여행의 백미로 꼽히는 개머리언덕 수크령 군락지를 걷는 김성혁, 김민선, 최용진씨(좌측부터). 개머리언적은 산행 난이도가 쉽고 경치가 아름다워 백패킹 성지로 꼽힌다.
굴업도의 여행의 백미로 꼽히는 개머리언덕 수크령 군락지를 걷는 김성혁, 김민선, 최용진씨(좌측부터). 개머리언적은 산행 난이도가 쉽고 경치가 아름다워 백패킹 성지로 꼽힌다.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온 세상이 낯설어질 거야’ 

<폭풍의 언덕> 한 구절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하늘,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황금빛 뱀의 몸짓 같은 초원, 재킷을 거칠게 풀어헤칠 듯 불어 닥치는 바람, 비릿한 바다 향기에 섞인 풀냄새까지,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풍경은 황량하면서 아름다웠다. 

금방이라도 사랑과 증오, 집착으로 휩싸인 히스클리프 같은 사내가 나타나 캐서린 같은 여인의 언덕을 헤집어 놓을 것만 같았다. 굴업도를 백패킹 성지로 만든 이 언덕은 그만큼 강렬했다. 우리나라에서 굴업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 ‘개머리언덕’으로 불리기엔 아까웠다. 

굴업도 서쪽 끝인 개머리언덕 산줄기에 서면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굴업도 서쪽 끝인 개머리언덕 산줄기에 서면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만차였다. 다른 주차장을 찾아 헤매는 사이 시간은 흘러가고, 큼지막한 탑 같은 배낭을 멘 사내들이 선착장을 향해 뛰고 있었다. 매일 굴업도 가는 백패커들이 몰려드는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선 흔한 풍경이라는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백패킹 모임 혁패커스 리더인 김성혁씨와 아웃도어 모임 디그디그 액티비티의 캠핑리더인 최용진씨,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김민선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덕적도행 쾌속선에 몸을 실었다. 덕적도에서 야영에 필요한 장을 보고, 굴업도행 배에 올랐다. 인천항에서 60km 떨어진 굴업도는 배를 갈아타고 가야 할 정도로 먼 곳이지만, 평일인데도 백패커들이 여럿 보였다. 

목기미해변을 따라 덕물산으로 가는 길. 백사장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목기미해변을 따라 덕물산으로 가는 길. 백사장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12시 15분 굴업도가 나타났다. 산이 먼저 보였다. 덕물산과 연평산이 쌍봉낙타처럼 솟았고, 사막 같은 목기미해변 옆으로 능선이 뻗었다. 지도를 보지 않으면 섬 전체를 헤아리기 어려운 묘한 모습이었다. 

옛 이름은 ‘구로읍도鷗鷺泣島’인데 나라 잃은 고려의 유신들이 이 섬으로 도망가자 갈매기와 백로조차 울고 갔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또 다른 설은 섬의 형태가 사람이 엎드려서 일하는 것처럼 생겼다 해서 굴업도掘業島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굴업도의 공식을 따르기로 했다. 선착장에서 미리 식사 예약해 놓은 민박집의 트럭을 타고 고갯길을 넘자 이 섬의 유일한 마을인 ‘큰마을’이 나타났다. 민박집의 가정식 백반은 저렴하지는 않았으나 성의 있고 맛깔스런 상차림이었다. 

BAC 인증지점인 섬 최고봉, 덕물산 정상. 왼쪽부터 김성혁, 최용진, 김민선씨.
BAC 인증지점인 섬 최고봉, 덕물산 정상. 왼쪽부터 김성혁, 최용진, 김민선씨.

쇼팽의 피아노 선율 같은 해변 

골목을 따라 몇 걸음 나서자 해변이었다. 쇼팽의 피아노곡 ‘녹턴’ 같은 바다였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우윳빛 모래와, 귀 기울이지 않으면 묵음에 가까운 낮은 어조의 파도 소리. 사람 한 명 없는 500m 길이의 해변은 내성적인 중년의 사내 같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찾아갈 생각 없는, 사람에 대한 기대 없이 스스로 고요를 택한, 파란만장한 인간관계의 숲을 빠져나온 사내 같았다.   

해변 끝에서 철망 사이 문이 보였다. 개머리언덕 가는 길이다. 문 옆에는 굴업도 땅 98%를 소유한 대기업 CJ에서 내건 경고 안내판이 보였다. 평화로워 보이는 굴업도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쳐 왔다. 한때 핵폐기장 유치로 몸살을 앓았으며, CJ는 골프장과 리조트를 건설하려고 섬의 땅을 대부분 사들였다. 그러나 인천시와 환경단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마을 골목을 빠져나오면 깨끗한 모래해변이 펼쳐진다.
마을 골목을 빠져나오면 깨끗한 모래해변이 펼쳐진다.

굴업도는 9,000만 년 전 화산 폭발 후 재가 날아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섬으로, 천연기념물 황새, 황구렁이, 매가 자생하는 보전 가치가 높은 섬이다. 문화재청은 ‘국내 어디서도 보기 힘든 해안 지형의 백미’라고 극찬하며, 굴업도 일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려 했으나 옹진군과 일부 섬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언덕에 올라서자 누렇게 겨울 채비를 한 수크령 초원이 펼쳐졌다. 순한 눈망울의 황소 등걸마냥, 마음이 푸근해지는 언덕이었다. 몇 발짝 올라서면 바다가 드러나고, 이어서 해안절벽과 산등성이가 풍경 자체로 명작이었다. ‘한국의 갈라파고스’라고도 불리는데 에콰도르령  갈라파고스가 어떤 풍경인지 떠오르지 않아 가슴에 와 닿는 별칭은 아니지만, 지구 반대편 명소 이름을 가져올 만큼 이국적인 경치인 건 분명했다.  

수크령과 억새가 섞인 부드러운 능선의 초원은 굴업도가 가진 매력을 그대로 보여 준다.
수크령과 억새가 섞인 부드러운 능선의 초원은 굴업도가 가진 매력을 그대로 보여 준다.

낮은 산을 오르는 정면 길과 우회로가 있어, 정면으로 치고 올랐다. 짧은 바윗길과 숲을 오르자, 그 유명한 야영지인 개머리언덕 끄트머리였다. 수크령과 억새가 만발한 순하디 순한 능선이 부드럽게 바다를 향해 뻗어 있었다. 전국의 백패커들이 새벽부터 고생을 감수하며 몰려올 만한 장면이었다. 

바닷바람이 날것 그대로의 감성을 풀어놓고 있었다. 먼저 온 야영객들이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알록달록한 텐트를 쳐 놓았다. 수크령 밭을 맨손으로 느끼며 걷노라면 새끼 강아지가 날름날름 혀로 핥으며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천재 조각가의 솜씨인양 섬세한 무늬가 썰물에 의해 드러나는 목기미해변.
천재 조각가의 솜씨인양 섬세한 무늬가 썰물에 의해 드러나는 목기미해변.

아리따운 캐서린에게 빠져든 히스클리프의 마음이 되어 결결이 달콤한 초원을 걸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릿결을 헝클어놓는 순간이 행복했다. 적당히 빈 곳에 텐트를 치고 휴대용 의자에 앉아 경치를 보고 있노라면, 계속 어딘가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최용진씨가 가져온 쉘터에서 저녁을 먹는데, “우르릉 쾅!”하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히스클리프의 광기가 재현된 것인가 싶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천둥이 내리꽂는 걸, 소리와 지면의 떨림으로 체험했다. 

‘폭풍의 언덕’다운 천둥을 동반한 비바람이 격하게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새벽 1시쯤 얼핏 눈을 뜨자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했다. 별들을 이불 삼아 깊은 숙면에 들었다. 

개머리언덕 가는 길엔 작은 산을 넘는 코스와 우회로가 있다. 작은 산을 넘는 길엔 시원한 바윗길이 있어 지나온 길이 한눈에 드러난다. 초보자도 오르기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개머리언덕 가는 길엔 작은 산을 넘는 코스와 우회로가 있다. 작은 산을 넘는 길엔 시원한 바윗길이 있어 지나온 길이 한눈에 드러난다. 초보자도 오르기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125m 산의 만만찮은 역습!

야영객들이 잠에 취해 있을 때 일어나 텐트를 걷었다. 뱃시간이 되기 전에 덕물산을 오를 계획이다. 비는 그쳤지만 언제 빗방울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하늘이었다. 

폭풍의 언덕을 지나 어제 가보지 못한 우회로를 걸어 큰마을해수욕장에 내려섰다. 아침식사를 예약해 둔 민박집에서 배를 채우고 덕물산(125m)으로 향했다. 

개머리언덕에서의 감미로운 야영. 폭풍의 언덕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는 백패커들이 늘 그리워하는 풍경이다.
개머리언덕에서의 감미로운 야영. 폭풍의 언덕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는 백패커들이 늘 그리워하는 풍경이다.

기묘한 해변이었다. 사막 같은 해변을 지나야 닿는 덕물산과 연평산은 영화에서 본 듯한 인류 멸망 후의 모습 같았다. 유적처럼 늘어선 쓰러지기 직전의 전봇대 행렬과 낡은 쓰레기들이 모래에 반쯤 묻혀 있었다. 40여 년 전 덕물산과 연평산 사이 안부에 ‘작은마을’이 있었으나 모두 섬을 떠나고 ‘큰마을’만 남았다. 

낡은 집터 흔적을 지나자 화석 같은 코끼리바위에 이어 붉은모래해변이 나타났다. 숨어 있던 굴업도의 열정 같은 붉은 모래가 깔린 쓸쓸한 해변은 스산하고 황폐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코끼리바위 부근의 해안절벽 지대를 걷는다.
코끼리바위 부근의 해안절벽 지대를 걷는다.

100m대 산이라 얕보면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덕물산이 엄포를 놓았다. 제법 가파른 흙길과 바윗길의 공세를 정면으로 받아 삼키며 올라서자, 감탄이 절로 터지는 암봉이 나왔다. 굴업도 서쪽 끝이 부드러움의 진수라면, 동쪽 끝은 골산이 가진 강함의 진수였다. 개머리언덕과 전혀 다른 매력이 한상 가득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이래서 “굴업도 굴업도”하는구나 싶었다. 

남은 오르막을 치고 올라서자 돌탑이 있는 정상이다. 정상은 경치가 시원찮지만 BAC 인증지점이라 사진 찍고 섬 최고봉에 올라 숨 돌리는 풍미가 있다. 맞은편 연평산이 바위 거함마냥 솟아 도전하라 손짓하지만, 하루에 한 편 운행하는 배를 타러 가야 할 시간이다. 

목기미해변을 걸어 선착장 가는 길,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소사나뭇잎 달콤한 단풍 냄새와 바다 짠 내가 뒤섞인 채 안겨왔다. 모래에 파묻힌 폐전봇대 행렬이 죽은 연인을 추억하는 히스클리프처럼 쓸쓸히 늘어서 있었다. 

짙은 소사나무숲을 빠져나오면 짧은 바윗길이 기다린다. 여길 넘어서면 개머리언덕의 비경이 펼쳐진다.
짙은 소사나무숲을 빠져나오면 짧은 바윗길이 기다린다. 여길 넘어서면 개머리언덕의 비경이 펼쳐진다.

굴업도 가이드

특별부록 지도를 참고해 섬 지형을 이해해야 효율적인 산행 동선을 짤 수 있다. 최고 명소인 개머리언덕은 서쪽 끝이고, BAC 인증지점인 덕물산은 동쪽 끝이다. 지나치게 여유 부리면 1박2일 동안 두 명소를 다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작은 섬이라 전반적으로 길찾기는 쉽지만 이정표가 드물어, 아무런 정보 없이 가면 제대로 둘러보기 어렵다. 백패킹을 위해 짐을 무겁게 메고 오느라 야영지인 개머리언덕으로 직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착장에서 개머리언덕까지 3.2km이며 기념사진 찍으며 여유롭게 걷더라도 2시간이면 닿는다.

임도를 따라 가거나, 선착장 부근의 숲길을 가로질러 오르면 큰마을에 닿는다. 마을길을 관통하면 해수욕장이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 해변 끝으로 가면 철망 사이 문을 통해 수크령 초원 언덕에 올라설 수 있다. 약간의 경사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쉽고 산행 거리가 짧아 백패킹 입문자들이 많이 찾는다. 

덕물산은 목기미해변을 가로질러 폐가 흔적이 있는 안부로 올라서서 오른쪽 능선을 따라가면 닿는다. 살짝 산길이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능선이 선명해 길찾기는 어렵지 않다. 슬랩 바윗길에서는 왼쪽 흙길로 최대한 올랐다가 바위로 올라서면 안전하다. 선착장에서 덕물산 정상까지 2.3km이며 1시간 정도 걸린다. 썰물 때라야 코끼리바위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으며,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도 수월하다.

BAC 인증지점 
덕물산 정상석 좌표 N37 11.885, E125 59.719 

교통 굴업도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맛집 BAC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등산 지도 특별부록 지도 참조

본 기사는 월간산 1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