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나라 지도를 참조해 만든 〈대명일통산하도〉

  • 글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고문
    입력 2022.01.14 09:54

    최선웅의 고지도 이야기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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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방식을 따른 대명일통천하도의 조선도 (출처: The Library of Congress)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미국의회도서관 맵 디비전에 중국지도로 분류된 <대명일통산하도大明一統山河圖>라는 지도첩이 있다. 이 지도첩은 1927년 워너Warner가 구입한 것으로, 9장의 지도와 함께 서문과 범례가 포함되어 있다. 지도첩 표지의 제목은 ‘대명일통산하도大明一統山河圖’이나, 서문 첫머리에 나오는 지도 제목은 ‘대명일통천하도大明一統天下圖’라고 되어 있다.
    9장의 지도는 접어서 두꺼운 종이로 배접되었는데, 각 지도 뒷면에는 지도명과 함께 근봉謹封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지도첩의 높이는 40cm로 오늘날의 타블로이드판(B4판)과 비슷하나, 지도의 크기는 각기 다르다. 수록 순서는 지도서地圖序, 요동ㆍ북경ㆍ산동성도遙東北京山東省圖, 범례凡例, 산서ㆍ협서성도山西陜西省圖, 남경ㆍ절강ㆍ복건ㆍ강서성도南京浙江福建江西省圖, 하남ㆍ호광성도河南湖廣省圖, 사천ㆍ귀주성도四川貴州省圖, 광동ㆍ광서도廣東廣西圖, 운남성도雲南省圖, 조선도朝鮮圖, 천하전도天下全圖ㆍ조선전도朝鮮全圖ㆍ영고탑도寧古塔圖 등이다. 9장의 지도 외에 뒤쪽에 ‘하담산도荷潭山圖’라는 명당도明堂圖가 붙어 있으나, 이 지도는 지도첩의 뒤표지로 사용된 듯하다.
    친명 사상 뚜렷한 지도
    서문에 “…그래서 나는 우주를 우러러보며 혼돈과 혁명에 맞서 싸우기를 무릇 몇 차례의 국면局面이 있었다. 옛날이 밝아오더니, 갑자기 흐릿하게 빛나고, 오늘이 누구의 세상인지 한 가지 이로움이 있다면 한 가지 손해가 있다. 이 지도를 어루만져 보고 감격해 마지않는다”라는 내용은 지도가 제작된 시기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때여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표방했던 조선인들로서는 청나라 왕조에 대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범례는 제작 규범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첫머리에 “이 지도는 다른 자료도 참조했지만, <일통지一統志>를 주로 참조했기 때문에 ‘대명일통산하도’라고 이름 붙였다. 군읍과 산천은 종횡으로 멀거나 가깝고, 이수里數는 100리里를 1촌寸, 1,000리를 1척尺으로 기준하고, 정규定規는 세종 조에 정한 주척周尺으로 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지도의 각종 부호가 설명되어 있으나, 대부분 중국지도에 관한 것이다. 범례 끝에는 주척에 대한 비례척比例尺이 그려져 있다. 
    조선의 <동국여지승람>에 영향
    지도첩을 제작하기 위해 참조한 <일통지>는 1458년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의 명으로 이현李賢 등이 1461년에 완성한 전국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90권을 말하는데, 이 중 89권과 90권은 외이外夷, 즉 조선국을 비롯해 여진ㆍ일본국ㆍ유구국에 관한 연혁, 풍속, 산천, 토산 등의 기록이다. 조선에서는 15세기부터 이 <대명일통지>의 영향으로 지지地誌 편찬이 왕성하게 진행되어 1481년 <동국여지승람> 50권이 편찬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1530년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었다.  
    9장의 지도 가운데 ‘조선도朝鮮圖’는 따로 지도명이 없어 임의로 붙인 명칭인데, 지도 뒷면에는 ‘절충장군 백령진관행 오차포 수군첨절제사折衝將軍白翎鎭管行吾叉浦水軍僉節制使’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절충장군’은 무신 정3품 당상관이고, ‘수군첨절제사’는 수군을 지휘하는 종3품의 무관직으로, 이 지도는 백령진에서 수군들이 사용했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지리연구소의 연구원인 손정국孫靖國이 2015년 <地圖>지에 게재한 ‘조선왕조 시기 제작된 대명일통산하도朝鲜王朝時期繪制的 大明一統山河圖’에 따르면 이 지도첩은 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앞쪽의 중국지도 7점 외의 2점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라 했고, 중국지도에 반영된 행정구역 변천으로 판단해 지도의 제작 시기는 ‘명나라 만력萬曆 31년(1603)’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도’의 제작 시기는 1684년(숙종 10) 함경도 무산진이 부府로 승격된 무산부가 표기되고, 1712년(숙종 38)에 설치된 백두산정계비가 없는 것으로 보아 1684년에서 171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학자 “조선에서 만든 지도첩”
    ‘조선도’의 크기는 지도첩의 높이 40cm에 비례해 계산하면 가로 59cm·세로 96.5cm가 된다. 지도 4변에는 ‘동·서·남·북’ 문자로 방위를 표기했으며, 지도의 전체적인 형태는 가장 위쪽의 흑룡강黑龍江으로부터 대략 함경도 명천明川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압축되어 압록강과 두만강이 거의 직선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북쪽 지방이 눌린 듯 납작해진 형태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를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成宗 12년 (1481) 10월 17일 양성지梁誠之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는 만리나 됩니다惟我大東 居遼水之東 長白之南 三方負海 一隅連陸 幅員之廣 幾於萬里…”라는 내용과 같이 조선 전기에 제작된 조선전도는 북쪽이 흑룡강까지 그려져 있어 우리나라의 강토가 삼천리가 아닌 ‘만리萬里’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설치된 이후에 제작된 조선전도에는 북쪽이 압록강과 두만강에 그치게 된다.    
    조선 북쪽을 납작 눌린 듯 표현
    지도의 산줄기는 연총식連塚式으로 그려 청회색으로 채색했으며, 백두산ㆍ금강산ㆍ한라산과 같은 큰 산은 회화식으로 산의 모습을 독립적으로 표현했다. 물줄기는 전부 쌍선으로 그리고, 하천의 내부와 바다에는 청회색으로 채색했다. 8도의 경계는 눈에 띄게 붉은색 선으로 그리고, 군현명은 모두 타원형 기호 내에 표기했는데, 수도인 ‘경도京都’와 팔도의 감영監營은 타원형 기호에 붉은색 테두리를 둘러 구분했다. 
    각 군현 명칭에는 한양까지의 거리를 ‘一, 三. 五半’ 등 일수日數를 병기했고, 도로는 표시되지 않았으나, 군현과 군현 간의 도로명을 장방형 기호 내에 표기했다. 예를 들어 평구도平丘道는 한양에서 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이고, 평릉도平陵道는 삼척의 평릉역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驛道이고, 황산도黃山道는 전라도 장흥의 벽사역碧沙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이다.
    동해에는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가 그려져 있는데, 독도인 우산도는 울릉도 동쪽이 아닌 서쪽에 그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은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가 아니고, 울릉도이거나 울릉도 옆에 위치한 죽도竹島”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울릉도는 사람의 왕래가 빈번치 않았고, 측량술도 발달되지 않은 때여서 망망대해에서 방향 잡기와 거리 측정이 쉽지 않아 지도상에 섬의 위치를 정확하게 그려 넣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지도에서 섬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지도첩 맨 뒤에 있는 ‘천하전도ㆍ조선전도ㆍ영고탑도’에 그려진 조선전도는 내용이 극히 소략한 지도로, 백두산의 명칭은 없고 백두산정계비만 그려져 있다. 또한 지도첩에 수록된 중국지도와 조선도, 천하전도ㆍ조선전도ㆍ영고탑도 등의 내용을 비교하면 제작기법이 서로 달라 동일인이 제작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서문 끝에 적힌 ‘상원년 신축계하상원 원학생서우남천우사上元年辛丑季夏上院 願學生書于南川寓舍’에서 신축년은 조선조의 기년紀年 중 원년이 되는 것은 ‘경종景宗 원년’으로, 1721년에 서문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도첩은 제작자와 시기가 다른 지도를 1721년에 한데 묶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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