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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낭만야영] 이 순간, 1분 1초가 아깝다

글·사진 민미정 백패커
  • 입력 2022.01.1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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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을 뒤로하고 더 멋진 야영터 찾아 쉰움산으로

쉰움산 정상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 일출을 기다리던 순간. 온 세상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쉰움산 정상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 일출을 기다리던 순간. 온 세상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산불방지 기간이다. 매년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는 산불방지 기간으로 일부 등산로는 출입이 금지된다. 나는 거의 매주말 백패킹을 가지만 1년 중 이때는 백패킹을 쉬는 기간이다. 하지만 최근 과도한 업무로 조용히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금요일 저녁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검색을 시작했다. 통제구간이 아니면서,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두타산(1,357m)으로 향했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는 불교용어다.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위치하며, 동해시 삼화동에서 서남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다.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4km 떨어져 있는 청옥산靑玉山(1,404m)과 연계산행으로 사랑받는 코스이다. 두타산 북동쪽으로 삼화사三和寺에 이르는 14km의 계곡에는 국민관광지인 무릉계곡, 조선시대 석축산성인 두타산성, 둥글게 패인 바위 위에 크고 작은 50개의 구멍이 있는 오십정(또는 쉰우물)을 비롯해 학소대, 옥류동, 관음사, 쌍폭포, 천은사, 용추폭포 등의 명승고적이 있다.

두타산의 대표적인 명소인 베틀바위 아래로 등산객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두타산의 대표적인 명소인 베틀바위 아래로 등산객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오랜만에 홀로 떠나는 배낭은 가벼웠다. 두타산 정상에서 야영하고 청옥산까지 종주할 계획이다. 산행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아침과 점심은 행동식,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 과일과 삶은 고구마 같은 간편한 음식을 챙겼다. 

아침 첫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다니다가 홀로 떠나는 것이 홀가분하면서도 쓸쓸했다. 창밖으로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복잡한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떠나길 잘했다.

버스로 갈아타고 오전 11시 종점인 무릉계곡에 내렸다. 입장권을 구입하는데, 직원이 두타산 정상까지는 5시간이 걸린다며 베틀바위까지만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5시간이면 해가 지기 전 정상에 닿을 수 있을 테니 다행이었다.

쉰움산에서 이어지는 하산길에는 곳곳에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쉰움산에서 이어지는 하산길에는 곳곳에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이번 산행은 무념무상을 위해 떠나온 터,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생각 없이 최대한 많이 걷고,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누울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다. 무릉계곡을 따라 걸어도 좋겠지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들머리에서 바로 된비알로 들어섰다.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지만, 쉬지 않고 올랐다.

오르는 이들을 지나치고, 내려오는 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산에서 혼자 자냐?”고 물어왔다. 여성 혼자 백패킹을 가면 가장 난처한 질문이다. 친구가 숙영지에서 기다린다고 둘러대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래지 않아 베틀바위 전망대에 도착했다. 마지막 계단을 치고 올라오느라,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깔딱거리는 숨은 진정되지 않고, 심장박동소리가 귀에 들렸다.

베틀바위는 해발 550m. 하늘나라의 질서를 어긴 선녀가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다가 비단 세 필을 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첨봉들이 줄지어 하늘을 향해 병풍처럼 치솟아 있었다. 아직 해가 넘어오지 않은 오전이라 그늘이 졌지만, 오후 햇살이 비췄다면 황금빛 거대한 베틀을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전망대 아래로 등산객 무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두타산 등산로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윗길이 잦아 주의를 요한다.
두타산 등산로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윗길이 잦아 주의를 요한다.

두타산에서 쉰움산으로

잠깐 멈춘 동안 땀이 식어 이제 막 정오가 지났음에도 그늘진 등산로는 한기가 느껴졌다. 얇은 옷을 하나 꺼내 껴입었다. 아침도 굶은 채 걸었음에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체력 안배를 위해 초코바 하나를 먹었다. 기분에 따라 몸을 혹사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상으로 향하면서, 두타산을 다녀온 지인들이 왜 혀를 내둘렀는지 이해가 됐다. 배낭을 내리기 싫을 정도로 길은 끊임없이 오르막으로 이어져 있었다. 산은 마음에 들었지만, 멋진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비해 인터넷에서 본 두타산 정상은 평범했다.

백패킹 명소인 만큼 다른 백패커들도 있을 것 같아 망설여졌다. 좀 더 낭만적인 곳이 없을까?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위성지도 어플을 열었다. 다행히 두타산에서 이어진 근방의 능선은 통제구간이 없었다. 지도를 확대해 가며 장소를 찾다 보니, 두타산 정상 바로 아래 능선 갈림길이 있었고, 쉰움산이라는 표기와 함께 암릉구간을 발견했다.

거대한 암릉 덩어리로 이뤄진 쉰움산 정상. 두타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를 비롯해 멀리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거대한 암릉 덩어리로 이뤄진 쉰움산 정상. 두타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를 비롯해 멀리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자립형 텐트를 가져온 터라, 바위 위에서도 야영은 가능했다. 서두른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두타산과 청옥산 종주는 다음으로 미루고, 마음이 내키는 쉰움산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르막은 남았고, 컨디션도 생각해야 했다. 쉰움산 능선 갈림길에 도착한 후, 시간을 보고 가까운 두타산 정상으로 갈 것인지, 쉰움산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기로 했다. 혼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랜만에 세계여행 할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정처 없이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물고,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말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위가 많아졌고, 배낭의 무게가 느껴졌다. “웅웅” 소리를 내며 불어 닥치는 매서운 바람은 땀이 맺힐 새도 없이 차갑게 식혀 주었다. 재킷 하나를 더 껴입었다. 메말라가는 눈동자를 보호하느라 눈물이 계속 흘렀다. 급하게 짐을 싸느라 선글라스를 놓고 온 게 아쉬웠다. 재킷 후드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사람은 없었지만, 마스크를 쓴 채 올랐다. 숨쉬기는 버거웠지만, 챙겨온 얇은 버프보다는 따뜻했다. 따뜻한 방한복을 갖추고 나니 한결 여유로웠다. 드디어 갈림길에 도착했다. 오후 2시. 쉰움산 정상까지 1시간 반 정도 예상한다면, 무리는 없었다. 목적지를 쉰움산으로 정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쉰움산 정상의 절벽 끝에 앉아 자연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일상에서의 모든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쉰움산 정상의 절벽 끝에 앉아 자연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일상에서의 모든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며칠 전 내린 눈과 수북한 낙엽이 뒤엉겨 있어 가파른 하산길이 녹록하지 않았다. 스틱을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발 디딜 곳을 살피며 걸었다. 고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오솔길이 나타나면서 두타산 그늘에서 벗어나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비췄다. 황금빛 오솔길을 걸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갑자기 암릉구간이 나타났고, 드디어 쉰움산에 들어섰다.

쉰움산은 두타산 북동쪽에 솟은 작은 봉우리다. 산 곳곳에 치성을 드리는 제단과 돌탑이 즐비하다. ‘쉰움’이란 50개의 움이 팼다는 뜻으로, 수많은 웅덩이가 패인 암반지대다. 한자로는 오십정五十井산으로도 표기한다. 쉰움산에는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쓴 천은사天恩寺라는 고찰이 있다.

거대한 암릉 덩어리 위에는 크고 작은 웅덩이가 있고, 곳곳에 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다. 뒤로는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절경을 이룬다. 내가 꿈꾸던 최고의 야영 장소였다.

바람 속에서 텐트를 고정할 바위를 찾아 날랐다. 텐트가 기울었지만, 여행하면서 늘 그랬듯이 매트 밑으로 배낭과 옷가지 등 잡동사니를 받쳐 수평을 만들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드리우자 하늘엔 별이 빼곡히 드러났다. 그리웠던 힐링과 낭만이 그대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훌쩍 떠나온 탓에 걱정한 지인들의 연락이 이어졌고 외로움도 잊은 채 밤이 깊어갔다.

곳곳에 제단과 돌탑이 즐비한 쉰움산에서는 기암과 더불어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곳곳에 제단과 돌탑이 즐비한 쉰움산에서는 기암과 더불어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절벽 쪽으로 알바, 되돌아가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떴다. 카메라를 들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 동해 바다 수평선 위로 가늘게 오렌지빛 여명이 펼쳐졌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지만, 바람도 시간도 멈춘 공간이었다. 하염없이 동쪽을 바라보았다. 1분1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끓여 놓고 기다렸다. 드디어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따뜻한 기운과 함께 바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하산길이 짧아 아침식사는 내려가서 하기로 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숙영지를 정리했다. 멋진 하룻밤을 제공해 준 쉰움산에 감사 인사를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천은사 방향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하산해야 했지만, 너무나 뚜렷한 능선길로 들어섰다. 위성지도 어플에는 그쪽으로도 하산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20분 정도 걸으니 멋진 절벽이 나타났다. 신나게 사진을 찍고 하산길로 50m 정도를 내려가니 인적은 끊기고 가시나무와 절벽이 나타났다. 길을 골라가며 내려가려 해도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20분 정도 길을 찾다 포기하고, 다시 천은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갔다.

도중에 만난 어르신들께 여쭤보니, 그쪽으로는 하산길이 없다는 것이다. 괜한 모험심에 시간과 체력만 낭비했다. 배낭을 내리고 가뿐해진 마음만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구마를 몇 개 까먹었다.

근방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많이 올라왔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두타산만큼 사랑 받는 산이었다. 민폐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내려오길 잘했다. 갈림길에서 1시간 만에 천은사에 도착했다. 사찰을 둘러보며 마음을 정리하고, 재충전된 기분으로 버스에 올랐다.

수평선의 짙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강렬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수평선의 짙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강렬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산행정보

1일차 무릉계곡 들머리(248m) - 베틀바위(380m) - 쉰움산 갈림길(1,132m) - 쉰움산(650m) : 8.3㎞ 약 4시간 30분 소요

2일차 쉰움산·천은사 갈림길(600m) - 쉰움산 절벽(672m 하산길 없음) - 천은사 갈림길·천은사(228m) : 4㎞ 약 2시간 20분 소요 (순수 산행 시간 1시간 10분 소요)

대중교통정보

무릉계곡행 서울역에서 동해역으로 KTX로 이동 - 동해역에서 111번 버스(1일 18회 운행)로 무릉계곡 종점 하차. 약 40분 소요)

천은사행 서울에서 삼척터미널로 이동 - 삼척터미널에서 30번 버스(1일 3회 8:40, 12:10, 18:00)로 내미로마을 하차(약 30분 소요) / 내미로에서 삼척터미널행 버스(1일 3회 9:10, 12:40, 18:30)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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