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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나홀로 우리 땅 걷기-울릉도] 눈에 파묻혀, 바다에 홀려… 울릉도에 빠지다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 입력 2022.04.2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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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나리분지는 한 폭의 수묵화이다.
나리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나리분지는 한 폭의 수묵화이다.

바다 건너, 마음속 깊이 사모하던 친구를 만나고 왔다. 망망대해 동해에 오롯이 떠있는 섬, 울릉도는 바람과 파도가 깎아서 만들어 놓은 섬이다. 높고 작은 산봉우리 사이사이 만들어진 작은 틈새에 마을이 있고, 산봉우리들이 가두어 놓은 나리 분지가 있다.

어디를 여행하든 마찬가지겠지만 깊은 섬 울릉도의 속살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면 ‘걷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성인봉 등산로,  옛길, 울릉해담길, 해안산책로 등 걷기 좋은 길을 섬 곳곳에 품고 있다.

순백의 평원, 나리분지의 적막이 깨질세라 천부에서 나리분지를 운행하는 버스도 조용하게 길을 간다.
순백의 평원, 나리분지의 적막이 깨질세라 천부에서 나리분지를 운행하는 버스도 조용하게 길을 간다.

수묵화의 점이 되다, 성인봉

성인봉(984m)은 울릉의 중심이다.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울릉읍, 서면, 북면에 두루 걸쳐 있다. 성인봉에 들지 않고서는 울릉도를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 울릉도의 가장 순수한 속살이다. 성인聖人, 성스러운 사람이 사는 산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가? 성인봉에 들면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해발 1,000m도 안 되는 산이라고 얕잡아보면 안 된다. 해수면에서 등산로가 시작되고 성인봉까지는 오르막이 계속된다. 이정표는 비교적 잘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강설량이 최고이고, 3월에도 눈이 내리는 울릉도에서 가장 많은 눈을 뿌리는 성인봉이니 겨울철에는 길을 찾기 쉽지 않다.

울릉도 도착 첫날, 지체하지 않고 성인봉으로 향한다.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KBS 중계탑에서 성인봉을 거쳐서 나리마을로 하산하는 코스를 택했다. 시작은 평이했으나 오를수록 눈이 많다. 그래서인가 산에는 인기척을 찾기 어렵다. 산행 경험이 없는 분들과 함께하니 긴장감이 더 크다. 일부 구간은 러셀은 되어 있어도 원래 산행코스가 아니어서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정상 코스로 돌아왔다.

눈이 가득한 산의 모습에 취해서 발길을 옮기기 어렵다. 설산 트레킹을 맛보면 그 맛은 중독이 강해서 겨울이면 산으로 향하게 되는데 등린이들이 설산을 맛보았으니 뒷감당은 어찌할지.

삼각봉 바로 아래 구간에는 너무나 많은 눈이 쌓여 있어 발을 옮기기조차 힘들다. 표지판이 묻힐 정도로 눈이 쌓여 있다. 정상까지 800m를 남겨 놓으니 바람이 심하게 분다. 눈과 바람과 사투하며 한발 한발 전진한다. 등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곳곳이 눈이 가득 쌓인 낭떠러지. 들머리까지 이동할 때 이용한 택시기사 말씀이 생각난다. 

“성인봉 오르는 길 옆이 낭떠러지인 곳이 참 많습니다. 길이 아닌 곳은 절대로 가지 마세요.”

눈이 덮여 있으니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란 말인가?

드디어 성인봉 도착! 올라오며 보았던 설산의 매력을 정상에서 배로 느낀다. 사진도 영상도 우리가 눈으로 본 설산의 풍경을 모두 담지는 못한다. 

하산은 올라올 때보다 열 배는 더 어렵다. 경사가 심한 구간에 눈이 워낙 많이 쌓여 있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아이젠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미끄러진다. 조심스레 스틱으로 눈을 두드려본 후에 아기 걸음 걷듯 한발 한발 걸음을 뗀다. 경사가 급한 길은 엉금엉금 긴다. 성인봉 직전 마지막 1km가 상당히 힘들었는데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나리분지가 1km 정도 남은 구간에 도착하니 위험구간이 모두 끝난 듯하다. 알봉전망대에서 잠시 긴장을 풀고 나리분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알봉이 담겨진 경치를 감상한다. 어떤 화가가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나리분지는 설국이다. 너무 일찍 긴장을 풀었나보다. 나리분지로 내려가는 계곡의 데크 계단은 어찌나 위험한지.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어디가 계단의 끝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두 발과 스틱으로 몇 번이나 다지고 확인해서 한 계단 한 계단을 내려선다. 

힘겹게 눈과 사투하며 내려가는 계단 길의 끝자락에 이르니 두터운 얼음 사이로 계곡물이 시원스럽게 졸졸졸 흐른다. 바위틈에서 얼음을 박차고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경쾌하다. 온 몸을 개운하게 씻어 주는 신령수 한 잔으로 피로를 날린다.

투막집에 잠시 들어가서 추위도 녹이고 휴식을 취한 후 나리분지로 향한다. 울창한 원시림 숲길이 펼쳐지며, 모처럼 편안해진다. 너무나 아름답고 건강한 길이다. 빨리 걷기가 아깝다. 촉촉하고 풋풋한 향기가 가득하다. 초록잎이 무성할 때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다. 나리분지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다. 저런 하늘이 일찍 열렸으면 좋았을 텐데. 무탈하고 즐겁게 성인봉을 다녀왔음에 감사한다.

절벽의 바위 사이를 가로지르는 해안절경이 이어지는 행남해안산책로.
절벽의 바위 사이를 가로지르는 해안절경이 이어지는 행남해안산책로.

울릉도 걷기 매력에 푹 빠지다, 행남해안산책로~행남옛길

울릉도민들이 걷기 코스로 가장 많이 추천하는 행남해안산책로의 전체거리는 2.6km. 저동항 주변길이 유실되어서 도동에서 행남마을까지는 해안산책로를 걷고 행남옛길로 도동등대를 거쳐서 저동으로 나오면 바다 절경과 깊은 원시림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출발은 도동항. 에메랄드빛 바다만 바라보고 걸어도 좋은데 바다 위에 불쑥 솟은 절벽, 파도가 만들어 놓은 해식동굴, 그 동굴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파도의 몸부림까지 즐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걷는 길은 이국적이다. 

저동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폐쇄된 행남마을에 다다른다. 이곳부터는 산속 오솔길이다. 짙은 솔향이 슬그머니 곁에 자리를 잡는다. 이젠 숲길트레킹. 이 마을 뒷산에 있는 도동등대 일명 행남등대에 오르니 저동항과 촛대바위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동항을 가장 예쁜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도동등대에서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와 울릉군청과 저동항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길에서 저동항으로 향한다. 어느 길을 선택해도 울창한 해송이 우거진 숲과 푹신한 길을 걸을 수 있다. 잠시 눈을 감고 해송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온 몸의 감각이 새로워진다. 울창한 숲에는 고로쇠 수액 주머니도 눈에 뜨인다. 

파도소리도 사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의 세계엔 가끔 이름 모를 새들만이 인사를 나눌 뿐이다. 오솔길의 끝자락에서 섬조릿대 숲길이 나를 반긴다. 어느새 저동항과 촛대바위가 보인다. 엄마 품에 안긴 저동항이 앙증맞다. 함께 걸은 동행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말을 건넨다. 

“우리 이 길 오기를 정말 잘했어요.” 

산봉우리 사이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도동, 울릉도 관문이자 관광의 시작점이다.
산봉우리 사이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도동, 울릉도 관문이자 관광의 시작점이다.

설국에 들다, 알봉둘레길

울릉도 버스기사님들이 가장 많이 추천한 베스트 코스가 알봉둘레길. 알봉둘레길은 나리분지 옛길에서 이어진다. 약 5,000년 전 울릉도 마지막 화산폭발로 생성된 알봉은 점성이 강한 용암이 멀리 흐르지 못하고 봉긋한 돔 형태로 그대로 굳어졌다. 마치 새의 알처럼 생겨서 알봉이라 부른다. 

알봉둘레길을 거쳐서 깃대봉을 올랐다가 울릉천국으로 하산하려고 계획한 날. 새벽에 무섭게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잦아든다. 잔잔한 봄비가 울릉도를 적시고 있다. 울릉도 시내는 봄비인데 나리분지 날씨를 확인하니 진눈깨비가 사정없이 내린다. 택시기사님이 알봉으로 오르는 길은 밤새 눈이 내렸을 거라며, 특히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몇 번을 당부하신다.

나리마을로 들어서니 이곳이 바로 설국이다. 성인봉에 올랐던 이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산으로 향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잠시 주춤하다가 스패츠를 신고 스틱도 꺼내고 트레킹 준비를 마친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바로 되돌아오자.”

나리마을에서 추산~나리 탐방로로 들어선다. 사람 그림자도 없고 눈 위에 발자국조차 없다. 한참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설국만을 바라본다. 천천히 발을 옮긴다. 내 발자국이 쌓여 길을 만든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내 발자국만이 친구가 되어 나를 따라온다. 가다 서다 뒤돌아보다 그렇고 걷고 또 걷는다. 

밧줄이 묶여 있는 좁은 길에 들어서면 긴장된다. 아주 좁은 길을 벗어나면 발은 한없이 깊은 눈 속으로 들어간다. ‘앗’ 놀라기를 여러 차례. 깃대봉으로 오르려던 마음은 접고 알봉둘레길만 도는 것으로 만족한다. 

깃대봉을 지나니 캠핑장에는 백패커들이 만들어놓은 이글루가 있다. 모두 철수한 뒤라 캠핑장엔 적막만이 흐른다. 지난밤에 묵었던 백패커들은 모두 깃대봉이나 성인봉으로 오르지 않고 나리분지로 갔는지 발자국이 나리분지로만 향하고 있다.

이젠 안심! 앞서 간 이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되니 긴장의 끈을 놓는다. 마음이 편하니 발걸음도 더욱 편하다. 투막집이 보이니 길이 낯익다.

내수전~석포 옛길은 내수전전망대 초입에서 시작된다. 울릉읍 내수전에서 북면 석포까지. 오르내림이 있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이다. 내수전전망대, 정매화골쉼터, 안용복기념관, 독도의용군수비대기념관, 석포전망대 그리고 천부까지 이어진다. 북면에 살던 어린이들이 울릉읍에 있는 학교를 이 길로 오갔다고 한다.

데크로 만들어진 태하 해안산책로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울릉도 바다를 바로 곁에서 보고 만져볼 수 있다.
데크로 만들어진 태하 해안산책로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울릉도 바다를 바로 곁에서 보고 만져볼 수 있다.

꼬맹이들의 통학로, 내수전~석포 옛길

인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시골길을 걸으며 새소리, 바람소리, 계곡물소리를 나 홀로 즐기면서 어찌나 신바람이 나는지 외롭거나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참 숲속을 걸으니 ‘정매화골 쉼터’이다. 토착민들 중 정매화라는 사람이 살던 곳이어서 정매화골이라 부르는데 도동에서 천부로 가는 중간지점이다. 걷는 이들이 쉬어가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북면 가까이 들어서니 길 양쪽으로 동백나무 군락지가 시작되더니 북면으로 넘어서도 좀처럼 끝날 줄 모른다. 동백꽃이 피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볍다. 울릉읍에서 북면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고로쇠 수액 주머니 행렬이 나를 반겨준다. 

관음도와 죽도를 바라보다가 고로쇠 물맛을 상상하며 걷는다. 석포산장 주인장의 호의로 상상이 현실이 된다. 시원하고 달콤한 인삼향이 가득한 고로쇠 수액을 아낌없이 내어 주시고 가지고 있는 물병에도 가득 담아 주신다. 해발 400m 이상의 산중턱에서 생산된 울릉도의 ‘우산고로쇠’는 전국에서 가장 물맛이 좋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주인장은 “눈이 많이 와야 고로쇠 물이 많이 나는데 올해는 눈이 작년의 반도 오지 않아서 생산량이 적다”고 한다. 

우산고로쇠 수액은 미네랄 성분 중 칼슘, 칼륨, 마그네슘, 아연 등이 포함돼 있고 칼슘은 생수보다 40배 이상 함유돼 있다. 특히 우산고로쇠 수액은 사포닌 성분이 풍부해 특유의 인삼 향과 홍삼 맛이 난다. 

석포산장을 내려오니 안용복기념관, 독도의용군수비대기념관이 있다. 잠시 걷기를 멈추고 두 곳의 기념관을 천천히 관람하고 오늘의 종착지인 석포일출일몰전망대로 오른다. 1905년 러일전쟁을 위해 일본해군이 망루를 설치해 러시아의 함대 이동을 관측했다고 한다. 전망대에 오르니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 곁에 북쪽으로는 송곳산이 우뚝 서 있고, 오른쪽에는 관음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관음도 일출을 보기에 최고의 포인트이다.

울릉도 최고의 비경, 대풍감전망대길

‘바람을 기다린다’는 뜻의 울릉도 최고의 비경 대풍감.  울릉도 어느 곳인들 절경이 아닌 곳이 없겠지만 대풍감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에 꼽힐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대풍감으로 가기 위해 태하황토구미로 향한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의 황토를 조정에 진상했다고 한다. 미국 그랜드 캐니언의 스카이워크를 본 따 만들었다는 스카이워크의 벽에는 태하와 학포의 역사 이야기가 가득하고 발아래로는 조금은 아찔하지만 에메랄드빛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현재는 태풍 피해로 대풍감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관광모노레일은 운행하지 않는다. 스카이워크에서 연결된 태하 해안산책로를 따라 대풍감으로 향한다. 바닷가를 따라서 만들어진 데크길은 아이도 어르신도 모두 걷기 좋은 길인데다 바다로 나아갈 수도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울릉도 바다를 바로 곁에서 보고 만져볼 수 있다.

이곳은 울릉도 지질명소 중 하나로 침식지형이 발달해 수려한 해안절경을 자랑한다. 해안산책로를 조금 걸어가니 가재굴이다. ‘가재’는 ‘물개’의 울릉도 사투리. 예전에는 이곳에 물개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해안산책로 끝에서 소나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대풍감전망대로 향한다. 전망대까지 이르는 길은 솔잎이 수북하다. 적당한 쿠션으로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진다.  

언덕 정상에는 대풍감 제1전망대와 대풍감 제2전망대가 나란히 쌍둥이처럼 서있다. 태하부터 현포항, 추신항, 선창까지 해안 절벽이 아스라이 연결된 라인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뉴질랜드 해안을 연상하게 하지만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아름답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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