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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신영철의 산 이야기] 마음은 월드챔피언 클로이 김, 하지만 몸은…

글 신영철 산악문학가 사진 정임수 시인
  • 입력 2022.04.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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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모스스키장
올림픽 2연패 스노보드 챔피언 배출한 미국 서부 최고의 스키장을 가다.

맘모스스키장의 메인 로지 앞에 서있는 우람한 맘모스 동상이 이곳의 랜드마크이다.
맘모스스키장의 메인 로지 앞에 서있는 우람한 맘모스 동상이 이곳의 랜드마크이다.

산 이름이 맘모스Mammoth(3,369m)이기에 고생대 공룡들이 뛰어 다니던 곳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메인 로지Main Lodge 앞에는 맘모스 조형물이 정상을 향해 거대한 상아를 치켜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맘모스와는 전혀 관련 없는 곳. 

맘모스라는 명칭은 이곳에서 땅을 파내던 광산회사 이름. 광산은 망해 없어졌지만 시나브로 진짜 맘모스가 태어났다. 높이 3,300m가 넘는 산 정상에서, 산 아래 호텔까지 곤돌라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거대한 스키장이 그것이다. 당연히 산간마을 맘모스시市도 생겨났다. 시에라산맥 봉우리 중 맘모스는 유별나다. 맘모스산과 스키장, 맘모스시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특별한 산악종합선물로 기능한다.

정임수 시인이 2월 하순 맘모스로 스키를 타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때 대한산악연맹 관계자들 몇 명이 재미연맹 초청으로 온다는 것. 재미연맹은 연례행사로 맘모스스키장에서 미국의 가맹단체장을 초대해 스키를 즐긴다. 반가운 얼굴들도 만나 볼 겸 맘모스행을 결정하고 모든 예약을 마쳤다. 

하지만 오미크론이 발목을 잡아서 모임은 취소되었다. 그리하여 둘이 떠난 오붓한 여행. 눈 컨디션이 아주 좋다고 했다. 시에라네바다산맥 한가운데쯤 위치한 맘모스봉의 적설량은 유명하다. 평균 10m가 넘는 눈이 7월까지 녹지 않고 버티니까.

얼어 붙은 시에라산맥. 요세미티공원 쪽으로 끝없이 산이 이어져 있다.
얼어 붙은 시에라산맥. 요세미티공원 쪽으로 끝없이 산이 이어져 있다.

“혹시 클로이 김을 아세요?”

“뉴스에서 봤어요. 베이징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딴 재미교포 소녀… 아니 아가씨.” 

“예전 맘모스스키장에서 클로이 김과 함께 사진 찍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꼬마일 때부터  그녀의 팬이었거든요. 운이 좋다면 이번에도 그녀를 만날 수 있겠네요.” 

 맘모스 봉우리 정상에 서있는 표지판. 1,1053피트는 해발 3,369m이다.
맘모스 봉우리 정상에 서있는 표지판. 1,1053피트는 해발 3,369m이다.

맘모스스키장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정임수 시인이 슬쩍 클로이 김을 끼워 넣었다. 그녀를 모르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 사는 교포들 사이에서 그녀는 야구의 박찬호급 우상이다. 당연히 만나보고 싶은 자랑스러운 한국인. 정 시인은 클로이 김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한국 이름은 김선. 나이는 22세. 미국 명문대학인 프리스턴 재학 중. 재미교포 아가씨로서 2018년 평창과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하프파이프Half pipe 부문 2관왕. 한국어와 프랑스어도 구사하며 K-POP 팬으로 방탄소년단, 샤이니,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등의 노래를 즐겨 부름. 

“맘모스는 미국의 많은 올림픽 선수들을 배출해 낸 곳입니다. 클로이 김 때문에 스노보드 성지로 불리고요. 대한스키협회도 스키·스노보드 선수 훈련장소로 활용하고 있어요.”

나 역시 맘모스를 좋아한다.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까. 그럴 것이 50km 정도 가면 요세미티국립공원이니 경치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이곳은 사계절 전천후 베이스캠프.

박물관 안에 비치된 고정 원통. 미나레츠Minarets(시에라산맥의 첨봉들) 배너 피크Banner Peak에 맞춰져 있다.
박물관 안에 비치된 고정 원통. 미나레츠Minarets(시에라산맥의 첨봉들) 배너 피크Banner Peak에 맞춰져 있다.

3,369m 스키장 정상 고소증세로 아찔

도착한 통나무 캐빈 스타일 로지 지붕엔 눈이 높다. 설국 풍경은 유럽 알프스의 산간마을을 연상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아마 전 세계에서 눈 치우는 시합이 있다면 이 맘모스 타운이 1등을 할 것이다. 최신 제설차와 눈 치우는 노하우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아무리 폭설이 와도 금방 치워버린다. 도로는 물론 숙소 문 앞까지. 그래야 먹고 사는 작은 도시이니까. 맘모스 정상이 창문 밖에 우뚝하다. 3,000m가 넘는 정상까지 곤돌라가 줄지어 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정상에는 절벽에 가까운 난이도를 자랑하는 최강의 슬로프가 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느낌을 주는 코스. 부끄럽지만 해마다 그 코스를 도전하려다 포기했다. 앞에 섰다가 돌아서 다시 곤돌라 타고 중급 코스로 내려간 적이 많다. 정 시인은 보란 듯 그곳에서 뛰어 내리는 실력파였다. 그때뿐이지만, 존경의 내 눈빛을 그는 읽었을까? 

이튿날 날씨가 화창했다. 우선 정상에 올라 주변 파노라마 사진을 찍기로 했다. 우리가 탄 곤돌라 아래로 백색의 설원을 누비는 스키어들 동선이 보기 좋다.  

“저기 좀 내려다보세요. 하프파이프 경기장입니다. 클로이 김이 연습하던 곳이기도 하고요.”

하프파이프 경기장은 눈으로 만든 거대한 원통을 절반으로 자른 모양이다. 가파른 내리막 코스. 스노보드로 그곳을 내려오다 점프해 연기를 펼치는 게 하프파이프 경기의 핵심.

시에라산맥에 위치한 맘모스 스키장은 평균 적설량 10m에 이르는 눈의 고향이다. 
미국 스키 국가대표 훈련장이기도 하다.
시에라산맥에 위치한 맘모스 스키장은 평균 적설량 10m에 이르는 눈의 고향이다. 미국 스키 국가대표 훈련장이기도 하다.

“모든 스노보드 기술을 접목시킨 종목이 하프파이프입니다. 클로이 김이 2회 연속 1,080도 회전을 성공시키며 금메달을 땄어요. 독보적 기술로 공중제비를 세 바퀴 돈 겁니다.”

아찔한 경사면을 쏜살같이 내려오며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그림으로도 무서운데, 실제로 보는 하프파이프 경기장이 살벌하다. 우리가 탄 곤돌라는 맥코이정류장McCoy Station을 거쳐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엔 카페와 작은 박물관Eleven53 Interpretative Center & Cafe이 있다. 일레븐53이라는 이름은, 정상 높이 11,053피트에서 가운데 0을 뺀 줄임말. 

문을 열고 밖을 나서니 숨이 가쁘고 몹시 춥다. 고도를 갑자기 올렸으니 당연히 찾아 온 경미한 고소증. 눈에 쌓인 정상 표시판에 11,053ft(3,369m)라는 표시가 또렷했다. 캘리포니아의 스키 리조트 중 가장 높은 정상 고도다. 청명한 군청색 하늘 아래 시에라산군의 끝없는 겨울 풍경이 시야를 압도한다. 그야말로 장관. 

숙소에서 곧장 스키와 리프트를 타고 정상으로 갈 수 있다. 편리한 시설이 돋보인다.
숙소에서 곧장 스키와 리프트를 타고 정상으로 갈 수 있다. 편리한 시설이 돋보인다.

맘모스 정상의 파노라마 풍경 

이곳 맘모스 봉우리를 여러 가지 이유로 사계절 올라와 봤다. 높이와 덩치답게 맘모스는 그 품에 무수한 자연호수를 품고 있다. TV 촬영 차 곤돌라를 타고 이곳 정상에서 호수까지 걸어 내려가기도 했다. 여름에는 산악자전거를 타고 기분 나쁜 ‘가미가제’라는 이름의 급경사 하산길을 달려도 봤다. 

맘모스는 1년 내내 운영되는 리조트다. 산을 가로지르며 수백 km의 산악자전거 도로가 존재한다. 여름 산악자전거 페스티벌은 전 세계 산악자전거 애호가들이 찾는 인기 명소. 자전거 싣고 나르는 정상 곤돌라는 여름에도 성수기였다. 맘모스 북쪽에는 요세미티국립공원이, 남쪽에는 세쿼이아 및 킹스캐니언국립공원이 잇대어 있는 산악관광 요충지. 

헬리콥터를 타고 이 정상 위를 날며 주변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그러나 기억에 각인된 최고의 풍경은 따로 있다. 지금처럼 모든 게 얼어붙은 정상에서 만난 파노라마. 요세미티 쪽으로 미나레츠Minarets 침봉들이 톱날처럼 삐쭉삐쭉 서있다. 바늘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화강암 봉우리들이 어깨 걸고 서있어 ‘첨탑들’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무려 17개의 미나레츠 침봉에는 등반가들 이름이 붙어 있다. 노먼 클라이드Norman Clyde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클라이드 미나레츠가 이 중에서 최고봉. 그는 1928년 자신이 올라 명명된 클라이드 미나레츠를 포함 130개 이상의 초등을 기록한 유명한 산악인. 우리도 그 침봉 중 피라미드 모양의 배너 피크Banner Peak를 오른 적이 있었다.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2연패를 차지한 미국 한인교포들의 우상 클로이 김. 지난 평창올림픽에서의 점프 모습. 사진 조선일보DB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2연패를 차지한 미국 한인교포들의 우상 클로이 김. 지난 평창올림픽에서의 점프 모습. 사진 조선일보DB

장엄하며 장쾌한 눈 덮인 봉우리들을 360°로 감상할 수 있는 맘모스의 정상. 상상할 수 있는 겨울 시에라산맥의 가장 멋진 전망 터를 찾는다면 바로 이곳이다. 상당히 춥다. 우리는 따뜻한 실내로 옮겨 커피를 시켰다. 정류장에 붙어 있는 카페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그곳의 작은 박물관엔 맘모스 산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들과 모형이 전시되고 있었다. 통유리창 밖으로 탁 트인 전망을 제공하는 이곳은 무료 방문이다. 창가에 고정시켜 놓은 원통을 통해 미나레츠 각 봉우리를 볼 수 있다.

몸을 녹인 후 우리는 밖으로 나와 스키를 신었다. 매번 절벽 같은 고급 코스에 겁먹어 실패했지만 드디어 오늘은 첫 활강을 할 것이다. 헬멧 끈을 조이고 출발선에 섰다. 갑자기 휙-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정 시인이 날았다. 그가 회전하며 눈보라를 만드는 게 보이는데 나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질 머리가 난다. 무리할 건 없다. 스키를 벗었다. 곤돌라 때문이다. 

급하게 정상에 왔기에 경미한 고소증이 왔다고 믿기로 했다. 폼은 안 나지만 다시 곤돌라 타고 중급인 맥코이 스테이션으로 내려갔다. 점심 때 그곳에서 정 시인을 만나기로 했었다. 하강하는 곤돌라 안에서 내년엔 꼭 뛰어 내리겠다고 기약 없는 다짐을 하며 혼자 웃는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높은 곳(3,369m)에 있다는 정상의 카페,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한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높은 곳(3,369m)에 있다는 정상의 카페,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한다.

개성 철철 넘치는 스키장  

점심시간, 맥코이 스테이션 카페에서 정 시인을 만났다. 스키를 벗고 실내를 들어서니 사람이 북적인다. 아직 초보 스키어라는 걸 증명하듯 산행으로 단련되었다고 주장하는 다리가 뻐근하다. 커다란 식당엔 많은 사진이 붙어 있다. 사진에는 결혼식 장면도 몇 개 보인다. 

특별한 곳을 찾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결혼식도 올리는 모양. 맞춤형 메뉴를 갖춘 고급 레스토랑과 산속 멋진 설경 속에서의 결혼. 결혼식 복장으로 부부가 스키를 타고 산을 내려가는 사진도 보인다. 눈부신 웨딩드레스가 날리는 별난 활강 사진은 주변 경치와 참 잘 어울렸다. 

“돈 많은 사람들이 이 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려요. 숙박 시설도 잘되어 있고 하객들도 곤돌라를 타고 오는 결혼식이지요. 미국은 정말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아요.”

“클로이 김을 만나 인증 사진 찍게 만들어 준다면서요? 어떻게 되었어요?”   

“하프파이프 경기장을 가봤는데 클로이 김은 없더라고요. 아마 방학이 끝나 대학으로 돌아 간 모양입니다. 그녀 아빠는 클로이 김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는 걸 싫어했대요. 다만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 그때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는 사진의 클로이 김 머리색이 노란 거구나. 그녀 역시 개성 넘치는 한국계 미국인이 맞다. 분명한 것은 딸보다 개성이 더 철철 넘친 아빠였다. 딸이 네 살 때부터 삼천지교三遷之敎로 만든 작품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별난 아빠 스토리를 읽을 수 있다. 신나게 말하는 정 시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제 창밖의 동양 여자가 모두 클로이 김으로 보인다. 점심과 함께 수다를 떨다 밖으로 나와 정 시인과 헤어졌다.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과 타는 스키는 스트레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내가 정 시인 실력에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반면,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이 부담된다. 그리고 클로이 김은 공중제비까지 하는데, 가파른 슬로프에서 쩔쩔 매는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개미처럼 하늘을 오가는 리프트와 곤돌라가 바쁘다. 그것들을 타고 능선을 넘어 정 시인이 못 찾을 이글Eagle코스로 갔다. 그곳에 내 허약 체질에 맞는 슬로프가 많기 때문. 

아득한 설원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스키를 즐기고 있다. 주변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기꺼이 풍경이 되는 스키어들. 시인은 손으로 하얀 종이 위에 시를 쓰지만, 저 사람들은 순백의 눈 위에 스키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각기 저 나름의 기교로 눈밭을 지쳐 나가는 개성. 언제고 개성 넘친다는 클로이 김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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