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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나홀로 세계일주] 4,000m 고산에 숨어 있는 에메랄드빛 호수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 입력 2022.04.2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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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우아라스 69호수

만년설이 덮인 차크라라후의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에메랄드빛 69호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절경을 선물한다.
만년설이 덮인 차크라라후의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에메랄드빛 69호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절경을 선물한다.

페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추픽추, 와카치나사막, 나스카 그리고 요즘 들어서 SNS에 많이 등장하는 무지개산 비니쿤카 말고 조금 색다른 명소를 추천하자면 우아스카란국립공원Huascaran National Park이다. 특히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페루에서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소이다. 

‘남미의 스위스’로도 불리는 우아스카란국립공원은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안데스산맥 중앙에 위치하고 우아스카란(6,768m), 알파마요(5,947m) 등 해발 5,000m 이상의 고산이 즐비하고, 600여 개가 넘는 빙하와 그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에메랄드빛 호수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우리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융가이 메르카도의 야채 파는 가게,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이 무척 저렴하다.
우리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융가이 메르카도의 야채 파는 가게,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이 무척 저렴하다.
특히 우아스카란국립공원의 호수 중에서 69호수(4,604m)는 피스코Pisco(5,752m)와 차크라라후Chacraraju(6,112m)의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린 물이 고여 생긴 호수이다. 눈 덮인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에메랄드빛 호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절경을 선물한다. 국립공원 내에서 69번째로 발견되어서 69호수라 부른다. 
융가이 콜렉티보 정류장. 이곳에서 69호수 가는 콜렉티보를 이용한다.
융가이 콜렉티보 정류장. 이곳에서 69호수 가는 콜렉티보를 이용한다.

가이드가 나만 빼놓고 출발

우아라스에 도착한 날 예약한 투어버스는 새벽에 픽업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오전 7시가 넘어서도 깜깜 무소식이다. 숙소 호스트는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말을 몇 번이나 하다가 가이드가 깜박하고 출발했다는 말을 전했다. 투어차량을 이용하지 못하면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콜렉티보(미니버스)를 타고 69호수를 가기로 했다. 호스트는 걱정이 되는지 작은 메모지에 교통편과 경유지를 써주면서 몇 번이나 같은 설명을 반복한다. 교통비는 더 들겠지만 현지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오고 가는 길의 풍경도 색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콜렉티보를 타고 경유지인 융가이Yungay에 무사히 도착했다. 해발고도 2,400m인 융가이는 작은 산골 마을로 우아스카란국립공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도시이다. 69호수까지 가는 콜렉티보는 출발하려면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남미 소도시의 대중교통 수단인 콜렉티보는 출발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만차가 되어야 출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제 겨우 3명, 나까지 4명이다. 최소한 7~8명은 모여야 할 터. 택시기사들은 유혹의 눈빛을 보내지만 홀로 택시를 타는 것은 너무 많은 비용이 수반되니 곤란하다. 일단 콜렉티보 기사에게 아침식사하고 올 테니 먼저 출발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식당을 찾아 나선다.  

아침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다가 메르카도(시장)를 발견.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픽업을 오지 않아서 상했던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장구경을 하면서 신바람이 난다. 오렌지 주스도 한잔 사 마시고 현지인들로 북적거리는 시장을 구석구석 구경한다. 

모자와 머리에 유난히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 할머니들도 곱게 단장하시고 시장에 나들이 오셨다. 뻥튀기 비슷한 과자도 팔고 시장 곳곳에 망고가 쌓여 있다. 보라색 옥수수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른다. 구워 먹으면 얼마나 맛날까?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시장구경하는 재미에 69호수 입구에도 못 가고 우아라스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걱정이 되어서 콜렉티보 정류장으로 돌아오니 다행히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지만 인원이 차려면 아직도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커다란 모자와 화려하게 머리를 장식한 융가이의 여인. 등 뒤에 맨 포대기는 짐을 넣거나 아기를 업는 데 사용한다.
커다란 모자와 화려하게 머리를 장식한 융가이의 여인. 등 뒤에 맨 포대기는 짐을 넣거나 아기를 업는 데 사용한다.

꼭꼭 숨어 있는 69호수를 찾아서

택시 한 대가 69호수 쪽으로 간다고 함께 가자고 한다. 요금은 15솔.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가 아닌 카풀이어서 그나마 이 정도 비용이다. 

택시는 구불구불 휘어지고 좁은 도로를 곡예운전하면서 한없이 위로 올라간다. 친절한 택시기사는 우아스카란국립공원 얀가누코Llanganuco 사무소에 차를 주차하고 입산 신고도 대신 기록해 주더니 69호수 출발지점에 나를 내려 주고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사라진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해야 하는 시간. 이곳의 해발고도는 약 3,870m. 시작도 높지만 4,600m까지 올라야 한다. 편도 7km, 왕복 14km를 걸어야 한다. 거리는 길지 않지만 고도가 높아서 호흡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들머리 입구에서 불쑥 올라온 설산을 바라보니 반가운 마음에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빙하가 흐르는 계곡에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이끼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가득하다.
빙하가 흐르는 계곡에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이끼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가득하다.

입구에 안내판이 전혀 없어서 걱정했는데 들머리 언덕 아래로 내려서니 국립공원 이정표가 있다. 투어버스를 이용해서 온 사람들은 이미 출발한 뒤라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는 강물이 흐르고 그 옆에는 소들만이 풀을 뜯고 있다.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뿌연 회색빛 강물은 무서운 속도로 쏟아져 내린다. 남미 특유의 서늘한 습기와 이끼가 가득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만들어낸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촬영했던 뉴질랜드의 풍광과 사뭇 비슷하다. 처음 온 길인데 낯익은 길처럼 느껴진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평화로운 풍경. 거칠고 황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초지가 꽤 넓다. 한참을 걸어서야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는 한 커플이 보였지만 말을 섞을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빨리 걷는데 나는 사진도 찍고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구경할 것도 너무 많아서 시간은 더욱 지체된다.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산 깊숙이 들어서니 만년설로 뒤덮인 산이며 폭포들이 눈길을 끈다. 산 위로 올라가는 길은 계속되었지만 69호수가 있음직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이 고개만, 이 산만 넘어서면 있을 줄 알았던 호수는 끝내 보이지 않는다. 

해발고도가 4,000m를 넘어서고 4,100m, 4,200m, 다행히 고산 증세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69호수를 다녀오는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지나친다. 오늘 투어버스를 이용해서 이곳을 걸은 사람들이다. 나도 투어버스를 탔더라면 저들과 함께 다녀왔을 텐데. 빨리 69호수를 보고 싶었지만 빨리 걸었다가 고산증세라도 나타나면 시간은 더욱 지체될 뿐이다. 내 페이스를 잃지 않고 호흡이 편한 정도로 조금 빨리 걷기만 한다. 

빙하물이 고산의 절벽 위에서 떨어지면서 거대한 폭포를 형성한다.
빙하물이 고산의 절벽 위에서 떨어지면서 거대한 폭포를 형성한다.

고산증세 걱정했지만…

나중에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니 트레킹 시작 1시간이 지나면서부터 호흡하기 어렵고 두통이 시작되었고 다리가 무거워서 걷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69호수가 아니라 죽음의 호수 가는 길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고산 체질인지 전혀 이상이 없다. 그런데 69호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정표나 길 안내 표시가 친절하지 못하니 가는 길이 더 멀게만 느껴진다.

마지막 1km 구간은 크고 작은 돌들이 난무한 지옥의 코스. 마치 설악산의 귀떼기청 너덜길 모습이다. 이곳의 바위가 귀떼기청보다는 더 크고 험하게 생겼다. 고산 증세가 나타날까 천천히 조심스럽게 걷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돌에 부딪치거나 넘어지는 것이다. 험한 바위들을 피해서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니 만년설 아래로 에메랄드빛 호수가 빼꼼 인사를 한다.

뉴질랜드의 통가리로 알파인크로싱에서 보았던 에메랄드빛이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산들에 둘러싸인 에메랄드빛 호수는 한 폭의 그림이다. 드디어 69호수 앞에 선다. 3시간여 걸었던 수고로움이 한순간에 씻겨나간다. 장엄한 설벽이 69호수를 호위하고 있다. 파란 하늘과 설산, 그리고 에메랄드빛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이 환상적이다.

내 앞에서 걷던 커플은 이미 도착해서 숙영지를 고르고 있다. 아~ 부럽다. 남미 대부분의 트레일에는 예약 없이 자유롭게 텐트를 칠 수 있는 곳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다음에 남미에 또 온다면 꼭!! 텐트를 가지고 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호수를 배경으로 열심히 셀카를 찍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커플의 그녀가 나에게 다가선다. 사진을 찍어 주겠노라고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그녀 덕분에 69호수를 배경으로 인증 샷도 멋지게 남겼다.

돌아올 때는 히치하이킹

이젠 우아라스까지 돌아가려면 빨리 이 트레일을 아웃해야만 한다. 69호수로 향하면서 돌아가는 교통편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콜렉티보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하루에 몇 번은 다닌다고 했다. 그러나 콜렉티보가 오지 않는다 해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어디에 항의할 수도 없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차를 마냥 기다리느니 히치하이킹을 선택하기로 했다. 만약에 지나가는 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런 상상은 하지도 말자.

한번 지나간 길이어서인지 돌아오는 길은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올라올 때는 마음이 바빠서 보지 못했던 거대한 폭포도 보이고 곳곳에 숨겨진 작은 호수도 참 많다. 가는 길, 오는 길이 같은데도 보이는 풍광은 사뭇 다르다. 천천히 하산하며 영화 같은 풍광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제는 빨리 서둘러 하산해야 한다. 올라올 때 전혀 느끼지 못했던 고산증세가 하산할 때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거라 믿으며 거의 뛰다시피 날머리로 향한다. 

택시에서 내렸던 트레일 입구. 이곳에서 차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마음이 바빠서 69호수 앞에서 먹으려고 준비했던 샌드위치를 꺼내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남의 차에 동승해야 하니 복장도 조금 단정하게 고치고 잠시 쉬고 있으려니 기다렸다는 듯이 저 멀리 RV 차량이 나를 향해 온다. 마치 차가 이때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손을 들자 차가 섰다. 

69호수 가는 길, 초입은 빙하 녹은 물이 평온하게 흐르는 푸른 초지가 광활하게 펼쳐 있다.
69호수 가는 길, 초입은 빙하 녹은 물이 평온하게 흐르는 푸른 초지가 광활하게 펼쳐 있다.

조수석에 있는 분이 목적지도 묻지 않고 차에 타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 차량은 콜렉티보를 탔던 융가이를 지나가야 한다.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 융가이까지 가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최종 목적지를 묻는다. 우아라스라고 대답하니 본인들도 그곳까지 간다며 우아라스에서 내리라고 한다. 이런 행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게다가 얀가누코호수 근처에 다다르니 호수 설명까지 해 준다.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빙하가 아무리 많이 녹아도 이 호수는 길가에 있지만 절대로 범람하지 않는다는 설명까지 곁들인다. 마치 가이드를 동반한 일일관광투어에 나선 기분이다. 

가끔 대책 없이 길을 나서도 항상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사히 숙소로 복귀를 했다. 길에 나서면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란만장한 남미 여행의 일상이 또 이렇게 행복하게 지나간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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