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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나홀로 우리 땅 걷기] 순천 조계산에서 봄·가을·겨울을 하루에 만나다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 입력 2022.05.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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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게 뻗은 대나무가 빽빽한 무소유길은 길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잡생각이 비워진다.
곧게 뻗은 대나무가 빽빽한 무소유길은 길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잡생각이 비워진다.

소백산맥의 끝 줄기에 있는 조계산은 해발 889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폭포가 있고, 동쪽으로는 ‘태고종’의 총본산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선암사가, 서쪽으로는 ‘조계종’ 승보사찰이자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집필된 송광사가 있다. 

지난 겨울부터 유독 남도여행을 참 많이 다녀왔다. 장흥과 순천을 다녀오면서 선암사에서 새 봄의 시작을 알리는 선암매를 본 후 100대 명산 중 하나인 조계산을 올랐다가 법정스님이 거처하시던 송광사로 가서 무소유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봄소식이 들려오니 더욱 조계산을 향하는 마음이 진해졌다. 조계산의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걸으며 내 삶의 방향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고도 싶었다.

선암사를 둘러보고 조계산 산행 후에 송광사까지 가려면 참으로 긴 일정이다. 많이 서둘러서 걸어야 하지만 어느 한 곳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벼르고 별러서 날을 정했건만 찌뿌둥했던 날씨는 기어코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선암사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대각루. 대각루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 정취를 더해준다.
선암사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대각루. 대각루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 정취를 더해준다.

탐매 여행의 성지, 선암사

편백나무, 굴참나무 등 온갖 나무가 무성한 걷기 편한 숲길을 지나니 계곡 위에 우뚝 솟은 승선교가 있다. 맑은 날이면 무지개다리 사이로 비치는 보물 승선교의 화장한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그 절경을 아쉽게도 오늘은 보지 못하고 민낯의 승선교만 만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의 산사는 운치와 고즈넉함이 있다. 바빴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우리나라 절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선암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승선교를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정작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은 수백 년 된 홍매고목에서 피어나는 선암매이다. 시간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웅전 뒤 흙담길 옆에서 피어나는 홍매뿐 아니라 경내 곳곳에는 다른 색깔의 매화가 어우러져서 그 아름다움은 더욱 진해진다. 선암사의 매화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약 600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외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전해진다.

원통전 뒤편의 백매화와 각황전 돌담길의 홍매화는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당시에는 50그루가 넘었었는데 이젠 27그루만 남았다고 선암사의 한 보살님이 말씀해 주신다. 

선암사의 선암매가 완전히 개화를 하려면 1주일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선암사 매화들이 보슬비를 맞으며 아침을 열고 있다. 원통전, 각황전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에 늘어서 있다.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의 매화는 빗물을 가득 담으니 더욱 운치 있다. 

400년 된 선암사의 뒷간에는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가 쓰여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김훈은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전남 승주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아, 똥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좀 멀더라도 선암사 화장실에 가서 누도록 하라. 여기서 똥을 누어보면 비로소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 똥을 안 눌 때 똥누는 사람을 보는 일은 혐오스럽지만, 똥을 누면서 창살 밖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계면쩍고도 즐겁다. 이 즐거움 속에서 배설행위는 겸손해진다.”

이른 봄 선암사 무우전에 핀 홍매화.
이른 봄 선암사 무우전에 핀 홍매화.

봄에 맞이한 상고대

조계산에는 다양한 등산코스가 있다. 선암사나 송광사를 출발해서 장군봉으로 다녀오는 원점회귀 산행을 주로 하지만 오늘은 선암사에서 장군봉을 거쳐서 송광사까지 조계산 종주산행을 한 후 송광사 템플스테이로 이번 일정의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선암사에서 장군봉으로 향하는 길, 대각암으로 들어선다. 대각국사가 선암사를 창건할 당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작은 연못도 예쁘고 누각 안에서 바라보는 뷰도 참 멋지다. 조계산 산행을 위한 장비 점검을 한다. 무심한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대각암에서 장군봉으로 향하는 길은 오로지 오르막길이다. 선암사의 향로암 터에 이르니 비가 싸라기눈으로 바뀌어 내린다. 조계산 골바람이 무척 맵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온도가 내려가면서 바람도 심상치 않다. 겨울 싸라기눈이라면 별반 반응이 없을 텐데, 꽃피는 봄에 그것도 남녘 끝이니 참으로 신비스럽다. 이곳엔 밤새 눈이 내렸는지 나무에도 수북하게 눈이 쌓여 있다.

산 아래에선 분명 비였는데 정상으로 가까이 갈수록 제법 눈발이 거칠어진다.  장군봉 정상 주변이 온통 상고대이다. 기온도 갑자기 내려가서 손이 너무 시리다. 엄동설한에 온 설산산행이다. 강풍을 동반한 눈바람도 장난 아니다. 함께 산행하는 지인들은 이런 신기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장군봉 주변은 밤새 눈이 내렸는지 나무에도 수북하게 눈이 쌓여 있다.
장군봉 주변은 밤새 눈이 내렸는지 나무에도 수북하게 눈이 쌓여 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시야가 점점 안 좋아지니 살짝 불안해진다. 정상 정복의 기쁨을 누리며 장군봉에서 맛있는 간식을 먹어야 하는데 눈바람을 피할 만한 장소도 없다. 괜스레 머뭇거리다 체온만 내려가면 하산길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서둘러 하산을 시작한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나누는 경계인 장박골에 도착하니 비로소 눈바람이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진다.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이곳부터 보리밥집까지는 그리 험한 길이 아니다. 바람이 피해가는 곳에 서서 잠시 간식을 먹는다.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과 연산봉을 잇는 능선 중간 해발 800m에 형성된 장박골 습지.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과 연산봉을 잇는 능선 중간 해발 800m에 형성된 장박골 습지.

장박골에서 조금 더 내려가니 조계산의 습지. 모처럼 발걸음이 상쾌하다. 마치 늦가을 산책하는 느낌이다. 해발 800m가량 높이의 산골짜기 위에는 장안천의 발원지인 널따란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한여름 우기에는 골짜기로 이어지는 낮은 곳이 물에 잠기고 제법 많은 물이 흘러내리고, 갈수기인 늦가을이 되면 왼쪽 분지 안의 마른 풀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줄지어 기울어져 뿌리의 윗부분까지 물 속에 잠긴다고 한다.

장박골에서 2km 정도 걸으니 보리밥집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 유명한 조계산 보리밥을 먹으려고 점심거리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혹시나 그냥 지나칠까 염려가 되었었다. 

장박골 계곡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모두들 이정표에 문제가 있다며 불평한다. 그나마 계곡의 맑은 물과 청아한 물소리에 위안 받으며 힘을 내어 걷는다. 꼭두새벽에 유부초밥 두 덩어리 먹고 조계산을 넘었으니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해발 600m쯤 되는 고개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이 조계산 산꾼을 반겨준다.
해발 600m쯤 되는 고개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보리밥이 조계산 산꾼을 반겨준다.

산에서 먹는 보리밥

식당은 비닐하우스. 그 안에 나무를 때는 난로까지 있으니 종일 추위에 떤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큰 선물이다. 밥상을 받아드니 두 눈에 찬란한 빛이 발산된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따로 담은 누런 비빔밥 그릇에 나물과 밥을 넣고 쓱쓱 비빈다. 산행 후 뭘 먹은들 맛이 없으련마는 갖가지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은 어느 진수성찬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제부터는 천년불심길이다. 천년불심길은 종단이 서로 다른 송광사와 선암사 스님들이 왕래하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이다. 매년 50만 명 이상이 이 길을 걷는다고 한다. 배도사 대피소를 지나니 다시 조계산의 골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그나마 비가 그쳐서 다행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의 뒷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볼일을 보아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의 뒷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볼일을 보아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소리에 둘러싸인 송광사

고개를 넘어서니 송광굴목재. 토다리까지는 사박사박 걷기 좋았는데 토다리를 지나면서부터는 가도 가도 끝없는 너덜길이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0.4km는 어디서 나온 숫자인지? 템플스테이 시간에는 늦었지만 이런 길에선 서두르다가는 큰일 치르기 십상이다. 송광사에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고 천천히 송광사를 향한다. 목교에 도착하니 길도 편해지고 멀리 송광사의 모습이 보인다.

거의 20km 되는 길을 비바람, 눈보라를 헤치고 걸은 우리 팀이 참 자랑스럽다. 봄, 가을, 겨울 3계절을 맛본 극적인 산행이었다.

송광사에서 템플스테이로 하루 머문다. 16명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사찰로 부르는 송광사다. 

저녁공양 후 저녁예불을 시작하기 전에 대웅전 앞에서 스님들이 번갈아 대북을 연주하신다. 북소리는 울려서 반대편으로 울림이 되어 송광사 절집 구석구석 스며든다. 소리의 반향이 이리도 아름답고 웅장할 수 있구나. 연주하시는 스님마다 북치는 모습도 기법도 모두 다르다. 같은 악기, 다른 연주. 스님마다 자기의 색이 담긴 대북 연주이다. 북이 너무 커서 작은 스님들의 두 팔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개의치 않고 대북을 즐기신다. 마치 날갯짓하는 새의 모습이다. 

저녁예불 시간에 스님들의 독경소리에 따라서 삼배를 하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현실의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튿날, 법정스님이 머물렀던 불일암을 잇는 무소유길을 걷는다. 무소유길은 대나무 숲을 비롯해 아름드리 삼나무, 편백나무,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식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법정스님께서 자주 걸으셨던 길이다. 초록의 빽빽한 대나무 사이로 아침햇살이 깊숙이 들어온다. 마치 법정스님께서 내 곁에 서 계실 것 같다. 그 길에 쓰여 있는 글귀 중의 하나이다. 스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는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니 어느새 불일암이다. 평소 무소유를 실천하셨던 법정스님의 유언에 따라 스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 아래 유골이 모셔져 있다. 법정스님의 자취를 따라 걷는 동안 내 마음에서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보물 제404호인 승선교는 무지개 모양이며 조선시대에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 만들었다.
보물 제404호인 승선교는 무지개 모양이며 조선시대에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 만들었다.

조계산 산행코스

송광사 ~ 송광굴목재 ~ 큰굴목재 ~ 선암사 : 4시간
송광사 ~ 연산봉사거리 ~ 장군봉 ~ 선암사 : 4~5시간
송광사 ~ 운구재 ~ 천자암 ~ 큰굴목재 ~ 선암사 : 5시간
접치재 ~ 장군봉 ~ 큰굴목재 : 3시간
선암사 ~ 장군봉 ~ 작은굴목재(큰굴목재) ~ 송광사 : 5시간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5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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