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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공산주의 폴란드엔 산에 오를 자유조차 없었다”

글 윤성중 기자 사진 울주세계산악영화제
  • 입력 2022.05.1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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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동계 초등, 2022 울주세계산악문화상 수상 비엘리츠키

2022 울주세계산악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크시스토프 비엘리츠키.
2022 울주세계산악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크시스토프 비엘리츠키.

지난 4월 10일 울산시 울주군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에서 열린 제7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폐막했다. 열흘간 온라인 상영 관람객 수를 합한 총 관객 수는 무려 6만6,000여 명으로 조사된 가운데 행사는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영화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던 울주세계산악문화상 트로피는 폴란드의 산악인 크시스토프 비엘리츠키Krzysztof WIELICKI에게 수여됐다.

선정위원회는 “그는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도전 의식을 불어넣어 줄 인물”이라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방식으로 젊은이들의 도전 의식을 일깨울수 있을까? 크시스토프 비엘리츠키가 세계 산악문화에 남긴 발자취를 정리했다.

산악인으로서 비엘리츠키의 가장 큰 업적은 동계 에베레스트 초등이다. 그는 1980년 2월 17일, 동료 레셰크 치히Leszek Cichy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고 이는 세계 산악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그는 놀랄 만한 등반 기록을 쏟아낸다. 1980년 에베레스트 동계 초등에 이어 1984년 브로드피크(8,051m)를 22시간 만에 알파인 스타일로 단독 등정에 성공했고, 같은 해 마나슬루(8,163m)를 신 루트로 올랐다. 1986년에도 칸첸중가(8,586m)를 동계 초등했고, 연속으로 같은 해 마칼루(8,485m)를 등정했다. 2년 뒤 1988년에는 또다시 겨울 시즌에 로체(8,516m)에 올랐고, 1990년, 1991년, 1993년에는 각각 다울라기리(8,167m)와 안나푸르나(8,091m), 초오유(8,201m)를 등정했다. 초오유를 끝내고 바로 시샤팡마(8,027m)에 붙은 그는 신 루트로, 24시간 만에 단독 등정했다. 그리고 나서 1996년까지 가셔브룸 1봉과 2봉, K2,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면서 8,000m 14개 고봉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완등한 등반가가 됐다.

이 기록에서 눈여겨볼 만한 건 14개 봉우리 중에서 5개를 단독으로, 2개를 알파인 스타일로, 3개를 신 루트로, 3개를 동계 초등했다는 것이다.

1996년 9월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정 후, 크시스토프 비엘리츠키.
1996년 9월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정 후, 크시스토프 비엘리츠키.

나중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비엘리츠키는 자신이 주로 동계 등반에 나선 이유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동계 등반에 관한 아이디어는 안제이 자와다Andrzej Zawada(폴란드 등반가)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당시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로 등반가에게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까지 ‘자유’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나라의 어떤 산에도 오를 수 없었다. 1970년대에 8,000m 14개 고봉은 모두 완등된 상태였고, 우리는 새로운 등반 역사를 쓰고 싶었다. 그러려면 히말라야 동계 등반이 유일했다. 1979년이 되어서야 우리는 정부의 허가를 받고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히말라야에 진출했다.”

폴란드의 공산국가 시절, 폴란드인이 공산권 국가를 벗어나 여행을 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유일한 방법은 정부로부터 ‘스포츠 여권’을 받는 것이었는데, 이때 마침 정부가 등산 종목을 체육부로 옮기면서 겨우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유롭지 않았던 국가 체제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성공을 갈망했다.

그는 히말라야 8,000m 등반을 끝내고, 파키스탄 등의 6,000m대 봉우리를 찾아다녔다. 그는 아무도 없는 빙하가 좋았다. 등반지로 향하는 방법과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개의치 않았다. 미지의 장소를 탐험하는 기분을 즐겼다. 이런 탐험가 기질이 그의 등반 열정을 유지시켰고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비엘리츠키는 산을 등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산은 또 다른 자신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산과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나 자신과 다퉜다. 산은 그저 나에게 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5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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