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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파워우먼 한북정맥 종주 27] 자정에 임꺽정봉에서 김밥 한줄… 진수성찬이 안 부럽다

글 사진 성예진(스윗밸런스 광화문점장)
  • 입력 2022.05.1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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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봉~호명산~챌봉~사패산~도봉산~우이동 33km

금요일 밤, 퇴근 후 곧장 수연 언니를 만나 무박산행에 나섰다. 양주 야경이 아름다워 걸음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금요일 밤, 퇴근 후 곧장 수연 언니를 만나 무박산행에 나섰다. 양주 야경이 아름다워 걸음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초입은 자작나무숲이었다. 갑자기? 다소 뜬금없는 자작나무의 등장이었지만 오밤중에도 자작나무숲은 그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잔잔한 새벽 공기가 분위기를 더한다. 이런 곳에 자작나무가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오르는데, 군부대 암벽등반 훈련장이 나오며 분위기가 달라진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듯 시설물 주위로 철망이 둘러 있다. 등반 훈련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라 슬쩍 보고는 “난이도가 약하네” 농담을 하며 옆을 지난다.

“암릉은 언제 나오는 거야?”

바위산으로 유명한 불곡산이라 암릉은 언제쯤 나오는 걸까 궁금했는데, 질문에 화답하듯 곧바로 암릉지대가 펼쳐진다. 부흥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에서 얼마 안 가 암릉이 시작된다. 불곡산을 몇 번 와 본 경험이 있는 수연 언니도 이쪽 길로는 처음이라고 한다. 누가 등반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육산을 걷다가 암릉 지대에 오니 아니나 다를까 날아다니는 언니다. 역시 암릉 체질!

바위를 오르다 한숨 돌릴 겸 멈춰 서면 감탄하기 바쁘다. 오랜만에 산에 오니 이런 맛이 좋다. 자주 보면 익숙함에 감동이 덜하기 마련인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따금씩 산에 오면 익숙해질 새가 없어 감동이 배가 된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오늘 무얼 봐도 그저 좋고, 행복할 따름이다. 우리를 둘러싼 야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기 바쁘다. 임꺽정봉을 오르는 길이 그리 길지 않은데 야경을 감상하며 올랐더니 시간이 두 배는 족히 걸린 것 같다. 

낮에 오면 사람이 꽤 많을 것 같은데 새벽에 오른 특권으로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을 즐긴다. 마치 임꺽정봉을 통째로 전세 낸 것 마냥 즐길 수 있었다. 임꺽정봉으로 오르는 중간중간 너른 바위가 많아서 백패킹을 하기에도 좋은 자리들이 보인다. 확실하게 장담할 순 없지만, 조만간 백패킹을 하러 오겠노라 다짐하며 눈에 들어오는 몇몇 자리를 나만의 박지로 찜해두기도 했다.

바위산답게 암릉 구간이 마중 나와 주었다. 고정 와이어 난간이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바위산답게 암릉 구간이 마중 나와 주었다. 고정 와이어 난간이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인터넷에 백패킹 명소를 검색하면 서울 근교 산행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산들이 있는데 왜인지 그 산들보다 이곳이 더 멋진 시간을 선물해줄 것 같다. 요즘 유명한 곳들은 주말이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기가 어려운데, 이곳은 아직 사람의 손이 많이 타지 않은 것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금요일 밤이 이토록 조용한 걸 보니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암릉을 오르며 힘을 쓰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게 거의 없다. 일이 워낙 바빴던 터라 점심도 대충 때우고, 저녁마저 걸렀는데 이제야 신호가 온다. 어디서 먹으면 좋을까. 암릉을 오르며 밥 먹을 자리를 찾는데, 널찍한 바위가 많아서 어디든 척 걸터앉으면 식탁이 될 것 같은 자리가 여럿 눈에 띈다. 

배가 고픈데 자리도 많고 잠시 쉬어가고 싶은 유혹이 인다. 언니에게 슬쩍 물어보니 임꺽정봉까지 가는 길은 죄다 이런 느낌이라고. 바위도 많고 어디든 경치가 좋아서 먹고 싶을 때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정상에는 경치도 좋고 너른 자리에 벤치도 있다고 하길래 기왕이면 중간에서 먹는 것보다 올라가서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임꺽정봉까지 올라가서 먹기로 했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임꺽정봉에 도착했다. 사진을 찍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언니 사진이 잘 나오는 것 같다. 이제는 제법 포스도 느껴진다.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코스부터 식량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많은 부분에서 산행을 리드하는 언니가 든든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한북정맥 산행 회차를 거듭함에 따라 점점 산꾼의 힘이 느껴지는 언니의 모습에 괜스레 뿌듯해진다. 언니의 모습에서 든든함이 느껴져서일까? 평소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 날이다. 이건 비밀인데, 언니는 달라진 게 없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다이어트에 성공한 것 같았다.

김밥과 빵, 커피가 있는 저녁식사. 환상적인 야경과 함께 하니 그 맛이 기가 막혔다.
김밥과 빵, 커피가 있는 저녁식사. 환상적인 야경과 함께 하니 그 맛이 기가 막혔다.

그에 반해 내 사진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각도를 달리해서 여러 장 찍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날도 많이 풀리고,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서 옷차림도, 짐 지는 것도 동네 뒷산 오르듯 가볍게 왔더니 확실히 모양새가 아쉽다. 날이 따뜻해져서 4개월 만에 머리를 밀고 왔더니 머리도 허전해 보이고. 폼생폼사는 아닐지라도 사진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오늘은 영 폼이 살지 않아 사진 찍는 맛이 안 난다. 

한 달에 한 번, 한북정맥에 오르는 날, 산에서 실컷 놀고 나면 이후에는 산에서 찍은 사진 보는 재미로 다음 산행 전까지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사진 찍기는 틀린 것 같다. 다음 산행 전까지 또 무슨 낙으로 버티나.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다.

저녁은 동네 맛집에서 샀다는 김밥 두 줄과 커피, 그리고 빵이다. 양주 시내가 가릴 것 없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김밥을 먹고 있노라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언니와 나의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새벽, 밤공기를 마시며 조용히 야경을 감상한다. 

임꺽정봉 정상은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오르는 내내 보이던 야경이었지만 계속 봐도 질리지 않는다. 저 멀리 백석읍 방면으로 우리가 내려가야 할 대교아파트가 저지대의 마을 사이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것도 보인다. 시원스레 조망이 터지는 임꺽정봉에서 편히 앉아 먹는 김밥 맛은 가히 최고였다. 

언니가 집 근처 산에 갈 때 멀리서 동생들이 오면 항상 사가는 김밥이라고 한다. 모두가 맛있어했다며, 지인들의 인증을 여러 차례 거친 김밥이라고 자랑했는데 맛을 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엄지척! 내용물도 알차고 짭조름하니 입맛을 당기는 김밥은 내 입에도 아주 잘 맞았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 온기가 없어진 김밥이 아쉬웠지만 차가운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쌀쌀한 공기에 배낭에 넣어둔 물도 차가워져서 찬물에 탄 커피를 김밥과 함께 마셨더니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찬 걸 좋아하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라도 산속 추위 앞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임꺽정봉에 올라 화려한 야경을 즐긴다.
임꺽정봉에 올라 화려한 야경을 즐긴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새벽 공기는 제법 차다. 벤치에 앉아 있으니 서서히 추워지긴 하는데 경치가 너무 좋아서 엉덩이를 떼기가 싫었다. 그 와중에 김밥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있다. 순삭! 김밥이 있었는데 없었다고 한다. 평소 김밥을 좋아하는 터라 매우 만족스러운 메뉴였다. 사실 이 김밥도 내가 언니에게 이번에는 빵 말고 밥을 먹고 싶다고, 김밥을 먹자고 해서 언니가 동네에 김밥 맛집이 있다며 사 온 김밥인데 아주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저녁을 거르고 와서인지 김밥을 다 먹고도 아쉬움이 남아서 컵라면을 마저 먹을까 하다가 앉아서 쉬다 보니 으슬으슬 추워져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언니도 추웠는지 그만 먹고 출발하자며 컵라면은 일출을 보면서 먹자고 해서 다음에 쉴 때는 컵라면을 먹기로 하고 황급히 떠날 채비를 한다. 한기를 느끼면서도 좀 더 앉아 있을 수 있던 것은 그래도 이 정도 날씨에는 움직이면 금세 열이 오르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없었던 이유 때문일 거다.

춥다고 하면서도 발걸음이 빨라지지 않는다. 임꺽정봉에서 백석읍 대교아파트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쭈-우욱 이어지는데 정면에 도심의 야경이 우리를 집어삼킬 듯 반짝인다. 모처럼 만나는 그림 같은 풍경에 여러 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앞장서서 내려가다가 인기척이 들리지 않으면 멈춰서고, 나를 기다렸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내리막에서 빨리 가면 무릎에 안 좋아요” 무릎 건강을 핑계 삼아 천천히 구경하며 내려간다. 임꺽정봉을 벗어나는 내내 야경에 흠뻑 빠져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와… 진짜 끝내준다! 백패킹 하러 다시 오고 싶어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자 언니가 내려가며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와~”라고 말한다. 

최근 나와 자주 통화를 하는 언니는 내가 백패킹을 하러 올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안다. 알겠으니 그만하고 얼른 가자는 이야기였을 테다. 글을 쓰다 보니 야경에 한껏 취해 뭉그적거리는 나를 기다려준 언니에게 다시금 고마워진다. 

최근에 휴대폰을 떨어뜨리면서 카메라 렌즈가 깨졌는데, 이때 야경 사진을 찍는데 필요한 렌즈에 치명타를 입은 것 같다. 밤에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빛 번짐 현상이 심화되어 당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아쉬운 대로 사진을 찍어보지만, 결과물이 감동 받았던 야경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딴판이다. 휴대폰에 담기지 않는 멋진 야경이 못내 아쉬웠지만, 눈으로 실컷 감상하며 가슴에 가득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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