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등반] 60년지기들을 이어준 영혼의 자일, 인왕산

입력 2022.06.09 09:38

서울 누상동 죽마고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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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상동에서 나고 자란 60년지기 산우들의 모임 ‘60년회’가 오랜만에 인왕산 등반 모임을 가졌다. 맨 앞은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
“왜 이렇게 늦었어?” “코로나 안 걸리고 용케 잘 버티고 있네.” 
4월 마지막주 토요일 아침, 조용하던 경복궁역 3번 출구가 갑자기 소란해졌다. 봄날씨와 거리두기 완화로 나들이 나온 2030들 때문이 아니다. 7080 산 친구들끼리 안부 인사로 주위가 시끌벅적하다. 격의없는 말투에서 이들이 죽마고우임을 알 수 있다. 인왕산 아랫자락 누상동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동네 친구들이다. 오늘 목표는 인왕산 치마바위. 어린 시절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놀던 놀이터. 그래서 언제나 추억에 젖게 하는 어머니 같은 바위요 산이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의 절품 ‘인왕제색도’의 배경이 된 수성동계곡 큰골로 이동했다. 배낭과 준비물을 정비한 후 천천히 치마바위를 향해 오른다. 여든을 바라보는 산친구들의 발걸음은 예전 같지 않다. 미군 군화 깔창을 잘라 만든 신발을 신고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던 십대 때의 체력과 같을 수는 없다. 길지 않은 계단을 오르는 데도 호흡이 거칠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은 죽마고우와 함께한다는 즐거움, 무엇보다도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어머니 같은 인왕산 바위에 오른다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슬랩의 요소요소에는 안전을 위해 인왕산악회 후배들이 듬직하게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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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뛰놀던 치마바위로 향하는 60년회 회원들. 예전 같은 체력은 아니지만 인왕산에 대한 마음만은 한결 같다.
인왕산에서 뛰어놀던 누상동 친구들
60여 년을 한결같이 이어오는 산행이지만 올해는 더욱 각별하다. 누상동 동네 친구끼리 만든 인왕산악회가 태어난 지 60년을 맞았기 때문. 
이제는 모두 누상동을 떠났지만 인왕산은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영혼의 끈이다. 와인과 친구는 숙성시킬수록 향기가 깊어진다. 인왕산악회와 누상동파 산친구들은 오래된 와인 같다. 깊은 강은 잔물결에 흔들리지 않는다. 서울 사대문 안 인왕산 자락에서 나고 자란 60년 넘는 산 친구들 모임 ‘60년회’의 우정도 깊은 강을 닮았다. 
1945년 해방 전후로 태어난 같은 동네 산 친구들은 지금 서촌이라 불리는 누상동이 고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누상동파’라고 불렀다.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 인왕산은 놀이터이면서 보릿고개의 엄혹한 시절을 잠시나마 잊고 쉴 수 있는 도피처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특별히 할 일도 없던 까까머리 학생들은 누가 제안한 것도 아닌데 너나 할 것 없이 동네 뒷산 인왕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계곡 물로 갈증을 달래고 암자를 찾아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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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재미 회원들의 초청으로 미국 서부지역 국립공원에서 우정을 다졌다.
독학으로 등반, 장비도 뚝딱뚝딱
가르쳐 줄 사람도, 배울 곳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등반을 따로 배운 적 없었다. 놀이가 실전이고 실전이 놀이였던 셈. 장비도 뚝딱뚝딱 만들어서 해결했다. 바위에 쓸려 해어질까봐 교복을 뒤집어 입고 등반하기도 했다. 
깨끗한 화강암 바위산 인왕산은 암벽 등반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슬랩과 크랙, 침니, 오버행 등 모든 스타일의 등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1960년대 인왕산에는 다양한 암벽등반 루트가 있었는데, 특히 슬랩 코스가 많았다. 요즘처럼 정비가 잘돼 있지도 않은 곳을 겁도 없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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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인왕산에 오른 이인정·최선웅·김경배씨 등 누상동 친구들.
명물 치마바위도 수없이 탔다. 인왕산 꼭대기에서 오버행으로 서커스하듯 뛰어내리며 속도 경쟁을 하는 등 지금 생각하면 겁 없이 날뛰던 어린 시절의 무모한 짓이었다. 이곳에서 익힌 기술로 ‘슬랩 등반은 누상동파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중학 시절을 ‘동네 놀이터’ 인왕산에서 보낸 산 친구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좀 더 진지한 등반을 한다. 루트를 만들고 하강 피톤을 박으며 코스 개척에도 신경을 썼다. 인왕산악회는 1962년 동네 친구 사이이던 고등학교 2학년생 송정철, 이인정에 의해 “TOP ALPINE CLUB”이란 명칭으로 창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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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악행정가, 산악외교관으로서 한국을 대표해 온 이인정 회장. 3 이인정 회장과 함께 국내 등산교육에 초석을 놓은 재미산악인 김경배씨. 4 연세산악회 OB 한이석씨.
인왕산을 지켜온 인왕산악회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인왕산을 오르내리며 코스를 섭렵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김신조 사건이 났고, 인왕산은 일반인들이 다닐 수 없게 폐쇄됐다. 이후 인왕산이 다시 열리기까지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인왕산은 폐쇄됐으나 산악회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매년 수방사와 종로경찰서에 회원명부를 전달하고 등반 때마다 출입신고 하는 방식으로 등반이 가능했다. 산악회 회원만 출입이 가능하다 보니 그곳에 암장 존재여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수방사에 신고만 하면 출입이 가능하게 됐다. 신고 안 할 경우 신원확인차 사복군인에게 검문을 받는다. 수십년간 인왕산악회에 의해 관리되고 산악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덕에 암장이 덜 훼손됐다. 인왕산악회 창립멤버들은 중,장년이 된 2000년대 초반까지도 송정철 회장을 중심으로 인왕산 등반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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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악회 후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왕산 치마바위를 오르는 60년회 회원들.
1960년대 인왕산 자락에는 작은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세 개의 등반 전문클럽이 있었다.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이 피톤 알파인 클럽으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인왕클럽은 후에 결성된 키 알파인 클럽과 탑 알파인 클럽으로 흡수됐는데 이 두 클럽도 해체됐고, 잔여 멤버들이 뭉쳐 조직한 것이 지금의 인왕산악회로 인왕산 산꾼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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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월간산> 초대 편집장을 역임한 산악언론인 최선웅씨. 국내 최고 지도 권위자이기도 하다. 7 “선배님들 환영합니다” 인왕산악회 후배들이 선배들을 위해 환영 현수막을 걸었다.
한국 알피니즘의 산실 ‘누상동파’
최선웅·한이석·이인정·김경배. ‘누상동파’ 골수 멤버들이다. 이들의 우정과 삶은 인왕산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 이들은 한시대를 풍미한 산악인이자 산악외교관, 산악언론인으로 한국의 근대 알피니즘을 풍부하게 만든 인물들이다. 한국의 알피니즘은 누상동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선웅씨는 누상동 시절부터 등반 관련 외국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인쇄물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969년 5월 <등산> 창간호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훗날 
<월간산>으로 제호를 바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월간산> 초대 편집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 지도 제작계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연세대학교 산악회 OB 한이석씨는 1970년 한국산악회 추렌히말 대원으로 참가해 누상동파 중에서 가장 먼저 해외원정을 경험했다. 열혈 산악청년이었던 그는 1969년 한국등반 역사에서 비극으로 이야기되는 설악산 10동지 사건 때 다니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구조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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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인왕산악회 회원들이 선배들의 산행을 도왔다. 왼쪽부터 임신택, 이풍식, 김순옥, 유영호씨.
해방둥이인 아시아산악연맹 이인정 회장은 유년기와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인왕산 자락에서 보냈다. 동갑인 재미 산악인 김경배씨와 함께 한국등산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면서 제도권 산악계에 발을 디뎠다. 그는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 회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악 행정가 및 외교관으로서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누상동파가 국내 등반계에 끼친 영향은 작지 않다. 누상동 동네 산 친구들이 없었다면 한국 최고의 산악전문지 <월간산>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산악계 저변이 지금처럼 넓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인왕산을 뛰어다녔던 까까머리 학생들은 이제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 흐르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누상동 친구들의 산 사랑은 6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그 친구들이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인왕산 바위를 올랐다. 큰 바다에서 평생을 보내다가 태어난 강을 거슬러오르는 연어처럼.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6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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