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할 땐 산] 산행의 고독을 깬 뽕짝과 찬송가

  • 글 이지형 <강호인문학> 저자
    입력 2022.06.24 09:53

    산은 때로 신보다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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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트와 찬송가는 삶의 위안이다. 적멸의 새벽 산에서 말없이 바라보는 일출도 그에 버금가는 위안이다.
    그날, 짧은 계곡을 통과해 완만한 능선에 막 합류하자 멀리 정상이 보였다. 무난한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리다. 10여 m 앞에 중년 남성 한 사람뿐, 오랜만에 한가한 주말이다. 내 앞의 남성은 나와 비슷한 체격, 비슷한 보폭, 비슷한 속도다. 딱 그만큼의 거리가 좁혀지지도, 넓혀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날의 우연한 동행이 나는 너무 힘들었다.  
    중년의 사내가 틀어놓은 트로트 가요 때문이다. 능선에 올라선 직후 30분 넘게 상당한 볼륨으로 산자락을 울리는 트로트의 소음에 내내 시달려야 했다. 간드러진 교성과 극강의 테크닉으로 무장한 남녀 가수들의 노랫소리는 그에겐 절창이었겠지만 나에겐 공해였다. 그럼 그를 추월하거나 아예 뒤처져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산에서 왜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내가 왜, 그로 인해 나만의 산행 속도를 올리거나 낮춰야 하나. 그러긴 싫었다. 북한산공원관리사무소가 심어 놓은 표지판 위 문구엔 이어폰 착용이 권장되고 있지만 낯선 이에게 다가가 “이어폰 끼고 들으시죠!” 하기도 싫었다.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행여 “소리 좀 줄이시라!” 얘기하면, 왠지 “내 맘이야, 당신이 피해 가!” 핀잔할 거 같다. 산 위에서 말싸움은 싫다. 안 그래도 세상은 각박하다. 
    트로트 말고 찬송가에 시달린 적도 있다. 그때도 완만한 능선을 걷는 중이었는데, 앞서가는 여성 한 명이 찬송가와 밀착 동행중이었다. 그분의 신앙과 찬양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산에는 불교 신자나 이슬람교도도 있을 수 있다. 자기 신조에 따라 일체의 신神을 멀리하는 사람도 고요한 산행의 와중일 수 있다. 그 여성 역시 이어폰을 끼어야 했던 건 아닌가. 
    산 위의 찬송가보다 고역은 선동인 듯 웅변인 듯, 날 선 목소리로 성경을 해설 중인 목사님의 설교다. 어느 교회 예배를 인도하는지 알 수 없는 목사의 설교를 10분 넘게 들으며 걸어야 했던 적이 있다. 목사님을 산에까지 데려온 이에겐 그의 녹음 설교가 은혜와 은총일지 모르지만, 그걸 고통으로 느낄 사람들도 있다.   
    산山은 때로 신神보다 숭고하다. 때 아닌 찬송가와 설교가 산의 계곡과 능선을 난무하는 순간이 그런 경우다. 아무 말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산은 절대를 향해 다가간다. 그게 자연의 본질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내팽개친 신앙은, 그들이 사랑하는 신에 대한 결과적 모독이라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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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은 때로 신보다 숭고하다. 수억 년, 묵언 중인 산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산행은 진기한 경험이다.
    무전기조차 거부한 라인홀트 메스너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80년, 시대의 초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에베레스트를 두 번째 오르려 할 때다. 한 기자가 그에게 소형 무전기를 가지고 올라가 달라고 요청했다. 메스너는 그보다 2년 전 무산소로 에베레스트를 이미 올랐다. 이번엔 ‘무산소+솔로’ 에베레스트 등정이었다. 기자는 불가능에 가까운 산행을 시도하는 메스너와 짧은 인터뷰라도 하고 싶었을 게다. 산소 없이, 동행 없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의 육성은, 어떤 식으로든 ‘특종’이 되기 쉬우니까. 
    메스너 입장에서도 안전을 위해, 그리고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했던 당시의 애인 니나 홀귄과의 소통을 위해 무전기를 굳이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마다했다. 그는 산소도, 동행도, 무전기도 없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그야말로 유아독존, 독야청청의 산행이었다.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 완등 이전의 사연이다. 
    그는 왜 무전기를 거부했을까. 메스너와 그의 연인 홀귄이 남긴 기록에, 그 이유가 친절하고 상세하다. 히말라야와의 완벽한 대면을 위해, 그리고 히말라야 바깥에 있는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을 위해 메스너는 무전기를 거부했다.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서 그는 히말라야의 성스러운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는 종교적 희열 같은 걸 예감했을지 모른다.
    무전기의 지참 유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심중한 한걸음, 한걸음에 죽음의 냄새가 묻어나는 고난도의 등정이다. 그럴 때 소통의 장치는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물리쳐 줄 수 있는 생명줄이다. 위급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 해도 소통의 가능성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안정은 무시할 수 없다. 그 모든 걸 포기하고, 메스너는 세상과의 완벽한 단절을 택했다.
    우리는 왜 산에 오르나. 건강관리, 체력단련, 여가 선용, 절경 감상, 계절 만끽, 스트레스 해소, 데이트, 리프레시를 위해 산에 오른다. 그러나 모든 경우 산행이 전제하는 것은 일상과의 잠정적 단절이다. 우리는 해발 500, 600, 700, 800m의 바람에 잠기면서 새로운 세상에 든다. 낯선 세계에서의 침묵과 고독이야말로 산이 우리에게 주는 내밀한 선물이라 생각한다. 그 선물 덕에 우리는 지친 몸과 맘을 추스르고 가다듬는다.  
    메스너가 바라고 체험한 지고지순의 고독까진 아니어도 우리는 침묵에 잠긴 산과의 대면을 통해, 신을 만나고, 자신을 만난다. 그래서 바라건대 어느 능선에서인가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중년들도, 한 번쯤은 트로트와 찬송가와 설교를 버리고 산에 온전히 빠졌으면 한다.   
    고단한 일상과 거친 세월을 어렵사리 헤쳐 나가고 있는 중년의 일원으로서 동년배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산 위에서도 무언가에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떨치기 어렵다. 외로움과 불안은, 정도는 다를지언정 우리 모두의 것이라 생각한다. 트로트와 찬송가가 선사하는 안심安心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산과의 혼연일체가 주는 평안은 때로 트로트와 찬송가의 위무慰撫를 훌쩍 뛰어넘는다. 어려운 일이지만 일상에서 기대던 문명과 종교를 잠시 잊고, 이번 주 산행에서만은 새벽 산 공기에 조용히 스며드시기를 권한다. 최소한의 교신마저 거부하게 만든 히말라야의 고독, 그 절대 고독의 행복이 메스너의 전유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6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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