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등반] 이탈리아 봄 처녀들과 함께 오르다

  • 글·사진 임덕용 꿈속의 알프스등산학교
    입력 2022.06.20 10:03 | 수정 2022.06.20 10:14

    이탈리아 돌로미티 ‘비아 데멧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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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 마지막 마디는 다른 벽으로 건너가서 두 마디를 더 올라야 한다.
    미처 슬퍼할 사이도 없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 하지만 내가 사는 변방엔 아직도 눈이 내렸다. / 경계도 없이 내리는 눈 / 범람하는 바람 속으로 / 내 영혼의 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春雪이 흩날리는 동안 / 마른 풀잎만 나풀거렸고 / 내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떠나간 여자처럼 / 먼 산으로 날아간 새는 더 이상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김기섭 ‘북한산의 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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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마을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여자 사장은 만능 산악인이었다.
    치르 그룹 중 가장 위풍당당한 바위 산
    티롤 알프스와 돌로미티의 봄은 6월이 돼야 비로소 찾아온다. 해발 2,500m대 산 위로는 아직 하얀 눈이 많이 쌓여 있지만 6개월 넘게 하얀 눈 이불을 덮고 있던 초원에는 겨울을 이겨내고 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방실 방실 웃음을 짓는다.
    산 그림을 그리는 에른스트 뮐러와 함께 집에서 1시간 거리의 파쏘 가르데나Passo Gardena의 그란데 치르Grande Cir로 갔다. 봄맞이 첫 등반이었다. 치르 암군은 거벽은 아니지만 약 250~400m 높이의 암벽이 작은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여기에 2개의 비아 페라타 루트가 있고 주차장에서 출발해 30~40분만 걸으면 등반을 시작할 수 있어 인기가 매우 높다.
    그란데 치르(독일어 Grosse Cirspitze)는 치르 그룹 중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봉우리이다. 프라라산장 근처에 차를 세우고 겨울에는 슬로프로 쓰이는 넓은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아들·딸이 어렸을 때 비아 페레타 등반을 위해 많이 올랐던 산이지만 클라이밍으로는 처음이고, 올해 첫 등반이라 조금은 떨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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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단 벽 아래로 치르의 등산로가 보인다.
    일반 등산로가 끝나고 암벽 바로 밑에 도착해 헬멧을 썼다. 퇴석 지대를 올라 벽이 가까워질 즈음부터 헬멧을 착용하는 게 중요한 우리 습관이다. ‘비아 데멧즈’ 루트는 1936년 9월 6일 지오반니 데멧즈Giovanni Demetz와 안네즈 그로펠로Agnese Groppello가 초등한 고전 루트로, 4+ 인공 등반 난이도 A0이다.
    첫 마디까지 오르기 위해 암벽을 10분 이상 올라야 했다. 따로 확보는 하지 않고 루트로 진입하기 위해 앞서가는 에른스트가 자주 루트를 확인했다. 1피치는 작은 침봉에 올라서서 수직 벽의 틈을 통해 올랐다. 25m 거리에 4+ 급의 난이도였지만 상당히 신경이 많이 쓰였다. 더욱이 6개월이 넘는 겨울 내내 매서운 추위와 눈·얼음에 덮여 있던 벽이라 홀드가 자꾸만 무너져 내려 더욱 조바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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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반 내내 보이는 가르데나의 벽에는 비아 페레타부터 라인홀트 메스너가 개척한 어려운 셀라 가르데나 북벽까지 여러 루트가 있다.
    벽에 매달려 수다 삼매경
    2피치는 얇은 밴드를 타고 오른쪽으로 횡단한다. 20m 길이에 5급의 난이도, 인공 등반 난이도로는 A0이다. 코스에는 5개의 오래된 하켄이 박혀 있다. 횡단 후 다시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오르다가 4m 정도의 오버행의 턱 밑에서 허리를 뒤로 젖히며 올라서서 3피치 출발점에 도착했다. 20m 길이의 4피치는 매우 폭이 넓은 구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머리 위로 위협적인 디에드로Diedro(폭이 넓은 협곡 같은 바위) 형태의 침니Chimney(굴뚝 모양의 바위 틈)가 있다(20m 4+).
    5피치는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며 오버행 형태의 침니를 30m 정도 오른다. 6피치는 25m를 오른 후 다시 약 20m를 하강해서 벽을 바꾼다. 7피치부터는 처음 올라온 벽의 뒷면이며 윗벽인 황벽을 40m 정도 오른다. 확보점 마다 두 개의 커다란 하켄으로 잘 고정되어 있어 고전 루트를 등반하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8피치는 왼쪽으로 20m를 정도를 횡단한다. 폭이 넓은 밴드 바로 아래는 험상스러운 오버행이 도사리고 있으나, 시야가 확 트여 치르 암군 건너편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이처럼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비로소 조망이 트이고 주변 산들의 파노라마가 등반의 수고를 보상해 준다. 마지막 10피치를 끝내고 120m 정도는 걸어서 정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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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벽 아래에서 같이 확보하고 이야기를 하는 전투 경찰 산악 구조대원의 어깨가 필자 보다 넓다.
    등반을 시작할 때 우리 뒤에 두 명의 미인 클라이머가 함께 출발했다. 한 명은 아래 마을 호텔을 운영하는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전투경찰 산악구조대원으로, 덩치가 크고 어깨가 남자만큼 넓었다.
    이 두 여성 클라이머와 벽에 매달려 수다를 떨었다. 지난겨울 돌로미티에 눈사태가 났을 때 구조현장에 출동한 이야기로 시작한 그녀의 경험담에 우리 두 노인 클라이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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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반의 크럭스를 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는 에른스트.
    그리움은 산이 된다
    밤새 시리도록, 때로는 각혈하듯 숨 죽이며 죽음을 기다리던 조난자들. 어떤 이는 구사일생으로 다시 사람의 세계로 돌아오고, 또 어떤 사람은 산 사람이 되어 영원히 산에 산다. 그리움은 산이 되고 산 위의 구름이 되어 산천을 날아다닌다. 그 그리움이 바로 산을 다시 찾는 우리의 영혼이련만….
    조금은 무거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벽을 오르니 이번 등반은 봄 처녀들의 산책처럼 즐거웠다. 아, 봄이다.
    월간산 2022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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