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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스위스 융프라우 下] 알프스 봄 처녀 하이디는 아직 '부재 중'

글 손수원 기자 사진 손수원, 융프라우 철도 취재협조 동신항운
  • 입력 2022.06.0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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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르스트~바흐알프제 트레킹 6km…여름이면 야생화 천국으로 변신

야생화와 초원이 어우러진 바흐알프 호수는 베터호른(3,692m)과 슈렉호른(4,078m)을 곁에 두어 더욱 알프스다운 풍경을 빚어낸다.
야생화와 초원이 어우러진 바흐알프 호수는 베터호른(3,692m)과 슈렉호른(4,078m)을 곁에 두어 더욱 알프스다운 풍경을 빚어낸다.

어제 융프라우요흐Junfraujoch를 다녀온 뒤 그린델발트Grindelwald의 숙소에 머물렀다. 그린델발트는 인터라켄과 더불어 융프라우 여행의 베이스캠프가 되는 마을이다. 인터라켄이 도시의 느낌이라면 그린델발트는 한층 더 시골 분위기가 난다. 특히 아이거Eiger(3,970m)가 바로 눈앞에 우뚝 서 있어 숙소의 침대에 누워 아이거 북벽을 바라볼 수 있는 ‘최상급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린델발트에서는 베른 알프스의 산군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다. 맨 오른쪽 부분이 ‘노스페이스North Face’로 불리는 아이거 북벽이다.
그린델발트에서는 베른 알프스의 산군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다. 맨 오른쪽 부분이 ‘노스페이스North Face’로 불리는 아이거 북벽이다.

액티비티의 성지 피르스트

오늘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숙소 앞에 있는 오래된 로컬 치즈가게를 먼저 들렀다. ‘몰케라이 게르치Molkerei Gertsch’라는 이름의 이 작은 가게는 1923년부터 지금까지 3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치즈가게다. 지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피터 게르치는 1991년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직접 치즈를 만들고 있다.

피터의 아내 하이디가 다양한 치즈를 맛보게 해주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스위스의 치즈 사랑은 유명하다. 어딜 가나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를 볼 수 있고, 그런 자연 환경에서 자란 소의 우유로 치즈를 만드니 맛이 없을 수 없다. 스위스 전역에서 생산되는 우유의 47% 정도를 치즈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 종류가 약 450종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만화 ‘톰과 제리’에 나오는 구멍이 송송 뚫린 ‘에멘탈Emmental 치즈’는 ‘스위스 치즈의 제왕’이라 불린다.

하이디는 해발 700m 이상의 초원에서 자라는 소에게서 갓 짜낸 우유도 맛보게 해주었다. 이름이 ‘아이거 밀크’란다. 진정 ‘신선한 우유’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청정 스위스의 위엄을 우유 한 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알프스의 산악마을인 그린델발트에는 다양한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이 들어서 있다.
알프스의 산악마을인 그린델발트에는 다양한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이 들어서 있다.

그린델발트의 거리를 둘러보며 걷다 보니 어느 새 그린델발트 곤돌라 리프트 승강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곤돌라를 타고 피르스트First(2,168m)로 갈 예정이다. 융프라우요흐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봄에서 겨울로 시간이 역주행하기 시작한다.

피르스트역에 도착했을 때, 역시 융프라우의 변덕스런 날씨가 잠에서 깨어났다. 방금까지도 파란 하늘을 보여 주더니 이내 눈보라를 일으키며 구름으로 하늘을 가려버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눈을 흩뿌리다가도 어느 순간 구름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파란 하늘을 구경시켜 준다. 과연 세계자연유산급 장난이다.

피르스트는 액티비티의 성지이다. 피르스트 플라이어, 글라이더, 마운틴 카트, 트로티 바이크 등 스릴 넘치는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아직 겨울 스키 시즌이 끝나지 않은 덕분에 곳곳에서 파우더 스키를 즐기려는 스키어와 스노보더들을 볼 수 있다.

그린델발트의 명물 치즈가게 ‘몰케라이 게르치’의 다양한 치즈들.
그린델발트의 명물 치즈가게 ‘몰케라이 게르치’의 다양한 치즈들.

우리는 피르스트역에서 바흐알프 호수Bachalpsee까지 걸을 예정이다. 해발 2,265m에 있는 이 호수까지는 3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가는 길 내내 알프스의 영봉을 옆에 두고 걸을 수 있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날씨에 고어텍스 재킷을 단단히 여민다. 눈길이지만 밀가루 같은 파우더라서 아이젠을 착용할 필요는 없었다. 스키 슬로프를 옆에 두고 언덕을 오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슈렉호른과 아이거가 지척으로 보여야 하는데, 지금 사방은 온통 하얀 눈보라뿐이다. 겨우내 쌓인 눈은 봄이 되면서 서서히 녹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어느 곳엔 허리까지 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다.

무릎까지인지 허리까지인지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직접 빠져봤기 때문이다. 길인지 아닌지 모르는 눈길을 무심코 밟았더니 순식간에 다리가 눈 속으로 빨려들어 허리까지 푹 빠졌다. “다같이 지나왔는데, 왜 혼자만 빠지냐?”며 일행의 놀림감이 되었다.

피르스트역에 내리면 절벽 위 잔도를 걷는 ‘클리프 워크’를 바로 만난다.
피르스트역에 내리면 절벽 위 잔도를 걷는 ‘클리프 워크’를 바로 만난다.

저 푸른 초원에서 만드는 알프스 치즈

하늘이 잠깐 열리고 따가운 햇볕이 내려쬐었다. 따뜻한 봄 햇살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 지경이다. 재킷을 벗을까 싶어 배낭을 내려놓았더니 그 순간 다시 하늘이 닫히고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하늘을 바라보며 원망한들 소용없는 일, 잠시 카메라를 내리고 걷는 것에 집중한다. 파우더 눈이라 뽀득뽀득 소리는 나지 않아도 눈 밟는 느낌이 제법 좋다. 눈앞에 아이거가 보였다면 영화의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그린델발트와 피르스트 사이를 오가는 곤돌라. 베른 알프스의 풍경은 덤이다.
그린델발트와 피르스트 사이를 오가는 곤돌라. 베른 알프스의 풍경은 덤이다.

“이제 곧 눈이 다 녹으면 초록색 초원이 드러나고 소가 풀을 뜯는 그 엽서 속 풍경이 나타날 거예요. 우리가 오늘 아침에 맛봤던 치즈가 이런 초원들에서 만들어지는 거죠.”

동신항운 송진 대표가 지금은 볼 수 없는 융프라우의 여름 풍경을 설명했다. 엽서에서 봤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 그리고 한가로운 소떼들’ 풍경들이 떠올랐다.

“봄이 오고 아래쪽부터 눈이 녹으면서 소를 방목해요. 소들은 아래부터 풀을 뜯어먹으면서 점차 높은 곳으로 올라가죠. 나중에는 해발 2,000~3,000m까지 올라오게 됩니다. 마을과 너무 멀어지면 아예 여름철 동안 산에 머물며 치즈를 만듭니다. 이것을 ‘알프스 치즈’라고 불러요.”

과거 스위스 남성들은 용병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치즈는 주로 여성들이 만들었다. 

피르스트역에서 바흐알프 호수로 가는 초입. 뒤에 솟은 산은 베터호른과 슈렉호른이다.
피르스트역에서 바흐알프 호수로 가는 초입. 뒤에 솟은 산은 베터호른과 슈렉호른이다.

이렇게 산에서 만드는 치즈는 그해 어떤 풀과 꽃이 풍성하게 자라느냐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 소가 어떤 풀을 먹느냐에 따라 그해 치즈의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치 해마다 포도 상태가 달라 와인의 맛이 미세하게 차이 나는 것과 같다.

알프스 치즈가 맛있는 이유는 소들이 저지대의 계곡에서는 수십 종류의 풀과 꽃을 먹을 수 있는 것에 반해 고지대에서는 수백 가지 풀과 야생화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하게 좋은 것을 먹고 나온 우유가 맛있는 것이 당연하다.

치즈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가 오른쪽에 작은 오두막집을 만난다. ‘Gummi-Hutte. 2,262m’라고 문패가 붙어있는 무인대피소다. 나무와 돌로 만든 대피소 안은 좁지만 아늑하다. 1958년에 지었다는 이 대피소 내부는 한쪽에 있는 긴 의자가 시설의 전부이지만 눈보라를 피해 몸을 녹일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쉼터다. 이를 증명하듯 ‘이 오두막은 악천후에서 지치거나 지친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한다’는 글귀가 쓰여 있다.

바흐알프 호수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바흐알프 호수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출발해서 이제까지 다른 트레커를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피르스트를 대표하는 트레킹 코스이지만 주중이고 날씨도 변변치 않아 그런 것 같다. 이건 마치 겨울 한라산을 홀로 오르는 것과 같은 호사다.

“어, 이거 멧돼지 발자국인가요?”

사방이 ‘곰탕’이니 아직도 여기가 무주리조트인줄 알고 알프스에서 멧돼지를 찾는다. 가만히 살펴보니 염소 비슷한 것의 발자국이다. 송진 대표가 “알프스에 사는 야생 염소인 ‘아이벡스Ibex’”라고 알려주었다.

  

“앗! 저기 염소!”

눈으로 발자국을 좆던 일행 중 한 명이 마침내 세 마리의 아이벡스 가족을 발견했다. 눈보라 속에서도 절벽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아이벡스의 ‘포스’는 가히 히말라야 야크와 맞먹었다.

구름 사이로 잠깐 파란 하늘을 보여 주는 피르스트의 변덕스런 날씨.
구름 사이로 잠깐 파란 하늘을 보여 주는 피르스트의 변덕스런 날씨.

슈렉호른을 품은 바흐알프제

1시간 30여 분이 걸려 호수에 거의 다다랐다. 하지만 거울처럼 맑다는 호수는 아직 눈으로 덮여 있었고, 호수에 반영되어 두 개의 산이 된다는 슈렉호른Schreckhorn(4,078m) 봉우리도 궂은 날씨 탓에 보이지 않았다. 트레킹 가이드인 ‘도리스’의 설명으로만 이곳이 바흐알프 호수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쉬움이 많지만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눈보라는 거세졌고, 비로 바뀌기도 했다.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인도 여행객이 호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고 재킷 후드를 둘러썼지만 그들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런 경험도 융프라우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듯이.

바흐알프 호수로 가는 도중 처음 만나는 무인대피소. 1958년에 지었다.
바흐알프 호수로 가는 도중 처음 만나는 무인대피소. 1958년에 지었다.
대피소 안은 휑하지만 눈보라에서는 생명을 지키는 공간이다.
대피소 안은 휑하지만 눈보라에서는 생명을 지키는 공간이다.

바흐알프제 트레킹

그린델발트 곤돌라 리프트 승강장에서 6인승 곤돌라를 타고 약 30분을 오르면 피르스트역에 닿는다. 역 밖으로 나와 시계탑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른쪽에 스키 슬로프를 두고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해발 2,168m인 피르스트에서 해발 2,265m인 바흐알프제까지는 초반에만 조금 오르막길이 나오고 이후로는 거의 평탄한 길이다. 겨울을 제외하면 자전거 라이딩을 즐길 수도 있다. 피르스트에서 바흐알프제까지는 약 3km 거리로, 코스가 하나밖에 없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왕복 6km에 2~3시간 정도 걸린다. 피르스트역에는 절벽에 설치한 잔도와 전망대인 ‘클리프 워크’가 있으니 꼭 걸어보자.

월간산 2022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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