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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 432호
[이 클라이머의 삶] 영원한 히말라야 산꾼 꿈꾸는 김미곤씨

“등반은 어려움에 대한 도전이자 즐거움”

김미곤(金未坤·33)은 순간 왼쪽 손을 오른쪽 허리춤으로 뻗었다. 하지만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엉뚱한 생각하지 말아. 함께 내려가는 거야.”

송형근 대원의 말에 멈칫했지만 살아서 내려갈 자신이 전혀 없었다.

지난 6월26일 김미곤은 0시경부터 낭가파르밧 루팔벽을 등반하고 있었다. ‘린네’라고 불리는 절벽에 형성된 협곡 구간은 초등에 성공한 라인홀트 메스너의 등반기에서도 낙석이나 낙빙의 위험에 대해 전혀 언급된 바 없어 안심하고 올랐다.

동료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자일 끊을 결심

그런데 해가 뜨면서 상황이 달라지더니 오전 10시45분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해발 7,550m 지점을 지날 즈음 머리 위쪽에서 집채만한 바위가 떨어지며 좌우벽에 부딪쳐 깨지더니 소낙비 퍼붓듯 돌멩이가 쏟아져 내렸다. 김미곤은 몸을 움츠렸으나 낙석 통로나 다름없기에 무방비 상태였다.

‘모든 게 끝장이다. 로프 한 가닥에 대원 4명이 매달려 있던 터라 하켄이 빠지거나 낙석에 로프가 끊어지면 모두들 추락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자만 부상 당했을 뿐 다른 대원들은 무사했다. 돌멩이가 어깨를 후려치는 바람에 팔을 쓸 수 없었고, 3중화는 깨져나갔다.

동료 대원들은 감각을 잃은 오른팔을 슬링으로 몸에 묶어주고, 정상공격 때 사용하려고 그의 배낭에 넣어둔 150m 자일을 꺼내 그의 안전벨트에 묶었다. 살살 풀어주면서 밑으로 내릴 계산이다. 하지만 대원 4명이 자일 한 동에 매달려 구조작업을 펼치다 하중을 이겨내지 못한 하켄이 빠지면 모두 수천m 아래 빙하로 떨어지리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끔찍해졌다.

▲ 2004년 봄 로체 남벽을 정찰하기 위해 오른 아일랜드피크 정상.
이후 1m, 1m가 처절했다. 소변조차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살아서 내려설 수 없다’는 비극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다. 동료대원들은 묵묵히 그를 끌어내렸다. ‘이제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은 사고를 당한 지 사흘이 지나 C1(5,280m)으로 내려서서 따뜻한 물 한 모금 마시고나서였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미소가 번졌다.

김미곤은 BC로 내려선 다음 말에 실려 후송됐다. 마지막 마을에서 지프로 하루 거리인 길기트의 한 병원에서 발등뼈 한 가닥은 골절, 또 한 가닥은 금이 간 데다 어깨는 근육이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고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했지만, 그런 몸으로 다시 BC로 돌아갔다. 

“아내와 아이가 알면 섭섭하겠지만, 사고 직후 동료들을 위험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칼로 자일을 끊으려 했던 겁니다. 아무튼 호텔 방에 누워 있자니 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정상에 섰을텐데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오더군요. 병원에서는 당연히 움직이지 말라 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 때문에 침체되어 있을 분위기도 쇄신시키고, 정상으로 오르는 대원들을 응원이라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간 겁니다. 그런데, 귀국 후 보고회 때가 되니까,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게 더욱 기뻐지더군요. 만약 실패했더라면 표고차 4,500m의 거벽을 오르기 위해 또다시 고생해야 할 테고, 그 미안함은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 낭가파르밧 루팔벽 해발 6,450m. 김미곤씨가 개척을 주도했던 구간이다.
김미곤은 낭가파르밧 루팔벽 등반에서 최선을 다했다. 등정자인 김창호와 이현조 대원뿐 아니라 대원 모두 난구간을 뚫는 데 그가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35년만에 이루어진 루팔벽 직등루트 재등의 성공은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 말했다.

김미곤은 2002년부터 한국도로공사 광주지사에 근무하고 있다. 대학시절 산에 미쳐 지냈고, 졸업 후에도 취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산에만 다니는 게 못마땅했던 부친께서는 산에 못 가게 하려고 자식을 방에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일, 산에 몰입한 그는 산을 통해 취직도 했고, 또 아내와 이제 17개월 된 아들 종윤과 화목한 가정을 이끌고 있다.

“2000년 마나슬루 원정에 앞서 인사차 고향집을 찾았는데, 아버지께서 ‘이번에는 못 간다’며, 방문을 걸어 잠그시지 뭐예요. 고민하다 못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어요. 신발은 막내아들을 애처롭게 생각하신 어머니께서 가져다 주셨고요. 이번 사고는 한동안 집에 알리지 않았고, 한참 지나 하산길에 발목이 삔 정도로 얘기했는데, 깁스한 상태로 집에 갔으니 부모님께서 좀 놀라셨겠습니까? 산에 다니면서 정말 부모님 속을 많이 썩혀드린 것 같아 늘 죄송스럽습니다.”

김미곤은 지리산에서 태어났다. 88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 부근의 인월이 그의 고향이다. 동네 뒷산이나 다름없는 지리산에 대한 유혹은 중학교 3학년 때 시작됐다. 휴일이면 인월을 거쳐 가는 지리산 등산객들을 보곤 궁금해오던 터였다. 쌀과 김치, 고추장, 감자, 양파 등 부엌에 있는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배낭에 넣곤 백무동을 거쳐 천왕봉으로 향했다. 노고단을 거쳐 화엄사로 내려서기까지 3박4일의 지리산 종주 산행이었다.

태권도 대련할 때와 비슷한 긴장감

▲ 지난 6월 중순 낭가파르밧 루팔벽에서 낙석 사고를 당한 다음 나흘만에 베이스캠프로 내려선 김미곤씨.
“제석단을 오를 때였을 겁니다. 지리산 주능선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감탄스런 광경은 이튿날 아침에도 펼쳐졌습니다. 발아래 구름이 가득 차 오르고, 저희들은 그야말로 구름 탄 도사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이후 매년 여름방학 때면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산행에 나선 미곤은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와 합기도 선수 생활을 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담력이 강했다. 단신으로는 태권도(현재 공인 5단)로 성공하기 힘들다 싶어 바꾼 종목이 신장과 관계가 적은 합기도(현재 3단)였고, 운동이 너무도 재미있어 대학도 태권도나 합기도 주특기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일반 체육관 출신이 체육고 출신들을 제치고 대학에 진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수에도 실패하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지내던 미곤에게 새 길을 열어준 것은 아버지였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부친의 권유에 마음을 돌린 미곤은 94년 광주 서강정보대 사무자동학과에 입학했으나,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공부가 아닌 산이었다.

“하계 산행 때 백두대간 종주 중 점봉산 구간에서 동기 여학생이 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동기 배낭을 제 배낭에 얹고 점봉산 오르막을 밀어붙였더니 선배들이 감탄하더군요. 고향에서 지게 질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무게였는데 말입니다. 암벽등반 실력은 그저 그랬습니다. 그래도 한 스텝 한 스텝 뗄 때마다 느껴지는 스릴은 짜릿했습니다. 마치 대련할 때 느끼는 긴장감과 비슷하다 싶었으니까요.”

‘한해 100일 산행’을 목표로 삼았다. 평일이든 휴일이든, 축제 때든 방학 때든 수업이 없는 날은 산에서 지냈다. 방학 때는 설악산이나 지리산 장기 산행에 나섰고, 평소에는 광주 근교의 유명 산을 순례하거나 무등산이나 월출산의 바위를 찾아나섰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96년 가을까지 고향에서 단기사병으로 근무할 때도 평일에는 태권도 사범으로서 생활하면서, 주말이면 산악부 선후배들과 어울려 등반을 즐길 만큼 날이 갈수록 산에 대한 열정은 뜨거워져만 갔다.

▲ 2004년 로체 남벽 허파바위 구간을 등반하는 김미곤씨.
졸업을 앞둔 97년 미곤에게는 히말라야 설산 원정의 기회가 오는 듯했다. 그런데, 그 해 말 IMF 상황이 닥치자 원정은 무산되고 말았다. 허탈했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 나선 게 알프스 3대 북벽 원정이었다.

뜻밖에 날씨가 좋아 아이거 북벽을 1박2일만에 순조롭게 끝내고, 이어 마터호른 북벽도 무난히 끝내고 귀국하자 희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산악부 선배인 나관주씨(38·에델바이스)의 마나슬루(8,163m) 등반 권유였다. 8,000m급 14개 거봉 등정 레이스를 펼치던 한왕용씨의 원정대였다.

“알프스에서 귀국한 지 보름만에 나선 원정이었습니다. 관주형은 경험 삼아 참가하라 했지만, 알프스 등반으로 자신감이 넘쳐 있던 터라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한데 제가 알고 있던 히말라야 등반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다른 팀들은 셰르파도 고용하고, 천천히 등반하는데 한왕용 대장과 관주형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밀어붙이지 뭐예요.”

마나슬루 등반 직전 낭가파르밧(8,125m) 등정에 성공한 두 사람은 고소적응이 잘 돼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알파인스타일로 등반을 펼쳤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미곤으로서는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다른 팀의 셰르파보다도 힘도 좋고 속도로 빨랐습니다. 반면 저는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아파 등반이 끝날 때까지 힘 한 번 제대로 못 썼습니다. 참패였죠. 그래도 배운 게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날씨가 나빠도 강행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한왕용 대장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니까요.”

99년 역시 나관주씨의 추천으로 로체 남벽 원정에 나섰다. 로체(8,511m) 남벽은 히말라야 고봉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벽이다. 그런데 미곤은 그런 악명 높은 벽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이 원정에 참가했다.

▲ 1998년 첫 히말라야 원정인 마나슬루 등반. 심한 고소증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다.
“결정하고 나서 사진을 보니까 어마어마하더군요. 베이스캠프로 들어서다가 텡보체 사원에서 처음 마주한 순간에는 질려 버렸고요. 그런데 베이스캠프를 향해 들어서면서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해볼만 하겠다고요. 저는 제가 막내이고 경험이 가장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막내도 아니고, 홍성택 대장과 관주형과 저 외 다른 대원들은 고산등반 무경험자였어요.”

김미곤은 로체 남벽 원정을 짐이나 나르리라 예상하고 나섰건만 실제로는 루트개척조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 등반은 로체 남벽 맞은편의 아일랜드피크에서 10여 명이 사망하고, 캉첸중가에서 한국대원 2명이 사망하는 등 폭설에 이은 눈사태 사고가 수시로 일어나는 바람에 일정이 지연되어 결국 해발 7,400m 지점을 최고도달점으로 기록하고 끝내야 했다.

김미곤은 이듬해인 2000년 마나슬루 재도전에 나섰지만, 역시 등정에는 실패하고 만다.

“첫번째 공격조에 포함되었지만 강풍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등정 시도 전날 설렌 가슴으로 지냈는데 강풍에 무산되니까 정말 섭섭하더군요. 마지막 캠프(C3·7,300m)에 함께 있던 관주형도 ‘내가 덕을 제대로 쌓지 못했는가 보다’며 아쉬워했으니까요. 이후 한왕용 대장이 성공했는데, 그 순간 저는 단장님을 모시고 마지막 마을인 사마가온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물론 다시 올라가 등반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에 등정이 이루어진 거죠. 마을에서 왕용이 형의 등정 소식을 듣는 순간 제가 오른 것처럼 기쁘더군요. 등정의 기쁨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도 받았고요.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고마운 선배들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를, 별 도움도 되지 않을 저를 데리고 다녔으니까요.”

등반은 극기의 대상이자 즐거움의 대상

김미곤은 마나슬루 재도전에는 실패했지만, 그해 가을 나선 초오유(8,201m) 등반에 8,000m급 고봉 첫 등정의 기쁨을 맛본다. 베이스캠프 도착 20일만에 끝낸 그 등반 이후 그는 고산등반에 탄력을 받는다.

▲ 1998년 알프스 아이거 북벽 등반중.
“2001년 마칼루 등반은 시작부터 곤욕스러웠습니다. 캐러밴 도중 선배 대원이 심한 고소증으로 실신해 난리가 났었습니다. 급히 후송시킨 다음 베이스캠프로 이동해 등반이 무르익어 갈 즈음에는 또 여자 대원이 고소증으로 심한 복통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가 후송을 책임지고 마지막 카르카(방목 목부의 움막)인 당말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가야 했으니까요.”

김미곤은 후송을 책임 맡는 순간 등반을 포기했다. 그런데, 카르카에 내려서 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의 무전이 날아왔다. “아무래도 네가 필요하다”는 한왕용 대장의 전갈이었다. 마지막 등정시도에서 그는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다.

“마칼루 등반에서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한왕용 대장에게서 배운 자제력과 안전의식은 저를 지금까지 온전하게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 대장의 경우 날씨가 나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철수하곤 했으니까요. 아무튼 그 등반에서 짤막하나마 청빙지대에서 선등도 서보고, 또 무산소로 정상까지 오르는 등 최고의 경험을 했습니다.”

마칼루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미곤에게 큰 선물이 전해졌다. 선배인 문종국씨(37·선앤문산악문화 대표)에게서 한국도로공사에 이력서를 제출하라는 연락이었다. 취업과 동시에 시샤팡마(8,027m) 남서벽 신 루트 개척등반대 대원으로 선발되는 조건이었다.

▲ 무등산 새인봉 등반(97년).
“제게도 큰 선물이었지만, 부모님께도 큰 선물이었죠. 시샤팡마 등반 때는 C1(7,100m) 구축 이후 베이스캠프에 내려와 있는데, 회사 격려단이 마지막 마을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가벼운 생각으로 마중 나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지체되는 바람에 여러 날 지나서야 베이스캠프에 돌아왔고, 그 사이에 등정이 이루어지고 말았답니다. 저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원정대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죠.”

2003년은 고속도로에서 지내야 했다. 회사 사정으로 계획했던 원정이 무산되었기 때문. 무척 갑갑한 해였지만, 그해 그는 근무 중 인연을 맺은 최윤영씨(27)와 백년가약을 맺고, 이듬해 겨울이 끝나갈 즈음 그를 빼닮은 첫아들 종윤도 얻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산등반에 대한 열정을 참지 못하고, 2004년 봄 로체 남벽 재도전에 나선다.

그 등반은 한 시즌 전 같은 루트를 등반한 일본팀의 흔적이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일본팀의 최고도달점에도 못 미치는 해발 7,900m에 끝을 맺는다. 김미곤은 김창호 대원과 함께 해발 7,700m 지점의 C4를 출발, 캠프를 하나 더 구축한 다음 정상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등정에 성공하더라도 하산은 반대편인 에베레스트 사우스콜로 내려서야 하는 고난도 등반이었다. 그 등반은 사우스콜 캠프가 그 시점에 모두 철수한다는 연락을 받곤 포기하고 만다.

“낭가파르밧 루팔벽에 비해서도 몇 단계 높은 고난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료와 장비의 부족, 전력 약세 등 모든 면에서 등정하기에는 못 미치는 원정대였던 것 같고요.”

▲ 로체 남벽 베이스캠프 부근.
김미곤씨는 고향 산을 알고파 지리산을 올랐고, 하얀 산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알프스에서 시작, 8,000m급 고봉을 매년 도전하고 있다. 그는 강약을 조절하며 리듬을 타고 싶어한다. 고난도 등반에 치중하다 보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데, 너무 쉬운 대상에 안주하다 보면 머릿속에 그려온 알피니즘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허락하는 한 산에 다니고 싶습니다. 제 자신이 만족할 만한 벽에 도전하고 싶고요. 한편으론 등반을 즐기고 싶습니다. 등반은 분명 극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즐거움의 대상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선배들에게서 배운 대로 안전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이번 등반에서도 아마 제가 사고를 당했던 린네 구간에 낙석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가끔 등정에 몰입하는 자신 발견하곤 걱정도

김미곤씨는 등반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간혹 지나치게 등정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걱정스러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내년을 목표로 추진 중인 에베레스트 원정이 성사된다면 그 등반에도 참가할 계획이다. 평범한 노멀루트 등반일지라도 한 해라도 쉰다면 리듬이 깨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해외원정을 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원정 계획이 설 때마다 빠지지 않고 동참하는 것 같습니다. 한 해 못 나가면 밥 한 끼 굶은 기분이 들어요. 요 근래 들어서는 어려운 등반에도 도전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못 할 것만 같은 생각도 들고요. 등반, 등산도 살아가는 과정 중에 거치는 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글 한필석 기자 ps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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