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마운 스토리’포항 내연산
내연산12폭포 중 3곳 담아… 여름 계곡산행으로 안성맞춤, 능선은 둘레길처럼 편안
경북 8경 중 으뜸으로 꼽아도 손색없는 포항 내연산 12폭포,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기암괴석.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연이 빚은 폭포와 계곡의 승경勝景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절경 중 절경이다. 겸재 정선이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를 남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겸재는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 풍수화의 새 장르를 개척한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다. 그가 진경산수화를 그린 장소는 금강산과 더불어 몇 군데 안 된다. 내연산은 그중의 한 곳이다. 그래서 경북의 금강산 혹은 소금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1983년 일찌감치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폭염이 시작되는 7월, 시원한 계곡 따라 내연산 계곡산행을 즐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내연산은 바위 하나 볼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陸産이다. 능선 위로 올라서 걷는 길은 둘레길같이 밋밋하다. 산 초입에 있는 보경사에서 출발해 오른쪽 문수봉 능선으로 올라서서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걷기 편하다. 그런데 내연산과 맞은편 천령산으로 둥글게 연결된 7봉우리는 천혜의 계곡을 만들었다. 그 계곡은 전형적인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절경이다. 능선과 계곡의 지형과 지질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천혜의 계곡이 만든 12폭포는 상생폭포부터 보현~삼보~잠룡~무풍~관음~연산~은폭~복호1~복호2~실폭~시명폭포로 이어진다. 각 폭포마다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한 안내판이 해당 장소마다 나온다. 폭포를 찾아 폭포 설명만 좇다보면 자칫 전체 절경을 놓칠 수 있다. 대개 계곡 산책에 나서는 사람들은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로 남긴 ‘내연삼용추도’에 나오는 연산폭포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연산폭포가 12폭포 중의 백미. 연산폭포 암벽에는 여러 시대를 걸친 숱한 시인 묵객들과 관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내연산을 거쳐 간 기록이나 구전을 남긴 인사로는 1214년 원진국사, 1587년 <유내영산록>을 남긴 황여일, 1623년 유숙, 1688년 <산중일기>를 남긴 정시한, 1733~1734년 겸재 정선, 1754년 이상정, <동국명산기>를 남긴 1800년 전후 성해응 등이다. 방문연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사명대사(1544~1610)도 이곳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가 쓴 보경사 법당 기문에 ‘내연산에는 3개의 거북돌, 3개의 흔들바위, 12개의 폭포, 기화대, 학소대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 문신 조경趙絅(1586~1669)의 시문집 <용주유고>에도 내연산 폭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칠언율시가 소개된다.
‘깎아 세운 듯 가파른 절벽 만 길 솟아 있고 峭壁削成恒萬丈
벼락 치는 듯 날리는 폭포 천 길 걸려 있네 飛流霆擊挂千尋
골짜기 입구의 물색은 인간 세상이 아니요 洞門物色非人世
호로 속 누대는 오랜 세월 갇혀 있었네 壺裏樓臺鎖古今
눈 들어보니 구름이 높게 나는 학 그림자 따르고 抉眥雲隨高鶴影
연못이 열리자 바람이 늙은 용의 울음소리 보내네 劈潭風送老龍吟
이번 유람이 천태산을 꿈꾸는 것보다 나으니 茲遊定勝天台夢
흥공이 땅에 던진 쇠가 도리어 우습구나 顧笑興公擲地金'
내연산 용추를 둘러보는 것이 중국의 흥공이 쓴 <유천태산부>에 나오는 천태산보다 훨씬 낫다는 의미다. 이 정도 절경이라고 예로부터 노래했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개인문집에 내연산의 절경을 노래한 내용들이 지금까지 많이 전한다.
종남산→내연산→내영산에서 다시 내연산으로
개인문집뿐만 아니라 관찬 지리지에도 내연산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청하현편에 ‘내영산內迎山, 현의 북쪽 11리에 있다. 산에는 대·중·소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三動石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신라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이 산에서 피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보경사는 ‘내영산內迎山에 있으며, 고려 때 이송로가 지은 원진국사의 비가 있다’고 나온다. <연려실기술>별집 제16권 산천의 형승편에 ‘청하의 내연산內延山은 바위와 폭포의 좋은 경치가 있다. 산에 대·중·소 세 개의 돌솥이 바위 위에 벌여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 개의 돌이라고 일컫는다. (후략)’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한 내용과 비슷하다.
사명대사가 남긴 보경사 법당 기문에는 ‘내연산은 옛날엔 종남산終南山이라 했는데, 뒤에 내연산으로 고쳤다. 고친 때는 신라시대이다.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이 산에서 피한 인연으로 뒷날 사람들이 내연이라 일컬었다. (후략)’는 내용이 전한다.
그런데 같은 산을 두고 몇 개의 다른 명칭이 등장한다. 애초에는 종남산이라 불렀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내연산과 내영산이 어떻게 명명됐는지 그에 대한 유래를 추적해 보자.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 사명대사가 쓴 기문에 ‘안쪽에서 길게 맞이했다’는 의미로 내연산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내영산은 안쪽에서 환영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두 명칭의 의미 차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다른 명칭이지만 동일한 유래로 볼 수 있다.
문헌에 나타난 명칭의 등장시기는 내연산이 조금 빠른 듯하다. 1680년쯤 제작된 <동여비고>에는 내연산으로 뚜렷이 나타난다. 하지만 1800년대 후반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내영산으로 표시된다. 이어 1900년대 초 일제가 제작한 <조선지지자료>에는 다시 내연산으로 나온다. 이로 비춰볼 때 내연산은 종남산→내연산→내영산으로 불리다가, 혹은 종남산 이후 내영산과 내연산을 혼동해서 사용하다가 다시 내연산으로 통일된 게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겸재 정선(1676~1759)도 1700년 전후해서 태어나 사망한 인물이니 내연산으로 불렀고, 이후 1800년대부터 내영산이 등장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닌 걸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