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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막걸리 산행] 김해김씨 가문 비법으로 빚은 ‘앉은뱅이 술’

글 손수원 기자 사진 이경호 부장 취재협조 대동여주도
  • 입력 2021.07.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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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산행 - 청명주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들이 꼭 마시던 청명주…신맛과 단맛의 조화, 젊은 층에도 인기

4대를 이어 청명주를 빚는 김영섭 중원당 대표. 아버지에 이어 충북 무형문화재 제2호 기능보유자이다.
4대를 이어 청명주를 빚는 김영섭 중원당 대표. 아버지에 이어 충북 무형문화재 제2호 기능보유자이다.

충북 충주忠州는 예부터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쪽에서 한강으로 진출하려면 충주땅을 지나야 했고, 반대로 북쪽에서 한강을 통해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할 때도 이 땅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삼한시대 마한과 백제는 충주를 주요 근거지로 삼았고, 고구려 장수왕은 이곳을 정복해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 불렀다.

훗날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한 뒤로 진흥왕은 이곳을 신라의 행정구역 9주 5소경 중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승격하고 수도 경주에 살던 귀족들을 이주시켰다. 이것은 충주를 경주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로 여겼다는 뜻이다. 한발 더 나아가 통일신라는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을 가진 ‘중원경中原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빈 술병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빠끔 고개를 내 밀었다. 고양이도 술 익는 냄새를 좋아하는 걸까.
빈 술병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빠끔 고개를 내 밀었다. 고양이도 술 익는 냄새를 좋아하는 걸까.

조선의 실학자들도 반한 맛

충주의 ‘찾아가는 양조장’인 중원당은 이 중원경이란 이름을 딴 양조장이다. 중원당 입구에는 고려시대 만든 창동리 약사여래입상과 마애여래상이 자리하고 있다. 각각 충북 유형문화재 제76호와 제8호로 지정된 이 두 문화재는 남한강변에 조성된 많은 불교 유적 중 일부이다. 그리고 중원당에는 충북 무형문화재 제2호인 ‘청명주淸明酒’가 있다.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농사를 시작할 때가 되면 풍년을 기원하며 갖가지 행사와 놀이를 벌였습니다. 4월 5일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로 대부분 이때를 기해 봄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청명주는 이 청명일에 마시기 위해 빚은 가양주家釀酒입니다.” 

충북 무형문화재 2호 기능보유자인 김영섭(48) 중원당 대표가 청명주에 대한 유래를 알려 주었다.

“일제시대,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 가양주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양조장에서 만든 술만을 팔게 했습니다. 할머니와 숙모님이 빚으시던 청명주의 명맥도 이때 끊겼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故 김영기 옹)께서 다시 청명주를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찹쌀로 빚은 청명주가 항아리 안에서 잘 익어간다.
찹쌀로 빚은 청명주가 항아리 안에서 잘 익어간다.

김영기 옹은 이곳에서 6대째 살고 있는 김해김씨 가문에 전해져 오는 민간 약방문인 <향전록鄕傳錄>에 적힌 주방문酒方文(술 빚는 방법)대로 청명주를 빚었다. 전통방식대로 청명주를 복원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으나 끝없는 연구와 실패 끝에 청명주 의 맛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청명주 제조법은 고문헌에 17군데 정도 기록되어 있는데 가양주 형태로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록은 <향전록>이 유일합니다. 또 그 비율이 독특하고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어 1993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찹쌀과 누룩으로만 빚은 청명주는 단맛과 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맛으로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다 한다. 과거 시험을 치르러 남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은 충주땅에 들러 꼭 청명주를 마셨다 한다. ‘청명晴明’이라는 이름에 과거급제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나는 평생 청명주를 가장 좋아하며 청명주의 양조 방법을 혹시나 잊어버릴까 두려워서 기록해 둔다’고 적었다. 역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 역시 자신이 쓴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청명주변증설’이라는 글을 통해 ‘청명주는 우리나라 금천金遷 사람만이 만들 수 있으니 금탄金灘의 물이 아니면 이룰 수 없으며, 다른 지방에서는 모방해도 이와 같지 않다’고 적었다.

위에서 언급한 ‘금천’은 지금 중원당이 위치한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를 말한다. ‘금탄의 물’이란 충주 달천과 창골에서 흐르는 산수山水와 남한강물이 합수되는 수살메기(두 물이 만나 밖으로 나가는 곳을 적당히 막아 주는 가림돌)의 물을 말한다. 충주댐이 건설된 이후 이 물을 사용할 수 없어 지금은 지하암반수를 사용하고 있다.

김해김씨 가문의 청명주 빚는 비법이 적힌 <향전록></div>과 중원당의 약주, 탁주 제품들.
김해김씨 가문의 청명주 빚는 비법이 적힌 <향전록>과 중원당의 약주, 탁주 제품들.

찹쌀·누룩·물로만 빚어 청명한 맛 일품

외아들인 김영섭 대표는 고령의 아버지를 위해 20대부터 청명주 빚기를 전수받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고, 군 제대 후 배상면연구소와 전통주연구소 등에서 술 빚는 법을 배웠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수자 수업을 받았고, 2007년 김영기 옹이 사망한 후 대를 이어 2008년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지정되었다.

“아버지께서 청명주를 복원하긴 했지만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술맛도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주방문 그대로 만들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죠. 주방문에 적혀 있는 내용은 쌀과 물의 배합비율, 사용하는 누룩 정도입니다. 발효 방법과 기간, 온도 등은 나와 있지 않았죠. 그러니 원래 술을 빚던 분이 아닌 아버지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죠."

김 대표는 청명주를 제대로 복원하고자 여기저기서 술 빚는 방법을 배워 연구하고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 그 결과 2016년에 주방문을 그대로 재현한 청명주를 만들 수 있었다.

“지역 찹쌀로 잘 알려진 노은찹쌀 100%에 누룩과 물로만 빚습니다. 첨가물은 일절 들어가지 않아요. 죽으로 밑술을 빚어 3일 동안 발효시킵니다. 이후 찹쌀 고두밥으로 덧술을 섞어 약 180일 동안 저온에서 발효 숙성시킵니다. 술은 어렵게 만들수록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즈넉한 한옥이 운치 있는 중원당 전경. 양조장 시설은 한옥 뒤쪽으로 있다.
고즈넉한 한옥이 운치 있는 중원당 전경. 양조장 시설은 한옥 뒤쪽으로 있다.

이렇게 정성으로 만드는 청명주는 신맛과 단맛의 조화가 빼어나 ‘2018 대한민국 주류대상’ 우리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찹쌀로 만드는 술은 멥쌀로 만든 술보다 좀더 답니다. 청명주는 여기에 신맛을 더합니다. 다른 술보다 물을 적게 쓰는 것이 신맛을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는 물과 발효 온도 등도 조금씩 관련이 있지요. 단맛만 있다면 평범한 약주가 되었을 겁니다. 신맛과 단맛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기에 청명주인 겁니다.”

청명주를 따라 마시니 첫 모금에 시큼한 신맛이 혀에 감긴다. 마치 청포도 과즙 같다. 혀로 술을 한 바퀴 굴린 후 목구멍으로 넘기니 은근한 단맛이 입안에 머문다. “고급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것 같다”고 평하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17도의 도수를 가지고 있어 ‘앉은뱅이 술’이 되기 딱 좋다. 실제 청명주는 전통주임에도 소비자들 중 20~30대가 가장 많다.

“신맛과 단맛의 적절한 조화 덕분에 기름지고 느끼한 전이나 칼칼한 매운탕에도 잘 어울립니다. 스테이크 같은 서양 요리와의 궁합도 좋습니다. 어떠한 음식과 함께 마셔도 좋은 술입니다.”

김 대표는 2019년 ‘청명주 탁주’를 내놓았다. 청명주 탁주는 김 대표가 직접 개발해 만든 술이다. 원래 ‘여인’이란 이름으로 2018년 대한민국명주대상에서 대상, 2018년 대한민국우리술품평회 탁주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명주다.

“청명주 약주와 달리 밑술로 멥쌀 구멍떡(도너스 모양으로 만든 떡)을 씁니다. 구멍떡을 쪄서 짓이겨 누룩과 섞어 탁주를 만듭니다. 구멍떡을 써서 더욱 부드럽고, 약주보다 물을 더 적게 쓰기 때문에 단맛과 감칠맛이 있습니다.”

같은 탁주인 ‘미희’는 플라워 숍 ‘메이플라워’와 협업한 제품이다. ‘미희’는 메이플라워 정미희 대표의 이름이다.

“전통주를 사랑하는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정미희 대표를 위해 이벤트성으로 만든 술이었는데 맛과 디자인이 좋다는 반응이 많아 정식 제품으로 출시했습니다.”

‘미희’는 좀더 부드럽고 탄산이 있는 맛과 더불어 다양한 버전의 패키지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려진 빨간 라벨을 붙였고, 얼마 전엔 꽃다발이 그려진 ‘생일축하 에디션’을 출시했다. 두 병을 나란히 놓으면 한 장의 그림이 완성되는 소소한 재미 요소를 두어 젊은 층에서도 주문이 많다고 한다.

20대 때부터 청명주를 빚어온 김영섭 대표는 전통주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20대 때부터 청명주를 빚어온 김영섭 대표는 전통주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제대로 만든 전통주 계승에 힘써야

20대부터 무형문화재 전수자로서 20여 년간 술 빚는 일에 청춘을 바친 김 대표는 전통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전통주라는 이름을 가진 ‘유사 전통주’가 많습니다. 값싼 원료를 쓰거나 몸에 좋지 않은 첨가물을 넣어 맛을 내는 술들이 ‘전통주’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최근 각광받기 시작한 전통주 시장의 안타까운 이면입니다. 제대로 된 전통주를 만들고 계승하는 이들을 위해 정부 차원의 투자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형문화재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김 대표의 우직함이 든든하다. 중원당 입구에 있는 두 유형문화재가 1,000년의 세월을 지켜온 것처럼 중원당의 전통주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가며 사랑받기를 바라본다.

중원당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통주 시음과 술 빚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도자기 체험도 할 수 있다. 물레 체험과 사발 그림 그리기, 나만의 술잔 만들기 등을 할 수 있다. 매주 토·일·월요일에 예약을 받는데,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재개 여부는 전화(043-842-5005)로 문의.


중원당의 술 제품은 네이버쇼핑이나 우체국쇼핑, 쿠팡 등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입할 수 있다. 가격 청명주 약주 17도(375㎖, 1만8,000원), 청명주 약주 14.5도(375㎖, 1만6,000원), 청명주 탁주(375㎖, 1만6,000원), 미희 탁주(375㎖, 1만2,000원). 쇼핑몰마다 가격이 상이할 수 있다. 홈페이지 www.청명주.com
본 기사는 월간산 7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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