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산행 - 청명주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들이 꼭 마시던 청명주…신맛과 단맛의 조화, 젊은 층에도 인기
충북 충주忠州는 예부터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쪽에서 한강으로 진출하려면 충주땅을 지나야 했고, 반대로 북쪽에서 한강을 통해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할 때도 이 땅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삼한시대 마한과 백제는 충주를 주요 근거지로 삼았고, 고구려 장수왕은 이곳을 정복해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 불렀다.
훗날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한 뒤로 진흥왕은 이곳을 신라의 행정구역 9주 5소경 중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승격하고 수도 경주에 살던 귀족들을 이주시켰다. 이것은 충주를 경주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로 여겼다는 뜻이다. 한발 더 나아가 통일신라는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을 가진 ‘중원경中原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의 실학자들도 반한 맛
충주의 ‘찾아가는 양조장’인 중원당은 이 중원경이란 이름을 딴 양조장이다. 중원당 입구에는 고려시대 만든 창동리 약사여래입상과 마애여래상이 자리하고 있다. 각각 충북 유형문화재 제76호와 제8호로 지정된 이 두 문화재는 남한강변에 조성된 많은 불교 유적 중 일부이다. 그리고 중원당에는 충북 무형문화재 제2호인 ‘청명주淸明酒’가 있다.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농사를 시작할 때가 되면 풍년을 기원하며 갖가지 행사와 놀이를 벌였습니다. 4월 5일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로 대부분 이때를 기해 봄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청명주는 이 청명일에 마시기 위해 빚은 가양주家釀酒입니다.”
충북 무형문화재 2호 기능보유자인 김영섭(48) 중원당 대표가 청명주에 대한 유래를 알려 주었다.
“일제시대,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 가양주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양조장에서 만든 술만을 팔게 했습니다. 할머니와 숙모님이 빚으시던 청명주의 명맥도 이때 끊겼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故 김영기 옹)께서 다시 청명주를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기 옹은 이곳에서 6대째 살고 있는 김해김씨 가문에 전해져 오는 민간 약방문인 <향전록鄕傳錄>에 적힌 주방문酒方文(술 빚는 방법)대로 청명주를 빚었다. 전통방식대로 청명주를 복원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으나 끝없는 연구와 실패 끝에 청명주 의 맛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청명주 제조법은 고문헌에 17군데 정도 기록되어 있는데 가양주 형태로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록은 <향전록>이 유일합니다. 또 그 비율이 독특하고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어 1993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찹쌀과 누룩으로만 빚은 청명주는 단맛과 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맛으로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다 한다. 과거 시험을 치르러 남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은 충주땅에 들러 꼭 청명주를 마셨다 한다. ‘청명晴明’이라는 이름에 과거급제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나는 평생 청명주를 가장 좋아하며 청명주의 양조 방법을 혹시나 잊어버릴까 두려워서 기록해 둔다’고 적었다. 역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 역시 자신이 쓴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청명주변증설’이라는 글을 통해 ‘청명주는 우리나라 금천金遷 사람만이 만들 수 있으니 금탄金灘의 물이 아니면 이룰 수 없으며, 다른 지방에서는 모방해도 이와 같지 않다’고 적었다.
위에서 언급한 ‘금천’은 지금 중원당이 위치한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를 말한다. ‘금탄의 물’이란 충주 달천과 창골에서 흐르는 산수山水와 남한강물이 합수되는 수살메기(두 물이 만나 밖으로 나가는 곳을 적당히 막아 주는 가림돌)의 물을 말한다. 충주댐이 건설된 이후 이 물을 사용할 수 없어 지금은 지하암반수를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