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신(山神) | <6>토함산] 단군 이후 첫 男산신 ‘석탈해’ 왕으로서도 최초로 동악神 좌정

입력 2016.06.28 13:06

대장장이신화·거인신화와 맞물려… 문무왕이 중앙집권화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도

[한국의 산신(山神) | <6>토함산]
토함산 정상에는 토함산 산신 석탈해가 유언으로 만든 사당 흔적으로 곳곳에서 나오는 기와를 쉽게 볼 수 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현재 정상 비석 주변으로 추정한다. 중앙에 우뚝 솟은 비석이 정상비석이다. / 사진 국립공원경주사무소 제공.

고대사회의 도시 형성은 반드시 산과 강(=물)을 끼고 있어야 한다. 외침을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산과 거주하는 데 필수품인 물은 생존의 필요조건이었다. 여기에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있다면 완벽한 지형조건이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는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 더욱이 3개의 하천과 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형성된 평야는 그야말로 옥토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 살 만한 땅이었다.

드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풍부했다. 부락이 생겨났다. 각각의 성씨가 부락을 대표했다. 6개의 성씨가 시조가 된 부락이며, 이를 진한 6부라 한다. 이씨의 시조인 알평공(謁平公), 최씨의 시조인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 손씨의 시조인 구례마공(俱禮馬公), 정씨의 시조인 지백호공(智伯虎公), 배씨의 시조인 지타공(祗陀公), 설씨의 시조인 호진공(虎珍公) 이다. 이들이 합의에 의해 공동체를 운영했다. 6부족 합의체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은 신라 화백제도의 기원이다.

박·석·김의 세 성씨 돌아가면서 신라 왕 즉위

어느 날 새로운 성씨를 가진 3명이 새로운 문명을 가지고 잇달아 출현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내용을 재구성했다. 먼저 신라 건국시조인 박씨.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 덕이 있는 자를 임금으로 추대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고자 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나정 우물가에 번개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비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얼른 찾아갔다. 경이로운 모습에 꿇어 앉아 절을 하는 순간 흰 말 한 마리가 사람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곳에 있던 알을 깨니 남자 아이가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면서 이상히 여겼다. 아이를 동천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를 발했다. 주변에 있던 새와 짐승들이 따라 춤을 췄다. 이윽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표주박같이 생긴 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은 박(朴)씨로 하고, 세상을 밝게 다스리라는 의미로 혁거세(赫居世)로 이름을 지었다. 혁거세가 자라자 진한의 여섯 촌장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서라벌이다. 따라서 박씨는 신라의 건국시조이며, 그와 관련된 얘기는 건국신화에 속한다. 고대 건국신화의 여러 부류 중에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신화와 알에서 태어난 난생신화 모두를 아우른다.

이어 석씨가 등장한다. 박혁거세와는 조금 다른 동악 토함산 산신으로서의 석탈해는 바다(=물)와 관련된 용왕신화와 대장장이신화와 연결된다. 기사의 주제로서 김씨를 먼저 다룬 뒤 자세하게 소개하겠다.

마지막으로 김씨는 신라 4대 왕 석탈왕 즉위 9년(서기 65년)에 나온다. 금성 서쪽 시림(始林) 숲에서 닭이 크게 운다. 석탈해 왕은 날이 밝자 표공(瓢公)을 파견해 살펴보게 한다. 시림에는 황금으로 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이 궤짝을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보내준 아들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둬 길렀다. 황금궤에서 나온 아이라는 뜻으로 김알지(金閼智)로 이름을 지었다.

세 시조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박씨는 10명, 석씨는 8명, 김씨는 38명이 각각 왕으로 즉위했다. 이와 같이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이지만 4대에 가서는 탈해왕 석씨이고, 이후 박씨가 왕위를 계승했다. 9대 벌휴부터 석씨가 다시 왕의 계통을 잇고, 13대 미추왕부터 김씨가 최초로 왕위에 오른다. 14대부터 16대까지는 석씨가 왕위를 계승하다가 17대 내물왕부터 52대 효공왕까지 김씨가 왕위를 잇는다. 이후 3대는 다시 박씨가 물려받고,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러 김씨로 왕조의 끝을 맺는다. 이처럼 복잡한 왕력은 신라가 전형적인 부족국가라는 사실과 호족세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세 성씨의 연합체로 호족세력을 견제하며 국가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중앙집권체제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 걸림돌이 역설적으로 철기문화라는 새로운 문물을 들여와 왜구와 외부세력 척결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석탈해를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하는 결정적 변수가 된다.

왜구와 외부세력 척결에 석탈해 앞세운 듯

이들이 등장하고 진한 6부족이 살았던 알천 부락을 중심으로 초기 신라(서라벌시대)는 경주 시내에 호국과 방위의 개념으로 오악을 가진 것으로 전한다. 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 남악 금오산(봉), 북악 금강산(령), 중악 낭산이었다.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오악이다. 이를 흔히 ‘3산·5악’과 구별해서 ‘왕경 오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같은 사실은 역사적 기록에 없지만 경주 향토사학자들 대부분 이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왕경오악은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전형적인 서라벌 방위용으로 보인다. 역사서에 기록된 신라의 오악은 신문왕(재위 681~692) 전후해서 처음 등장한다. 신라 9주가 창설된 직후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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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가 동해를 거쳐 아진포구로 들어왔다는 그 주변에 석탈해 유허비와 전각이 있다.
<삼국사기>권32 제사편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3산·5악 이하 전국의 명산·대천을 나눠 大祀·中祀·小祀로 한다. 대사 3산 중 1은 내력(奈歷 습비산: 지금의 낭산), 2는 골화(骨火: 경주의 금강산), 3은 혈례(穴禮: 청도 오리산)이다. 중사에 속하는 5악 중에 東은 토함산, 南은 지리산(당시엔 地理山), 西는 계룡산, 北은 태백산, 中은 부악(공산이라 하며, 지금의 팔공산)이다. 중사는 또 사진 사해 사독으로 나눴다. 소사는 상악, 설악, 화악, 겸악, 부아악, 월내악, 무진악, 서다산, 월형산, 도서성, 도로악, 죽지, 웅지, 악발, 우화 등이 해당한다. (후략)’


이보다 앞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석탈해편과 <삼국유사> 기이 제1 제4대 탈해왕편에는 일찌감치 ‘동악’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석탈해에 관한 내용을 추려서 재구성해 보자.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혹은 吐解라고도 함)이 즉위(AD 57년)하니 그때 나이 62세이며, 성은 석(昔)씨요, 비(妃)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디 다파라국의 출생으로,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 1,000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처음에 그 국왕이 여국왕의 딸을 데려다 아내를 삼았더니, 아이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는 차마 그리하지 못하고 비단에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갈대로 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처음 금관국(지금의 김해 지방) 해변에 가서 닿으니, 금관국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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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사와 마애석불 옆에 ‘성모구기(聖母舊基)’란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구(阿珍浦口: 지금 영일 인근으로 추정)에 이르니, 당시  시조 혁거세가 재위한 지 39년이 되던 해였다. 그때 해변의 한 노모가 이를 줄로 잡아당겨 바닷가에 매고 궤를 열어 보니, 거기에 한 어린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노모가 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신장이 9척이나 되고, 인물이 동탕하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을 알지 못하니 처음 궤짝이 닿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지저귀며 따라 다녔으니 작(鵲)자의 한쪽을 생략해 석(昔)씨로 성을 삼고, 또 그 아이가 온독(韞櫝: 담은 궤)을 풀고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으라” 했다고 한다.

탈해가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그 노모를 봉양하되 한때도 게으른 빛이 없었다. 노모가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요, 골상이 특이하니 학문을 배워 공명을 이루라”고 했다. 이에 탈해는 학문에 오로지 힘쓰고 겸하여 (풍수)지리를 알게 되었다. 양산(楊山) 밑에 있는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그 터가 길지라 하여 거짓 꾀를 내어 이를 빼앗아 살았으니 후에 월성이 그곳이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왕이 그 어짊을 듣고 자신의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7년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란 벼슬을 내려 정사를 맡겼다. 유리(儒理)가 돌아갈 때 유언하여 말하기를, “선왕(남해를 지칭)이 부탁하신 말씀에 내가 죽은 뒤에는 자(子)와 서(壻)를 막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으로 위를 잇게 하라 하셔서 과인이 먼저 즉위하게 된 것이니, 이제는 그 위를 탈해에게 전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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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왕의 제사를 지내는 숭신전 옆에 그의 무덤이 있다. 학자들은 시기적으로 석탈해왕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삼국유사>는 이후부터 <삼국사기>의 내용과 조금 달라 별도로 소개한다.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하인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무덤처럼 생긴 집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성 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지 바라보았다. 마치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가 보였는데, 그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곧바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그는 속임수를 써서 그 집 곁에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아니라고 다투었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아이에게 “이 집이 네 집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 집은 원래 대장장이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가 있는 동안 저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습니다. 지금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아실 겁니다.” 관청에서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그래서 아이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됐다. 이때 남해왕은 그 아이, 즉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 그분이 바로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탈해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을 시켜 물을 길어오라고 했다.

하인은 물을 떠오다가 도중에 먼저 물을 마시고 탈해에게 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물을 담은 뿔잔이 그만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는 이를 보고 하인을 꾸짖으니 하인은 맹세하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가깝건 멀건 감히 먼저 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뿔잔이 입에서 떨어졌다. 지금 동악에 있는 세간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것이다.

탈해가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인 건초 4년 기묘(AD 79)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䟽川丘) 가운데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에 탈해왕의 신령이 나타나서 “내 뼈를 조심해서 묻어라”고 명했다. 왕릉을 파보니 해골의 둘레가 3자 2치였고, 몸뼈의 길이가 9자 7치였다. 치아는 엉기어 하나처럼 되었고, 뼈마디도 모두 이어져 있었으니, 참으로 천하무적 장사의 골격이었다.

그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대궐에 두었는데, 신령이 또 나타나서 “내 뼈를 동악에 묻어라”고 명했다. 그래서 동악에 모시게 됐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탈해가 세상을 떠난 후인 27대 문무왕 때인 조로(調露) 2년 경진(서기 680) 3월 보름날 신유일 밤에, 문무왕의 꿈에 몹시 위엄 있고 무섭게 보이는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두거라”고 해서, 왕은 이 말대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나라에서 제사를 계속 지내왔으니, 이분이 바로 동악신(東岳神)이다.’

산신신앙이 중앙집권 노리는 왕권 뒷받침

[한국의 산신(山神) | <6>토함산]
선도산 산신을 모신 성모사 옆에 보물로 지정된 마애석불이 있다.
역사서에서 단군 이후 남성 산신으로 첫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석탈해다. 이전까지는 여성 산신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석탈해부터 남성 산신이 잇달아 등장한다. 이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던 여성 산신은 사회의 안정과 변화에 따라 공동체의 수호신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남성 산신으로 대체된다. 그 시발점에 석탈해가 있다.

왕이 산신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시기 산신신앙이 왕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민속학자나 사학자들은 산신의 형태와 변화를 역사적으로 토테미즘 같은 자연신에서 고대국가 건국 전이나 대체적으로 BC 1세기 이전에 여성 거인신이 나타난다고 본다. 이어 고대국가 건국 당시, 즉 BC 1세기 전후해서 어머니 자연신과 여신 등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 뒤를 이어 남신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남성 산신은 대체적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한국의 산신(山神) | <6>토함산]
신라 석탈해왕 위패가 모셔져 있는 숭신전 내부의 모습.
석탈해는 등장부터 동해에서 토함산으로 왔고, 죽을 때도 토함산에 묻혔다. 또 터전을 잡을 때도 토함산에 올라 호공택이 길지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계략적으로 빼앗았으며, 토함산의 요내정에서는 하인을 굴복시킨다. 이와 같이 석탈해는 토함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토함산이란 지명도 석탈해에서 연유했다는 설도 있다. 석탈해의 다른 이름이 토해다. 토해와 토함은 비슷한 음이니 토해가 토함산 지명의 토대가 됐다는 설이다. 또 운무와 풍월을 토함(吐含)하는 뛰어난 경관을 지녔다고 해서 토함산이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석탈해가 토함산 산신에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으나 경주의 3산을 포함한 여러 산 중에서 왜 하필 토함산이냐는 점에 대해선 의문점이 생긴다. 이는 탈해의 출신 배경과 정치권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국의 산신(山神) | <6>토함산]
토함산 정상비석 주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들이 보인다.
석탈해는 동해를 거쳐 토함산으로 오면서 철기라는 새로운 문명을 들고 왔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세력일 수 있다. 기존 6부족과 신라시조인 박혁거세는 힘을 가진 신흥세력에게 기꺼이 왕위를 물려준다. 경주 향토사학자들은 “고분을 발굴하다 보면 청동기 유물에서 2,000여 년 전으로 추정되는 철기 유물들이 갑자기 쏟아진다”고 말한다. 청동기문화를 가진 6부족은 산과 강과 평야 모두를 갖춘 천혜의 자연조건의 경주에 철기문화를 가진 새 세력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융화해 갔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점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기존 세력은 신흥세력에 전혀 배타적이지 않고 융화해 가며, 더 큰 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신라가 부족국가라는 사실도 역시 알 수 있다. 부족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의견 일치가 필요했고, 그 합의는 공동체의 출발 때부터 해오던 ‘화백’이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화백은 부족국가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이때 호족이나 부족국가들의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장치가 바로 삼산오악제도였다. 공통의 수호신에 대한 숭배신앙으로 개별 부족장들이 가진 이질성을 극복하려 했다. 대사 삼산은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의 호국적 성격이 강했고, 중사 오악은 통일신라 영토의 상징적 존재였다. 소사는 전국의 산신신앙의 대표적 명산을 꼽아 국가적 제사를 지냈다.

바로 여기에 오악 중에 가장 중요시 되는 동악의 산신으로 석탈해가 좌정했다. 토함산은 동해와 접해 있어 바다로 침입해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항상 감시하는 상징적인 산이다. 이는 마치 중국의 서악 인근에 있는 용문석굴처럼 강 입구에 석불과 마애불을 조각해서 외침을 막으려는 의도와 다를 바 없었다.

왕경오악과 삼산오악은 구별해야 할 듯

잠시 여기서 중국의 오악 성립에 대해서 살펴보자. 신라는 지증왕(재위 500~514년) 때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대거 받아들인다. 이때부터 국호를 서라벌 대신 신라라고 칭하며, 차차웅이나 이사금, 마립간 같은 부족장 호칭 대신 왕이란 명칭을 본격 사용하기에 이른다. 지증왕 본인부터 지증마립간에서 지증왕으로 고쳐 사용한다. 신라란 국호도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덕업일신(德業日新)과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한 자씩 따와 국호를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신라의 제도는 중국에서 상당 부분 수용했고, 중국의 문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중국의 오악제도의 유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유교 경전 중의 하나인 <爾雅(이아)>에는 ‘전국시대(B.C 4~3세기)에 오행사상의 영향으로 오악의 개념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가 봉선제로서는 한(漢) 무제 들어서 시작하며, 한의 선제가 확정했다고 한다. 동악 태산에 가면 공자(B.C 551~479년)가 남긴 ‘동악 태산 제일’이라는 비석이 있다. 공자는 전국시대보다 앞선 인물이다. 이를 볼 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B.C 259~210년) 이전에 오악의 개념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정컨대 전국시대의 각 국가의 왕들이 산악신앙에 바탕을 두고 각각의 산신숭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신라의 오악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신라 고유의 산신숭배사상을 신앙으로 발전시킨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르게 표현해서 왕경오악이냐,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인 삼산오악이냐의 문제다. 중국의 오악은 초기엔 국경의 개념이 매우 강했다. 황제가 본국의 땅이라는 사실을 신(神)에게 고하고, 만천하에 알리는 장소로 오악의 개념을 도입했다.

신라의 오악은 시기적으로 중국의 오악보다 훨씬 뒤에 생겼다. 신라가 건국(B.C 1세기)되기 전부터 중국은 오악의 개념(B.C 4~3세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도 초기부터 부족신앙의 개념으로 오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수호신 숭배와 같은 형태의 오악이 형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게 바로 왕경오악이다. 이 왕경오악은 부족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각각의 부족은 각각의 샤머니즘과 같은 산악숭배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 후에는 왕경오악이 더욱 발전해서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삼산오악과 같은 제도로 확대개편 됐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초기부터 석탈해가 토함산의 산신으로 등장하지만 명실상부 신으로서 부각된 건 통일 이후 각 세력을 통합하고, 왜구와 같은 외침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한 수호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였다. 이때가 바로 통일 직후 문무왕 시기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는 의상의 화엄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화엄종은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전국을 하나로 묶는 사찰을 창건하면서 사상적 통일과 왕권을 강화해서 중앙집권을 꾀하는 작업의 단초가 되는 종파다.

이와 동시에 문무왕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토함산에 토함산 세력인 석탈해를 산신으로 내세우면서 종교와 같은 숭배대상으로 지정한다.

석탈해는 서양에서 불과 철을 가진 대장장이신화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 철은 기존 세력을 한꺼번에 물리칠 수 있는 신무기였다. 철을 다스리려면 불이 필요했다. 고대사회에서 불은 신과 접할 수 있는 일종의 도구였다. 또한 철을 가지려면 강한 힘이 있어야 했다. 석탈해는 <삼국유사>에 ‘뼈만 9자7치가 된다’고 나온다. 그 정도면 실제 키는 4m 가까이 된다는 얘기다. 전형적인 거인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셈이다. 대장장이신화와 거인신화에 등장하는 왕을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시키면서 국가의 사상적 통일을 꾀하는 작업은 어쩌면 통일 뒤의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

서악 선도산 산신은 박혁거세 어머니

또한 박혁거세는 선도산 산신인 서술성모의 아들로 등장해서 왕이 되는 반면, 석탈해는 산신의 아들이 아닌 바로 산신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는 남성의 강력한 힘이 중요시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형성되는 이미지의 신격화 작업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석탈해의 토함산 산신으로의 신격화는 별로 어색하지 않다.

문무왕은 석탈해를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시키고, 본인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계 최초의 수중릉에 안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러면서 그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수중릉을 보호하고 동해에서 토함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감은사를 창건한다.

결국 문무왕은 자신의 꿈속에 석탈해를 토함산의 산신으로 등장시켜 석씨를 비롯한 지방귀족과 토호세력들을 한데 묶고 강력한 중앙집권세력을 만들기 위해 석탈해를 이용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석씨를 산신으로 좌정시킴으로써 신라 초기 3성 교체기를 완전히 끝내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이후부터는 신라가 망하기 직전 세 임금을 제외하고는 줄곧 김씨 세습 왕조로 이어진다. 이는 화백제도가 약화되면서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화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토함산 산신 석탈해는 외적을 막고 중앙집권을 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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