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월간 山> 40년 기자 박영래 탐구

[476호] 2009.06
입력 2009.06.04 09:41 | 수정 2009.06.04 09:41

“술이 여기 있으니 술을 마신다”
‘악돌이’의 창조자이자 산악계의 마당발

박영래 기자는 산과 도시에서 항상 등산복에 배낭을 멘다. 군인이 군복을 입듯 산악인은 등산복을 입고 24시간 언제든 산에 갈 수 있도록 대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오른쪽에 멘 보조가방에는 가장 중히 여기는 취재수첩과 열쇠,버스카드,휴대전화,방수포로 싼 비상금이 있다. 시내에서의 배낭 내용물은 재떨이,윈드재킷,신문 스크랩해둔 것들,주소록과 방수포에 든 비상금 (보조가방에 든 것보다 몇 배 더 많은 금액) 등이다.

영국산악인 조지 말로리는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른다”고 했다. <월간山> 악돌이는 “술이 여기 있으니 술을 마신다”라고 말한다. 말로리의 말은 세계 산악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되었고, 악돌이의 말은 한국 산악인들의 술자리에서 유명한 말이 되었다. 스케일이나 대상의 초점은 틀리지만 분명한 것은 설명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를 함축적이고 분명한 대답으로 간단하게 풀어냈다는 것이다. 결국 말로리와 악돌이는 어떤 경지에 이른 대가인 셈이다.

‘악돌이’는 1969년 <월간山> 창간 이후 40년간 산(山)을 취재한 박영래(62·朴煐來) 기자를 말한다. 본지는 창간 40주년을 맞아, 이 40년 등산기자 박영래 선배를 독자들께 소개하기로 했다. 그는 <월간山>의 산 역사이자 그대로 한국 등산사를 몸으로 써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본지 기자를 본지 지면을 할애해 소개한 일은 <월간山> 40년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다만 다른 등산 잡지 두 군데에서는 그를 소개한 지 오래다. 그는 그만큼 산악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이룬 기자로서의 성과 또한 탁월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기인적인 행보로 세간의 관심을 끌 화제성을 지녔다.

산꾼들의 술자리에서 이취하면 그는 어김없이 산노래를 부른다. 비록 거기가 상가(喪家)라 할지라도. “산에서 살면서, 산처럼 살자던, 우리들 모두 모여 여기 왔네. ‘자일’이가 왔어요. 저 높은 산에. 정든 이 산정 위에 ‘비나’양도 왔어요. 요우리 요우리, 알도레이호…….”

(왼쪽부터)1970년대 초 설악산 대청봉에 선 박영래(왼쪽),이인정, 김경배씨. 세 사람 모두 미성양화점에서 제작된 크레타슈즈를 신은 것이 특이하다. / 1980년대 초 인수봉 등반을 마치고 인수산장에서 차를 마시는 박영래 기자. 지금과는 달리 멀쑥하고 초롱초롱한 인상이다./1980년대 초 합천 수도산 정상에서 본지 깃발을 들고 섰다. 당시 제호로 쓰였던 ‘山’자는 추사 김정희가 썼던 글자를 그대로 딴 것이다.

등반용 로프는 독일어로 자일이다. 그는 아들 이름을 자일이라 지었고, 뒤이어 태어난 딸은 등반용 쇠고리인 카라비나에서 따 와 ‘비나’라고 지었다. 한때는 진로 소주병에서 떼어낸 두꺼비 그림을 신분증이라며 취재원들에게 내밀곤 했다. 그 신분증으로 여러 단계의 취재원 접촉 절차가 순식간에 생략되곤 했음은 물론이다.

1947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온 피란민이었다. 전쟁 통에 외가에서 자란 그는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를 거쳐 부산으로 이사했다. 돌이켜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배고픈 세월이었고 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얻어 먹으러 쏘다니는 게 일이었어. 그러다 술 만드는 양조장에 들어가게 된 거야. 어른들이 돈을 내고 서서 컵에다 술을 받아 그대로 삼키는데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그땐 술인지도 몰랐지. 그거 먹으면 배부른 줄 알고 훔쳐 먹은 거야. 그러곤 도망을 가는데 부산 앞바다가 수직으로 벌떡 서더라고. 엎어져서 긁은 거지.”

메모하는 박영래 기자와 술을 가져다주는 악돌이. 악돌이는 모든 산악인을 뜻하며, 이들과 얘기라도 할라치면 술을 먹어야 하기에 본인이 술을 먹는 건 순전히 악돌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날 이후 매일 양조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어른들이 “이놈 봐라. 그래 이것도 먹어 봐라” 하며 장난으로 술을 주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 성북구로 이사 온 그는 당시에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는 혜화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틈만 나면 학교를 빼 먹고 북한산에 올라가 탄피나 총알 같은 전쟁 잔해를 가지고 놀았다. 이때 그의 주도(酒道)는 막걸리에 밥 비벼 먹는 수준에 이르렀다.

“학교에 부잣집 애들이 많았어. 나는 부모도 없이 외갓집에서 크니까, 못 먹고 못 입었지. 외갓집에도 오남매가 있었거든. 내가 제일 허름한 거 입었지. 학교 가면 비교되고 애들이 놀리니까 가기 싫었어.”

가난한 그였지만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이 있었으니 그림이었다.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의 칭찬을 독점했고 사생대회에 나가면 상을 받아왔다. 재능이 있었고 막막한 세상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통로였다. 고등학교에 접어들면서 만화를 그려 조선일보에 투고하기 시작했고 실력을 인정받아 지면에 자주 소개되었다. 소재는 대부분 날카로운 시선의 사회비판적인 내용이었기에 자다가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나마 학생이라 훈방되었던 게다.

당시 제주일보에도 만화를 연재하는 등 제법 인기를 누렸던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매달 일반 직장인 몇 배의 돈을 벌게 됐다. 만화와 산, 술 세 가지에 취미가 있었기에 1960년대에 아는 사람을 통해 일본에서 고가의 암벽장비를 직접 사 썼으며 나머지는 술 먹는 데 썼다.

악돌이 만화에 연탄집게를 들고 순악질 여사로 등장하는 부인 허미영 여사.

친척 어른들의 소개로 동향이었던 이양구 사장의 동양제과에 들어가 과자 포장지를 그리는 도안실에서 근무도 하고 광명인쇄공사 이학수 사장 밑에서도 일을 했다.
“만날 산에만 다니니 어른들이 일 좀 시키라고 해서 들어간 거였어. 그러다 1969년 <등산>이 창간되고 얼마 지나 편집장이었던 오정방씨에게서 전화가 온 거야, 같이 일하자고.”

1970년 9월 그의 손에 의해 만화 주인공 ‘악돌이’가 태어났다. 줄창 마시고, 줄창 산으로만 다닌 악돌이도 이제 어느덧 마흔이 되었다. 당시 그의 별명이 악돌이였으니 만화 캐릭터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특이한 건 40년 내내 헬멧을 깊숙이 눌러 쓴 채 눈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다.

“젊었을 때부터 당구나 바둑, 화투 같은 잡기도 못하고 내성적이어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싫어했어. 세상에 불만이 많았지. 그래서 악돌이도 눈을 없애고 무조건 산으로만 내달리게 한 거야. 따지고 보면 악돌이는 내 일기나 마찬가지야.”

“나는 원효나 사명대사의 마음을 이해한다”
학벌 지상주의와 끼리끼리 편 가르는 세속의 불합리함, 지나친 물욕에 대해 그는 열변을 토하며 분개했다. 이 꼴 저 꼴 보고 싶지 않아 헬멧을 눌러썼지만 실상은 변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만화 캐릭터 악돌이는 박학다식한 암빙벽·산행 정보를 전했으며 동시에 산악계의 잘못된 행태와 허세·권위의식을 해학적으로 비판하며 날카롭게 깔아뭉갰다. 실상 허허실실해 보이는 그의 말투와 만화 속에는 상대방의 폐부를 긋는 날선 면도날과 자기 과시욕을 버리고 스스로 바닥까지 몸을 낮추는 내공이 담겨 있다. 최근의 악돌이를 보라. 스스로를 ‘개(犬)’라고 일컫는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였던가.

“난 고등학교만 나왔어. 돈이 없어서 대학 못 간 게 아니라 더 배울 필요를 못 느꼈어. 고등학교 때부터 만화 그린 고료가 쌀 몇 가마니였거든. 평생 만화를 그리고 싶었어. 원래 꿈도 만화가였고.”

조선일보 창사 이래 고교 출신으로 기자가 된 사례는 단 두 번. 전쟁 때 종군기자 한 명과 박영래 기자다. 그는 1980년 산악문화사에서 조선일보로 <월간山>이 넘어갈 때도 살아남았으며 IMF 감원 열풍이 불어 명문대 출신들의 자리가 없어져도 살아남았다.

독자들의 악돌이에 대한 성원, 산에 대한 열정이 40년 등산기자 생활의 원동력이었다. 2004년 퇴직했지만 그의 책상은 여전히 산지 사무실에 남아 있다. 객원기자로 여전히 부록지도 코스 가이드와 악돌이 코너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달 5~6일은 취재 산행을 간다. 거리로는 50~60km이다. 그것을 기사화하고 등산 지도를 만든다. 그렇게 40년을 이어왔다. 그의 취재 산행 원칙은 정확한 정보, 안전한 코스, 새로운 등산로를 전달하는 것이다.

5월 13일 밤 10시가 넘은 시간. 땀내가 밴 파란 등산복을 입은 이가 사무실에 들어섰다. 영동 천태산 취재 산행 후 막 서울에 올라온 박영래 선배였다. 그리곤 펜으로 빽빽하게 기록한 지도를 꺼내 옮겨 쓰는 작업에 돌입했다.

“선배님, 산행 어떠셨습니까?”하고 묻자 “천태산이 영동에서 올라오는 길은 소개가 됐지만 서쪽 금산에서 올라오는 길은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어. 또 북동쪽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도 이렇게 좋은데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단 말야. 우린 이런 거 다 확인해서 독자들에게 소개해줘야 해. 우리가 한 발 더 뛰어야 독자들이 행복한 거야.”

키 높은 풀숲을 헤쳤는지 그에게선 풀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는 지치지도 않는지 곧바로 등산 지도 작업에 몰입했다. 산 앞에서는 결코 양보가 없는 그에게는 지금도 ‘대충’이나 ‘매너리즘’ 같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온천 산행 취재로 이 땅의 온천은 다 가봤지만 실상 탕 속에 들어가 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럴 시간에 주변 산에 오르고 동네 노인들 만나 산의 내력이나 지명, 온천 약효가 어떤지 하는 것들을 조사하고 민박은 어디서 하는지 등등을 취재해도 시간이 모자랐기에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고 올라올 때에야 온천을 못했구나 하고 무릎을 친단다.

“한 번은 어느 온천에 갔는데 주인이 특실을 내주더라고. 근데 저녁이 되자 기똥차게 예쁜 아가씨가 한복을 입고 들어오는 거야. 사장님이 같이 자라고 했대. 그래서 몇 만 원 쥐어주면서 돌려보내고 사장한테는 아침에 잤다고 얘기하라 그랬지.”

취재는 떳떳해야 한다는 게 그의 도덕적인 원칙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40년간 수많은 산악인을 만났지만 촌지를 받았다거나 해서 추문이 돈 적이 한 번도 없다.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부동산 투기해서 부자 된 친구들 지금은 다 죽었어. 투기하느라 골머리 썩고 방석집 가서 술 먹으니 일찍 죽지. 나야 공기 좋은 산에서 먹으니 살아남았지. 아파트 몇 채 있다고 하면 내가 그러지. 나는 더 부자다. 텐트 1인용, 2인용, 3인용, 5인용 다 있다고. 나한테는 산이 종교야.”

산꾼은 술꾼이라 했던가. 그의 취중 기행은 산악계에서도 유명하다. 지금은 산행할 때 술을 안 마시지만 10년 전만 해도 배낭에 항상 소주 페트를 꽂고 다녔다.

“나는 술사랑 덕분에 원효나 사명대사 이런 분을 이해해. 쉽게 말해 열반을 이해하는 거야. 나는 그런 경험 많이 했어. 내 딸내미 비나 여섯 살 때 애들 데리고 도봉산에 갔어. 한국등산학교 수료식 있는 날이니 술 먹으러 간 거지. 나 혼자 가면 술 마시러 간다고 마누라가 뭐라 하니까 딸 데리고 갔지. 오후 다섯 시부터 산 입구에서 줄창 마셨지. 지나는 산꾼들은 다 붙잡고 한 잔씩 돌렸으니 꽤 마셨어. 그래 새벽 한 시쯤 집에 와서 배낭 내려놓고 등산화 끈을 푸는데 장모가 ‘박 서방, 애가 안 보여’하는 거라. 얼마나 기분 좋게 술을 먹었는지 술잔 돌렸던 산꾼들 말은 다 기억나는데, 딸 데리고 도봉산에 갔다는 기억은 그냥 없을 ‘무(無)’가 되더라고.”

결국 야간 산행하는 학국산악회원들이 소나무숲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찾아 데려다 주었고, 다음날 월요일부터 “박영래가 술 마시고 취해서 딸 버렸다더라”하고 소문이 퍼져 산 선배들에게서 엄청 욕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4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와 그에게 “핏덩이”라 불리는 막내 기자가 한자리에 섰다. 두 사람의 어색한 미소가 은근히 잘 어울린다.

소주 100잔에 받은 결혼 승낙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고 하잖아. 내가 그걸 체험했어요. 이번에는 포천 광덕산에 아들 자일이를 데리고 술 마시러 갔는데 버스 출발하기 전에 애한테 배낭 보라고 하고 얼른 내려가 순두부에 소주 한 병 털어 넣고 와서는 똑같이 생긴 버스를 탔어. 근데 그 버스가 아냐. 벌써 출발한 거지. 순간 의정부 시내가 다 노랗게 변하더라고. 왜냐. 직전에 도봉산에서 딸 잃어버린 사건 때문에 마누라한테 호되게 당했거든. 결국 택시 타고 쫓아가서 버스 잡았지.”

그렇다고 술 때문에 곤혹스런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주 100잔을 마시고 장인으로부터 인정받아 소문난 미녀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구파발에 등산화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 사장님 딸이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했어. 딸을 노리는 산꾼들이 많았지. 그 양반이 술 백 잔 마시면 딸을 준다고 해서 친구들이 가서 도전했는데 다 실패했어. 그래서 공짜로 술 먹을 기회가 생겼다고 가서 100잔 먹었지. 덤으로 좀 더 먹고. 사실 며칠 전부터 고기 먹고 몸을 좀 만들었지.”

그렇다고 그가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냥 술만 먹는 것은 아니다. 술자리는 취재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그만의 비법이었다. 술자리에서 그는 허허실실한 듯하면서도 유머와 재치가 있는 말솜씨로 분위기를 띄웠고 내로라하는 산악인들 모두가 술안주감이었다.

한편으로 이토록 그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마당발인 그는 산악계의 크고 작은 애경사를 모두 챙기고 독자나 산꾼들의 술자리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특히 2004년 퇴임하고 나서는 더 바빠져, 그와 술자리를 갖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아는 전국의 산꾼들과 잔을 부딪치고 있다. 그러나 예순을 넘어서며 과거에 비해 술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 술을 끊을 생각은 없다.
“술, 담배 끊는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냐. 전쟁터에서 술, 담배 안 한다고 총알이 피해가나? 그거나 마찬가지인 거지. 인생에서 불행이란 그런 거야.” 

토왕폭 초등자 박영배, 월간 <사람과 산> 사장 홍석하, 한국산악회 부회장 정우섭, 중앙고 OB 신승모, 동국대 OB 오영복, 안나푸르나 한국 초등자 유동옥씨 등이 그의 절친한 산친구이자, 술친구 들이다.

요즘의 등산객들은 잘 모르지만 ‘악돌이 박영래’는 우리나라 등산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이드 산행 기사의 대가로서 40년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을 소개한 일이 그렇다. 시중에 개인의 이름을 내건 무수히 많은 등산 가이드 책자와 인터넷 사이트가 있지만 그 중에 몇 퍼센트나 되는 필자가 자신이 발로 간 곳만을 지도에 표기했을까. <월간山>의 취재로 생긴 등산로를 뺀다 하더라도 상당수는 <월간山> 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 오늘 내가 지나간 발자국은 / 마침내 후인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를 두 발과 글로 실천한 이가 악돌이 박영래다.

“사실 40년 근무한 거 부끄럽게 생각해. 사람이 얼마나 할 게 없으면 한군데서 40년을 있었겠어. 40년 기자, 그거 결코 좋게 볼 필요없어. 나 같은 사람 뭐가 있다고 망신스럽게 기사를 써. 나중에 기사 다 써도 절대 미리 보여줄 생각 마.”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가 환갑이 넘어서도 여지껏 <월간山>에 머무는 것은 돈 때문도, 술 때문도 아닌 산꾼들 사이에서 머물고 싶은 순수한 욕망 때문임을.

그는 현대의 강호 속에서 취권을 구사한다. 산악계의 병폐는 공격하고 사람에게는 따뜻한 악돌이표 취권을 구사한다. 박영래 선배에게 경의를 표한다. 


 / 글 신준범 기자·사진 이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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