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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한국의 무릉도원’을 찾아서 | 유래 및 역사] 복숭아꽃 만발한 전설 속의 이상향

월간산
  • 입력 2017.08.2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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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런 속세 벗어나려 찾은 듯… 지금은 피서지로 개념 변질

지리산 삼신봉에서 발원한 물은 청학동계곡으로 합류해서 흐른다.
지리산 삼신봉에서 발원한 물은 청학동계곡으로 합류해서 흐른다.

사람들이 여름만 되면 무릉도원을 찾는다. 무릉도원이 어떤 곳이기에 여름 복더위만 되면 등장할까. 그리고 누구나 무릉도원을 꿈꾸며 산다. 하지만 그 실체와 존재 여부에 대해선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어렴풋한 문헌과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동양에서는 무릉도원이지만 서양에서는 유토피아로 통한다. 일종의 이상향이다. 과연 무릉도원이 어떤 곳인지, 어디서 유래했는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정확히 한번 살펴보자.

무릉도원은 중국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다. 핵심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진나라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무릉의 어느 고기잡이가 계곡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던 중 양쪽 언덕이 온통 복숭아나무숲으로 덮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는 때라 고기잡이는 노를 저으며 정신없이 바라봤다. 복숭아나무숲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꽃잎은 푸른 잔디 위로 펄펄 날리고 있다. 계곡 발원지에 도착하자 숲도 함께 끝나고 산으로 가로막혀 있고, 산 밑으로 조그마한 바위굴이 하나 있다. 굴속에서 무언가 빛이 났다. 그 속으로 들어가자 별천지가 나왔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어부에게 밖에 나가서 절대 이곳 얘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곳을 나온 어부는 후일 다시 찾았으나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속세와 떨어져 있는 별천지란 뜻으로 무릉도원이란 말을 쓰게 됐다. 무릉도원에는 주씨와 진씨 두 성이 서로 사돈을 맺어 내려왔다 해서 서로 사돈이 되는 것을 주진지의朱陳之誼를 맺는다고 한다.’

4~5세기 도연명이 살았던 중국은 당시 매우 혼란했다. 위진남북조 시대로 중국은 진과 한 이후 다시 여러 나라로 나눠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연명이 우연히 찾은 무릉도원은 산 속 깊은 계곡 끝에 있는 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비옥한 땅에 농사를 지으며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만 보면 영락없는 이상향이다. 난세에 이런 행복한 장소를 꿈꾸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중국 도연명의 <도화원기></div>에 심취했던 고려 말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청학동에 대한 첫 언급이 나온다. 무릉도원은 산 속 깊은 계곡 끝에 조그만 동굴을 지나 복숭아꽃이 만발한 이상향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심취했던 고려 말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청학동에 대한 첫 언급이 나온다. 무릉도원은 산 속 깊은 계곡 끝에 조그만 동굴을 지나 복숭아꽃이 만발한 이상향으로 알려져 있다.

계곡·동굴·복숭아꽃이 무릉도원 키워드

무릉도원의 중요한 키워드는 깊은 산 속, 계곡, 동굴, 복숭아꽃 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 복숭아꽃은 영적인 열매를 상징한다. 신선이 사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나무와 꽃이 복숭아꽃이다. 무릉도원의 제1 요소다. 동굴은 전형적인 신선이 사는 장소이고, 반드시 산 속 깊은 계곡 끝에 나타난다. 도교에서는 이를 동천洞天이라 한다. 속세를 벗어나고 싶은 강한 열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위자연사상과도 통한다. 바로 은둔사상으로 연결된다. 이 모든 개념이 혼란스런 상황을 벗어나 이상향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그것이 곧 무릉도원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중국에서 한반도로 넘어와서는 청학동과 무릉계, 우복동 등의 개념으로 살짝 각색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선으로 알려진 최치원도 혼란스런 상황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개인 욕망의 좌절로 속세를 벗어나 결국 산으로 들어갔다. 당나라에서 관리를 하면서 당의 국교인 도교의 무위자연사상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치원이 실제로 신선이 됐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이인로의 <파한집>에서 청학동 최초 언급

고려 말 무신정권으로 인한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속세를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기록이 바로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이다. 무릉도원, 아니 청학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무릉도원은 고려 말 이인로에 의해서 유래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파한집>에 청학동 전설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중략) 옛 노인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이 산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다. 구부리고 엎드려 몇 리를 가야 넓게 트인 땅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좋은 밭과 기름진 땅으로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을 만하다. 청학이 그 가운데 깃들어 살므로 청학동靑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개 옛적에 속세를 등진 사람이 살던 곳인데, 무너진 담장과 집터가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고 했다.’

구전되는 내용을 소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인로는 도연명에 매우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스스로  <도화원기>를 거듭 읽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인로는 자신의 거처를 도연명이 누워 있는 마루방이라는 뜻으로 ‘와도헌臥陶軒’이라고 불렀다. 또한 <와도헌기>에서는 속세의 영화를 뿌리치고 은일했던 도연명의 의지를 동경하고 매우 높이 샀다는 내용도 나온다.

1 이인로의 <파한집> 표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2 <도화원기>를 쓴 중국 도연명. 출처 중국 인명사전.
1 이인로의 <파한집> 표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2 <도화원기>를 쓴 중국 도연명. 출처 중국 인명사전.
도연명의 <도화원기>와 이인로의 <파한집>에 소개되는 내용을 봐도 중요한 키워드가 비슷하다. 산 속 깊은 계곡과 좁은 동굴, 좁은 동굴 지나 큰 평원, 복숭아꽃, 속세 등진 사람들 등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인로는 실제로 혼란스런 상황을 피해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결국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파한집>에 밝히고 있다.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아가니
숲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에서 삼신산이 아득히 멀고 먼 데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라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인가
꽃잎 떠오르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 이인로 <파한집>

그러면 무릉도원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는 청학동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무릉도원은 무릉과 도원의 복합명사로 굳셀 武, 큰 언덕 陵, 복숭아 桃, 근원 源의 뜻을 가진다. 즉 무릉에 있는 복숭아의 근원이란 뜻이다. 이것이 확대되어 신선들이 사는 이상세계나 이상향, 도원경, 별천지 등으로 해석된다. 예로부터 복숭아는 신선이 머무는 장소에 항상 등장하는 영적인 나무를 상징한다. 청학동은 푸를 靑, 학 鶴, 동굴 洞으로, 이것도 청학과 동의 복합어다. 청학은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 운다는 전설의 새를 말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무릉도원과 청학동, 둘 다 의미상으로 혼란스런 상황을 피해 이상향을 찾아간 사실을 그대로 알 수 있다.

고려 말 이인로 이후 조선시대 들어서도 청학동을 찾는 선비들은 줄을 이었다. 특히 청학동과 무릉도원이라는 지명이 전국 곳곳에 잇달아 등장한다. 김종직은 지리산에 올라 <유두류록>이라는 유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 곳곳을 헤맸다. 그는 피아골을 청학동이라 여겼다. 이어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성룡의 형인 유운룡은 세석평전을 청학동이라 각각 주장했다. 하지만 개인의 의견일 뿐 확신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언서 <정감록>에도 ‘진주 서쪽 100리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10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그곳이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아무도 모르고 밝혀진 바도 없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지리산 남쪽 자락 마을인 악양의 매계梅溪를 청학동이라 했다. 근래에 비로소 인적이 조금씩 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감록>의 십승지가 청학동이자 무릉도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은 풍수지리설과도 연결된다. 우복동이란 개념은 풍수에 의해서 나왔다. 소의 배에 해당하는 지형으로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장소라는 말이다. 따라서 풍수설의 길지가 바로 청학동이자 무릉도원이라는 것이다.

지리산 청학동 도인촌에 가면 옛날 초가집이 그대로 있어 정말 무릉도원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하늘 아래 신선들이 사는 천하의 명승지라는 뜻의 ‘선구영부천하승지’란 석각이 보인다
지리산 청학동 도인촌에 가면 옛날 초가집이 그대로 있어 정말 무릉도원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하늘 아래 신선들이 사는 천하의 명승지라는 뜻의 ‘선구영부천하승지’란 석각이 보인다

계곡서 휴식이 힐링이고 신선놀음일 듯

시대가 흐를수록 그 개념도 조금씩 변천하기 마련이다. 현대 들어서 청학동이나 무릉도원을 찾는 것은 신선이 되기 위해서가 아닌 휴식과 힐링을 위해서라고 본다. 속세를 벗어나 신선이 되는 장소에서 몸과 마음을 맡기면 저절로 신선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겠다. 그렇게 보면 신선의 현대적 의미가 힐링으로 볼 수도 있다. 혼란스런 속세를 잠시 벗어나 자신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여름에 청학동과 무릉도원을 찾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도화원기>나 <파한집>을 근거로 유추하면, 여름에 이런 장소들을 찾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시기는 봄이 한창 무르익는 4월 즈음이기 때문이다. 단지 계곡과 동굴은 시원하기 때문에 봄보다 여름에 많이 찾는다. 여름의 무릉도원은 비록 복숭아꽃은 없지만 시원한 계곡 물 속에 앉아 신선놀음을 하면 이게 바로 무릉도원이고 청학동이지 않을까 싶다.

이인로의 <파한집>이란 제목 자체가 심심풀이로 쓴 시화집이란 의미니, 청학동을 갈망하고 찾는 행위도 결코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전설 속의 이상향을 심심풀이로 그냥 써본 것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시원한 계곡에 가서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면 그것이 곧 신선놀음이고,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고 청학동이지 않을까 싶다. 본인이 편하고 마음에 드는 장소면 그곳이 바로 청학동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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