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면 무조건 산악동아리에 가입할 생각이었다. TV에 나오는 등반가들을 보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3월의 캠퍼스, 학생회관의 동아리방은 신입생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었다. 같은 과 동기와 함께 산악동아리를 향해 걸어갔다. 열린 문 안으로 활기가 넘치는 동아리방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을 지날 때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누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중, 여고를 나온 새내기의 눈에는 그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산악인보다 훨씬 멋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
천년고도 전주 동남부를 에워싸고 있는 고덕산高德山(603m)은 타임캡슐이다. 고도의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함께했고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어기지 역할을 했다. 전주는 백두대간을 넘어 호남의 곡창지대로 가는 관문이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개의 산성이 있는데 현존하는 남고산성의 형태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주성을 지킨 이정란이 쌓았다고 한다. 남북에 지휘소인 장대가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있다. 남고산南固山(273.7m)은 도시에 바짝 붙어 있는 담장과 같다. 날카로운 석영암질의 규암절
저 멀리 수평선은 아무리 봐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발아래 파도 쓸리는 소리 사르르 사르르, 하얀 모래 위 물방울 맺히는 소리 보그르르, 바다는 속을 훤히 비치며 밤낮 흔들어 춤추고 갈매기 몇은 부끄럼 없이 쳐다본다. 들판이 움직인다. 산이 되어 움직인다. 바다의 모든 것이 움직인다. 들판과 산을 헤치며 미끄러져 가는 고깃배, 푸른 음표 위의 힘찬 뱃고동 소리. 바다는 깊고 짙푸르다. 오래도록 바다의 뒤척임과 하얀 파도를 바라본다. 상대산上臺山은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바닷가 해발 183m,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에 올
오름과 뱅듸를 걷다 보면 많은 무덤과 그를 둘러싼 산담을 만나게 된다. 뱅듸는 넓고 평평한 들판이나 초원을 부르는 제주말이다. 거친 돌과 울창한 수풀로 뒤덮인 사나운 땅인 뱅듸를 개간하며 나온 돌로 밭담을 쌓고, 집을 지어 살던 제주 사람들이 죽어서 그 오름과 뱅듸에 묻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름을 다니다 보면 대부분의 양지바른 사면에서 마을 공동묘지를 만나게 된다. 오름은 제주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고, 망자의 고향이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의 삿갓오름은 이 점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오름 전체를 빼곡히 덮은 무덤오름
지난 9월 마지막 주말,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일대에서 제6회 장수트레일레이스가 열렸다. 지난 봄 같은 대회 70km 부문에 출전했다가 기상 악화로 경기가 중단되어 완주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마지막 CP(체크 포인트, 경기에 참여한 트레일러너를 위한 여러 음식이 마련되어 있다)를 남긴 상황이었지만 스태프의 권유에 하산해야 했다. 당연히 아쉬움이 컸다. 이후 약 6개월이 지난 9월 마지막 주 나는 같은 대회 100km 부문에 재도전했다. 다음은 그 출전기다.‘100’은 상징적인 숫자다. 어린아이에게 ‘100밤’은 영원을 뜻하며,
장수트레일레이스 코스 난이도는 국내에서 열리는 다른 대회와 비교했을 때 어려운 편이다. 그중 100km와 100마일 코스는 트레일러닝 경력자도 도전을 주저할 정도다. 자진해서 힘든 레이스를 택한 트레일러너 32인에게 물었다. “왜 도전했나요?”100km 완주 박준혁(50세, 김포 거주, 무직, 트레일러닝 경력 7년) “모두 똑같이 힘든 상황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어요. 긍정적인 마인드 세팅을 위해서, 힘겹게 고3 수험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을 위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몸소 보여 주려 했습니다. 100km 대회 준비를 위해서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항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한다. 그래서 어종이 무척 다양하며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옛 문헌을 보면 죽변항이 동해의 손꼽히는 어항이면서 군사적 중요성을 지닌 다목적 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까지 죽변 지역은 울진현에 속해 해안 방어와 해상 교역의 거점 역할을 했다. 여진족이나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동해안에 방호소가 설치됐는데 죽변 일대는 울진 방호소 영향권이었다. 조선시대 죽변에는 죽변진이 설치됐는데 진鎭은 수군기지로, 동해안 방어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한편 에 이미 대게(자해紫蟹
‘죽변竹邊’이라는 이름은 ‘대나무竹가 많은 바닷가邊’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화살 만드는 대나무를 특별 관리했다 한다. 동해의 절경과 역사가 어우러진 죽변항 인근 관광 명소들을 꼽아본다 ➊ 죽변등대 드라마 세트장죽변등대는 1910년에 건립된 등대로, 경상북도 지정 기념물 154호다. 울진의 북쪽 관문이자 동해를 오가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으며, 등대 주변 대나무 숲길인 ‘용의꿈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은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등대공원은 죽변항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조망 명소로 하트해변의 절벽 위에 그림처럼 서
첫 삼척 여행이었다. 강원도 강릉, 묵호는 종종 찾았지만 이상하게 삼척만은 늘 지나쳤다. 지도 위에서는 가까웠지만, 마음속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던 삼척. 이번엔 더 늦기 전에 1박 2일 여정을 떠났다.차를 몰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차창 너머 바다는 점점 푸른빛을 더했고, 바닷바람 속 동해안 특유의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부드럽게 굽이치며, 달리는 내내 바다와 함께였다. 삼척에는 자박자박 걷기 좋은 길이 많았고, 먹거리와 즐길 거리도 제법 풍성했다. 도시 안에서 이동거리가 길지 않아 한결 느긋하게
산에 들어오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청량한 숲과 돌이끼를 덮어쓴 바위와 개울, 풀밭, 작은 골짜기마다 향기롭다. 꼭대기로 길게 난 산길은 그늘에 가려 싱그럽고 이파리 팔락거리는 나무들은 오라고 손짓하는 듯. 단아하고 정결한 대곡사 절집만큼 시원한 물 한 잔 내어주는 보살님의 정성에 고개 숙이며 걷는다. 마당의 느티나무에서 우는 매미 소리는 무더위에 지쳐 요란하고, 배롱나무도 붉은 꽃을 다 피우지 못했다.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일대 낙동강 근처에 있는 해발 579m, 산세가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비봉산飛鳳山이다. 고려
국내에서 등산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로망은 단연 백두대간 종주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웅장한 산세를 만끽하는 즐거움에다 국토의 가장 높고 험한 산길을 종주한다는 것은 등산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경복고등학교 동문들의 산악동우회인 ‘경복산우회’에서 뜻깊은 창립 40주년을 맞이해 특별한 행사를 진행했다. 백두대간을 한 날에 전 구간 동시 종주한 것이다.“뜻깊은 40주년을 맞이해 40명산 등반과 함께 아직 국내에서 시도해 보지 않은 백두대간 일시 종주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의 산악단체로서는 시도조차 쉽지 않았겠
천안에는 고도가 높은 산이 없다. 하지만 의기는 드높은 종주를 할 수 있다. 이른바 천안독립종주다.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을 시작으로 매봉산 유관순열사 생가지~동성산~광덕산~만뢰산~월봉산~부소산~위례산을 지나 성거산~태조봉~흑성산에서 독립기념관까지 50km다. 이 코스는 많은 산꾼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이를 한 번에 걷는 건 무리다. 하이라이트만 걸어보자. 첫 번째로 소개하는 성거산~태조봉 코스는 일부 구간 금북정맥에 속하며, 도심 구간 곁에 있어 들날머리가 다양하다. 둘레길을 걷듯 편안한 길이 대부분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크게
‘제주의 돌’이라고 하면 으레 구멍이 쑹쑹 뚫리고 거무튀튀한 현무암이 떠오른다. 그런데 얼마 전 한라산 고지대의 ‘하얀 돌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밝은 빛깔의 암석 밭이 한라산에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라니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모세왓’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이 은밀한 땅이 천연기념물 지정을 기념해 한시적으로 특별히 개방된다기에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갔다. 길 없는 관목지대 헤치며 1시간제주도와 그 중심의 한라산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신비로 가득한 땅이다. 도무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동굴이
의류 무역회사를 다니다가 퇴사한 후 아웃도어 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은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어느덧 2년이 흘렀다. 매장을 찾는 단골 산꾼들과 산이야기를 나누는 근무 조건은 나에게 최상이 아닐 수 없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조언도 해주고, 정보도 얻는다. 단골들은 산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나에게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며 “차라리 매장을 접고 등산 유튜브나 하라”고 한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혼자 떠드는 것보다 상대에 맞춰 대화하는 게 나는 더 재미있다. 등산에 입문하는 고객들과는 산행 방법도 알려줄
불볕더위 가득한 안국사 입구, 구불구불 고샅을 지나 한참 올라왔다. 왼쪽으로 상수리나무 길옆의 계곡에는 물소리 폭포처럼 들린다. 며칠 동안 전국적으로 물 폭탄이 쏟아졌다. 물을 뒤집어쓴 바위마다 콸콸 소리를 낸다. 굴피·까치박달·오동·상수리·산뽕·좀작살·붉나무, 길섶으로 광대싸리 흰 꽃이 환하다. 노란 꽃 마타리를 바라보며 걷는데 이 산중의 좁은 산길에 아스팔트를 왜 깔았을까? 하루살이는 연신 눈앞에 웽웽거리며 걸음을 방해하다 결국 눈 안에까지 들어가서 눈꺼풀이 아리고 따갑다. 오전 10시 50분 모자를 벗어 흔들며 간다. 운주산雲
흰 산에 대한 꿈이 있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들을 볼 때면 떨림이 느껴졌다. 설레는 마음이 주는 떨림인지 두려움이 주는 떨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떨림은 꿈을 꾸게 해주었다. 흰 산을 오르는 꿈을 꾸며 알프스 원정을 계획했다. 원정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매일같이 그 꿈을 곱씹었다. 꿈을 꾸며 사는 내내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벅찬 꿈을 안고 알프스로 떠났다. 이 글은 2025 한양대 산악부 알프스 원정의 기록이다. 원정에는 부상으로 함께하지 못한 진경이를 제외하고 동균 형, 일선 형, 성현과 영욱 그리고 나. 총 다섯 명
아들은 트롤퉁가Trolltunga 절벽 끝, 악마의 혀처럼 뻗은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아내는 오래전 나와 한 달 동안 함께했던 배낭여행에서 북유럽을 가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 두 마음이 단숨에 하나로 모였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결심했다. “그래, 이번엔 노르웨이에 가보자.”여행 준비를 하며 모니터 화면 위에서 펼쳐본 지도와 사진들을 통해 노르웨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오래전 빙하시대가 끝나면서 녹아내린 얼음이 만든 깊은 골짜기. 그리고 그 사이로 흘러든 바닷물이 피오르드라는 장엄
완도군 신지도 금곡마을은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 원교 이광사(1705~1777)가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한 곳이다. 비운의 명필 이광사는 한국적인 서체의 토대가 된 ‘동국진체東國眞體’와 서예의 체계적인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쓴 인물이다.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는 그의 글씨는 구례 천은사 일주문,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나주 금성관,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등에서 만날 수 있다.완도군의 슬로건은 ‘치유’다. 청정바다가 품고 있는 자연환경과 해양문화를 토대로 ‘해양치유의 섬’, ‘해양치유 1번
새별오름,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백약이오름, 아부오름 등 제주를 여행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오름은 비교적 낮은 곳에 있다. 그에 비해 마을이 드문 중산간 지대부터 한라산 산록을 따라 솟은 오름들은 대체로 길이 험하고 오름 자체의 높이도 높아 찾는 이가 드물다. 그러나 이 지대의 오름들은 높은 만큼 조망이 시원하고, 광활하게 펼쳐지는 제주의 원시 숲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봉개동의 거친오름(621m)도 그중 한 곳이다. 외관 때문에 붙은 이름 ‘거친’제주도 지도를 펼치면 한라산 백록담에서 동북 방향을 따라 제법 커다란 덩치의 오름
영남알프스 끝자락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에 토곡산(855m), 선암산(704m), 오봉산(533m)이 솟았다. 경남 양산시에 해당하는 이곳은 산과 아담한 들판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또한 교통의 요지다.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지선이 지난다. 양산은 산길의 요지이기도 하다. 낙동정맥과 영축지맥 같은 큰 산줄기 2개가 남북으로 흐른다. 영남알프스 고봉 중 6번째인 영축산에서 갈라진 영축지맥이 밀양시로 방향을 틀기 전 갈라져 나온 한 줄기가 장장 20km를 넘는 장거리 종주 능선을 빚어놓았다. 토곡산에서 남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