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에 들어가면 무조건 산악동아리에 가입할 생각이었다. TV에 나오는 등반가들을 보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3월의 캠퍼스, 학생회관의 동아리방은 신입생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었다. 같은 과 동기와 함께 산악동아리를 향해 걸어갔다. 열린 문 안으로 활기가 넘치는 동아리방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을 지날 때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누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중, 여고를 나온 새내기의 눈에는 그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산악인보다 훨씬 멋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와 마주앉아 신청서에 이름을 적고 있었다. 하지만 학기 내내 그 선배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졸업생으로 잠시 학교에 들렀던 것이다. 연중행사인 총동문회 날에만 그를 볼 수 있었다. 그 선배만 아니면 난 10년 일찍 산을 시작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 선배 덕분에 MS-DOS가 사라지고 윈도우의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접했다. 몇 날 며칠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우며 스타크래프트(게임)를 하곤 했다. 돌고 돌아 지금 산으로 돌아왔다. 산에 오르면 문득 ‘그때 산악동아리를 가입했으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을까? 어쩌면 내 인생도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후회하는 건 아니다. 페이커(프로게이머의 닉네임)가 되지는 못했지만, 젊을 때 백패킹으로 세계 여행도 하고, 지금은 일과 산의 밸런스를 맞추며 컴퓨터를 제법 다룰 줄 아는 중년으로 살아가고 있다. 10월의 어느 날 홀로 떠난 비금도 투구봉에서 와인 한 잔 하며 떠올린 추억이었다.

아슬아슬 대중교통 여행
이른 아침 알람도 없이 눈을 떴다. 쉬고 싶었다. 회사 행사가 많았고, 시즌이 바뀌면서 연일 바쁘기도 했다. 시체 놀이를 할지 산에 갈지 고민했다.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던 리스트를 훑어 보았다. 산 하나를 클리어하기로 했다. 몸을 일으켰다. 전날 삶아 놓은 고구마를 슬라이스해서 에어 프라이기에 넣었다. 고구마가 구워지는 동안 배낭을 쌌다. 와인 한 병, 치즈 하나, 배 한 개. 취사도구는 필요 없다. 언제 떠날지 몰라 미리 충전해 놓은 드론도 챙겼다. 미련이 남은 듯 떠나지 못하는 여름 날씨와 더위를 쫓아내려는 듯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가을 날씨도 잊지 않고 의류를 챙겼다. 오전 10시 목포행 열차에 올랐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운이 좋다면 암태 남강항에서 비금도행 오후 2시 배를 탈 수 있을 것이다. 12시쯤 목포역에 도착하면 버스로 목포터미널로 간다. 터미널에서 신안의 1004개 섬을 잇는 1004번 혹은 2004번 버스를 타면 2시쯤 남강항에 도착한다. 열차가 지연되거나 버스 노선이 어긋나면 선착장에서 텐트를 쳐야 한다.
B안은 목포역에 도착하면 택시를 잡아타고 남강항으로 달린다. 시간상 가장 안전하지만 택시비가 만만치 않다. 일단 목포역에 도착하면 끌리는 대로 이동할 것이다. 이도저도 안 되면 1004번 버스를 타고 1004대교 관광 후 목포항 어느 파라솔에 앉아 회나 한 접시 먹으면 된다. 산행보다 더 스릴 있는 대중교통의 묘미이다. 동그라미를 피자 자르듯 나눠 놓고 칸칸이 색칠하는 일일계획표처럼 단톡방에 시간별로 링크를 올리며 계획을 세우는 극강 J(Judging : MBTI의 계획형)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이 반란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열차는 지연됐다.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검은색의 멋진 택시에 올라탔다. 교통편을 검색해 보니, 시간상 시청 앞에서 아슬아슬하지만 1004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서야 범상치 않은 택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앞좌석 의자에 달린 모니터와 중앙에 놓인 마이크는 말그대로 움직이는 노래방이었다. 기사님이 노래 한 곡 청했다. 평소의 나라면 솔깃한 제안에 머리를 흔들며 목청껏 락발라드를 열창했겠지만, 1004버스를 놓칠세라 마음이 쫄깃해 거절했다. 알고 보니 목포에서 유명한 노래방 택시였다. 승객들이 부르는 노래를 유튜브에 올리며 유명해졌다. 덕분에 목포를 찾는 연예인들과 방송국의 러브콜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버스 도착 5분을 남기고 정류장에 도착했다. 감사 인사를 하자 기사님은 물 하나를 던졌다. 이미 배낭에 물은 충분했지만 기사님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1004버스가 정각에 도착했다. 승하차가 없는 정류장은 그냥 지나쳐 20분이나 일찍 남강항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비금도에 도착할 때쯤 어르신이 다가와 내민 여객선 이용 관련 설문지를 작성해 주고 나오느라 꼴찌로 하선했다.

40분 만에 도착한 평일의 비금도는 조용했다. 배에서 빠져나온 차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선착장에는 나와 염전 수리차(물레방아)를 돌리는 동상뿐이었다. 그림산으로 가는 방법도 물을 겸 휴게소에 들어갔다. 사장님은 승객들의 하선이 끝나면 셔틀버스가 떠난다고 했다. 설문지를 작성하느라 늦은 탓에 셔틀버스를 놓친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음 배가 도착할 때까지 1시간을 더 기다렸다. 선왕산에서 그림산까지 종주할 생각이었는데, 그림산 투구봉 원점회귀로 수정했다. 셔틀버스 승객은 나뿐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등산객도 없었다. 한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아 오르는 내내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오솔길을 지나 암릉 구간이 나왔다. 모델이 없으니 풍경 사진이 밋밋했다.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바위를 기어올랐다 다시 내려와 카메라를 회수했다.

혼자 여행할 때는 발품을 팔아야 맘에 드는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드론을 날려 원하는 구도로 사진을 찍으면 된다. 드론을 띄우고 바위를 올랐다. 슬랩 구간에는 안전바가 설치되어 있어 어렵지 않았다. 보통은 발 디딜 곳을 찾아 발끝만 보며 걸어야 하지만, 드론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바람을 타고 날개짓 하는 새가 되어 내려다보는 듯했다. 드론이 나를 따라오도록 맞춰 놓고 조종기를 포켓에 넣었다. 동영상으로 촬영하면 굳이 조종기로 셔터를 누를 필요 없으니, 산행에 집중할 수 있다.
해지기 전에 야영지에 도착하려면 지체할 수 없었다. 커다란 배낭을 멨지만 거대한 산에서 눈을 씻고 찾아 봐야 할 만큼 작은 존재가 되어 움직였다. 야영할 때마다 떨어진 빵가루를 짊어지고 바삐 움직이던 개미가 떠올랐다. 그렇게도 하찮아 보였던 일개미가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게 새삼 대견스러웠다.
능선에 올라섰다. 석양을 머금은 잔잔한 바다는 부드러운 비단 위에 노을빛 수를 놓은 듯 눈부시게 빛났다. ‘황홀하다’는 단어가 걸맞은 풍경이었다. 그림산 능선에 올라섰다. 지루함이 사라졌다. 바다에 홀린 채 걷다 보니, 멀리 투구봉이 보였다. 콜롬비아 엘페뇰El Peñol이 떠올랐다. 전망대를 오르는 계단 모양이 다르지만 우뚝 솟은 돌산의 모양새가 비슷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360도 파노라마 뷰가 예술이었다. 텐트를 설치하자 기다렸다는 듯 석양이 수평선 위에서 마지막 빛을 발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어둠이 찾아왔다. 랜턴을 텐트 끝에 걸었다.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가 건너편 능선에 올랐다. 별과 바다, 그리고 투구봉 끝에서 북극성처럼 빛나는 텐트를 담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텐트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귀신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몸이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쫓기듯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밝은 텐트 안에 걸터앉았다. 얇은 홑겹의 텐트가 철옹성처럼 든든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 준비해 온 조촐한 음식을 세팅했다. 고구마칩과 과일은 와인에 곁들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랜턴을 껐다. 시각적인 고요함이 느껴졌다. 별들이 빛을 낼수록 밤의 깊이가 더해갔다. 멀리 바다는 존재를 감추듯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혼자 있지만 고독함은 없었다.

대신 따져주는 버스 기사
기다렸던 일출은 볼 수 없었다. 빛이 없으니, 세상이 진공상태에 빠진 듯했다. 선왕산으로 넘어가볼까 생각했지만, 열차 시간이 애매했다. 대신 비금도의 명물인 동백나무 파마머리 벽화를 찾아 가보기로 했다. 서둘러 하산했다. 어제 버스 기사님이 알려준 시간에 여유롭게 도착했다. 배시간에 안성맞춤이었다.
남강항에 도착해 벽화로 가는 교통편을 검색했다. 때마침 퍼플 섬으로 가는 ‘퍼플 버스’가 들어왔다. 기사님에게 물어보니 벽에 붙은 여러 개의 버스 노선과 시간표를 짚어가며 설명해 주었다. 요는 터미널로 가는 버스 배차 간격이 기니, 다른 노선 버스를 타고 벽화 삼거리에서 내려 사진을 찍은 후, 삼거리의 터미널행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해서 타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이었다.
양쪽 정류장은 삼거리에서 가까웠고, 벽화는 그 중심에 있으니, 해볼 만 했다. 이윽고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다. 하지만 벽화 삼거리에서는 정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망한 채 돌아서자 퍼플 기사님이 대신 따졌다. 두 분이 잠시 얘기하더니, 버스에 타라고 했다. 퍼플 기사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신나게 달려 벽화 삼거리에 도착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드론을 준비하며 벽화로 걸어갔다. 드론을 띄워 환하게 웃고 있는 벽화 속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인증샷을 남겼다. 터미널행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고 4분이나 지나서야 버스가 도착했다. 퍼플버스 기사님에게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했다. 노래방 택시 기사님도, 퍼플 기사님도 대중교통으로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인연들이다.
민미정 깨알 팁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비금도 가는길에는
신안에는 1,004개(정확히는 1,025개) 이상의 섬이 있어 1004섬이라고 부른다. 어디든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 위에 흩뿌려 놓은 듯 크고 작은 섬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중 900개 이상이 무인도라고 한다. 최근 이 섬들을 잇는 천사대교가 놓여 섬관광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천혜의 수산자원과 UN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된 퍼플섬 등 관광 명소에 현지 주민들의 푸근한 인심은 덤이다.

넉살 좋은 노래방 택시 기사님 택시 안에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어 있다. 택시 기사님의 유튜브에 출연하고 싶다면 노래 한 곡 뽑아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다! #목포뮤직택시

동백 파마머리 벽화 신안에 가면 반드시 동백꽃으로 단장한 인자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미소와 함께 인증샷을 찍어야 한다!

목포역 씨엘비 베이커리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면 목포역 씨엘비 베이커리에 들러 크림치즈 바게트와 새우바게트를 선물로 사가자!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