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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7> 임훈 <登德裕山香積峰記등덕유산향적봉기>] 청고淸高하고 웅장한 경승은 지리산에 버금

월간산
  • 입력 2017.12.1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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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목 줄기·잎은 마치 만년송 같아… 날씨는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천변만화

덕유산에는 벌써 상고대가 내려 순백의 산을 뽐내고 있다.
덕유산에는 벌써 상고대가 내려 순백의 산을 뽐내고 있다.

‘이 산(덕유산)의 청고淸高하고 웅장한 경승은 지리산에 버금간다. 그러나 세상일을 다스리는 지위에 있으면서 죽장망혜竹杖芒鞋 차림으로 유람하는 자들은 반드시 두류산과 가야산만 칭할 뿐, 이 산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선현들이 옛 풍류의 자취를 남겨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토록 하였기 때문인데, 이 산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이 산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사물은 스스로 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즉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산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만약 산의 좋은 경치를 보고 마음에 얻음이 있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하여 꼭 사람들이 남긴 유적만을 의지하려 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옛 사람들이 남긴 자취만을 헛되이 따를 뿐, 산의 훌륭함을 잃어버리고 있다.’ - 임훈 <登德裕山香積峰記등덕유산향적봉기>, 윤명채(무주향토사연구회) 번역

 중봉 올라가기 적전 드넓게 펼쳐진 덕유평전을 바라보고 있다. 뒤로 구름과 안개가 뒤섞인 산 그리메가 너울처럼 일렁인다.
중봉 올라가기 적전 드넓게 펼쳐진 덕유평전을 바라보고 있다. 뒤로 구름과 안개가 뒤섞인 산 그리메가 너울처럼 일렁인다.
겨울 산행의 백미, 덕유산德裕山(1,614m)이다. 눈꽃산행으로 겨울 등산객이 제일 많이 찾는 산이다. 조선 선비들도 제법 찾은 듯하다. 조선 중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고 남인의 정수였던 허목은 그의 문헌집 <기언> 제28권 하편 덕유산기에 지리지 같은 글을 남겼다.

‘남쪽 명산의 정상 가운데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니, 구천뢰九千磊 구천동九千洞이 있고, 칠봉 위에 향적봉이 있다. 덕유산은 감음感陰(안음의 옛 이름이며, 지금 함양의 옛 지명)·고택高澤(장수의 옛 이름)·경양京陽(금산의 옛 이름)의 여러 군에 걸쳐 있는데, 곧장 남쪽으로 가면 천령天嶺과 운봉雲峰이다. 지리산 천왕봉과 정상이 나란히 우뚝하며, 이어진 산봉우리에 연하煙霞(안개와 노을 또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가 300리나 서려 있다. 봉우리 위에 못이 있는데, 못가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 자라는 나무는 특이한 향기가 풍기는 사철나무가 많은데, 줄기는 붉고 잎은 삼나무와 같으며, 높이는 몇 길이 된다. 못의 모랫가엔 물이 맑으며, 깊은 숲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난다. 산을 오르는 데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감음의 혼천渾川을 따라 구천뢰 60리를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양의 자갈길을 따라 사자령獅子嶺에 올라서 이르는 것이다.’

허목보다 앞서 갈천 임훈林薰(1500~1584)은 1552년(명종 7) 최초로 덕유산 유산기를 기록했다. 추석이 막 지난 음력 8월 24일부터 29일까지 5박6일에 걸쳐 덕유산의 일출과 일몰, 향림의 경치를 만끽했다. 그 이전에 누군가 올랐겠지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가 올라간 목적과 동기에 대해서 유산기 초반부에 비교적 자세히 밝히고 있다.

1 계곡과 어울린 덕유산의 가을풍경이 환상적이다. 이제는 겨울에 접어들어 더 이상 볼 수 없다.
2 임훈 유산기에 등장하는 계조굴은 지금 오수자굴로 불린다. 그 앞에서 쉬고 있다.
1 계곡과 어울린 덕유산의 가을풍경이 환상적이다. 이제는 겨울에 접어들어 더 이상 볼 수 없다. 2 임훈 유산기에 등장하는 계조굴은 지금 오수자굴로 불린다. 그 앞에서 쉬고 있다.
남덕유·무룡산·향적봉은 예로부터 알려져

‘이 산에는 상봉上峰으로 불리는 봉우리가 셋 있으니 황봉黃峰·불영봉佛影峰·향적봉香積峰이다. 나는 어렸을 때, 영각사에 잠시 머물렀을 때는 황봉을 올라가 보았고, 삼수암에 우거하면서 불영봉에 올랐다. 오직 향적봉만은 지금까지 인연이 없어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내려왔다. 세 봉우리 가운데 향적봉이 가장 높으면서 경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내가 한 번도 오르지 못한 것은 잊을 수 없는 한이 되고 있다. 내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두 봉우리를 올랐던 것은 반드시 인연이 있어서인데, 비록 가장 아름다운 경승지라 하더라도 인연이 없었기에 아직 끝을 맺지 못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인생사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이 50세를 넘겨서 이미 몸이 쇠약해진 것을 늦게야 깨닫게 되니 한평생 하나의 한으로 남을 것 같다. 인생사 한낱 보잘 것 없는 한송이 눈과 같지 아니한가?

임자년(1552) 8월에 아우 언성과 효응이 두류산 유람을 계획하고 4, 5명의 동지들을 불러 날짜를 정하고 행장을 꾸렸다. 그 뜻이 매우 독실하고 기백이 매우 대단했는데 나는 슬프게도 몸이 쇠약해진 지 이미 오래되어 부득이 그 약속을 함께 할 수 없는 심정이다. 하지만 향적봉은 가까이 있으니 마땅히 한 번 오르면 좋을 것 같아 한번 오르기로 했다. (중략) 그리하여 삼수암의 승려 혜웅, 성통과 함께 오르기로 약속하고 탁곡암에 만나기로 하였다.’

지금 흔히 알려져 있는 남덕유, 무룡봉의 명칭이 과거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남덕유로 알려진 봉우리는 당시 황봉으로, 무룡산은 불영봉으로 불렸던 듯하다. 남덕유의 황봉은 지금 봉황산으로 알려져 있다. 임훈은 어렸을 때 남덕유와 무룡산은 이미 올랐고, 마음에 품고 있던 향적봉을 50세 넘어서야 그의 고향 거창에서 작정하고 오르기로 결행했다. 지금 평균수명이 80세가 넘었지만 당시엔 50세도 채 안 된 시절에 만 52세의 나이에 향적봉을 올랐으니, 지금으로 치면 80세 이상의 노인이 향적봉 정상을 밟기 위해서 덕유산에서 며칠을 지낸 것이다. 따라 가 본 코스도 만만찮았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힘든 코스를 올랐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가 오른 코스의 지명도 지금까지 전하는 건 거의 없지만 최대한 비슷한 코스를 찾아 갔다.

취재진이 중봉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고 있다.
취재진이 중봉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고 있다.
그는 탁곡암에서 일행을 만나 1박을 한 뒤 장유암→해인사 터→지봉 서쪽 등마루→향적봉 제3계→향적봉 제2계→향적봉 제1계→향적암 앞→하향적암→향적암→판옥→향적봉→지봉→탁곡암으로 다시 돌아온 듯하다. 등산코스는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지만 하산코스는 안개와 구름이 잔뜩 끼어서 그런지 급히 내려간다며 유산기를 마무리해서 어느 코스로 내려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유산기만 보면 정상 향적봉을 제대로 밟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불명확하다. 하지만 ‘안개 낀 상태에서 봉우리에 닿으니 암석으로 만들어진 돌무더기가 작은 돌을 사용해 틈새를 채워 보충해 놓았는데 혹은 제단이 아닌가’라는 묘사를 보면, 지금의 향적봉 정상 비석 주변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을 밟고 한창 주변 산세와 감상을 피력한 뒤 날씨 관계로 부리나케 내려온다. 그가 지나간 코스는 사실상 찾기 쉽지 않았지만 덕유산국립공원사무소 직원 김현정씨와 자연환경해설사 이부영·차도현씨 3명이 동행하며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어느 정도 접근이 가능했다. 길이 없어진 비법정탐방로가 많아 우회하느라 유산기 따라 가는 코스는 더욱 힘이 들었다.

세 명의 공단 직원은 임훈의 유산 코스를 현재의 지명으로, 송계계곡→지봉 가까운 횡경재(지금은 없어진 지봉 방향 샛길 가능성)→능선 따라 구천둔 계곡으로 내려와→오수자굴 동쪽 향적봉 사면 따라 등산→향적봉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지봉으로 올라가는 횡경재 길은 없어진 비법정탐방로이고, 고갯길에서 구천둔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도 없어진 비법정탐방로, 구천둔계곡에서 향적봉으로 올라가는 길도 비법정탐방로다. 다만 백련사 방향으로 올라갔을 가능성으로 봤을 때, 그 길은 개방된 등산로다.

따라서 임훈 유산기 따라 가는 산행은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송계사에서 송계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횡경재에 도착, 송계삼거리인 백암봉까지 갔다가 능선 따라 향적봉을 먼저 밟고 다시 중봉으로 내려와 오수자굴→구천둔→백련사로 가기로 방향을 정했다.

송계사 입구에서 내려 탁곡암을 찾았다. 계곡 사이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가파른 길이라 절이나 암자가 있을 만한 평지를 찾기 힘들다. 송계계곡은 과거의 탁곡암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른다. 거창 토박이 차도현씨는 “동네 어르신들 말씀으로 송계계곡 제일 위쪽 수리덤 부근에 절터 흔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마 그쪽에 탁곡암이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횡경재 올라가는 코스 주변은 화전민이 살았던 석축 흔적이 곳곳에 나온다. 아마 이곳에도 절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봉이나 횡경재는 모두 능선 위에 있다. 가파르게 올라왔다가 잠시 무난한 길로 가는 듯싶더니 다시 능선을 향해서 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유산기 따라 가는 산행취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궁금증은 조선 선비들이 ‘왜 이리 힘든 산을 찾았을까’ 하는 점이다. 산이 그들의 놀이터였을까, 정신적 도량이었을까, 산신의 후손이라서 조상을 찾아가는 심정이었을까, 나름 다양한 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항상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들의 DNA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한반도 후손들이기에 인구 대비 등산인구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 않나 싶다.

공단 자연환경해설사 이부영씨가 임훈 선생이 갔음직한 코스를 설명하고 있다.
공단 자연환경해설사 이부영씨가 임훈 선생이 갔음직한 코스를 설명하고 있다.
임훈은 지봉 넘어 구천둔계곡으로 내려가

임훈 일행은 지봉을 지나서 구천둔계곡으로 내려갔다.
‘골짜기가 끝나고 넘어진 회檜(노송)나무를 타고 넘어 계곡을 따라 가다가 물을 건너니 이곳이 곧 향적봉의 제3계이다. 개울가를 따라 1리쯤 걸어가다 보면 백암봉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모여드는 곳이 있으니, 이곳이 곧 향적봉 제2계이다. (중략) 이 계곡을 따라 산기슭을 행하여 1리 못미처 또 제1계를 건너니 여기가 곧 향적암 앞 아래다.’

과거나 지금이나 송계삼거리 백암봉은 지명이 같은 듯하다. 임훈 일행은 지봉 서쪽에서 사면을 타고 구천둔계곡으로 내려갔지만 우리는 백암봉으로 향하면서 어느 계곡으로 내려갔는지 봉우리를 보면서 가늠하며 올라간다. 송계사에서부터 오르막길만 계속된다. 너무 힘들다.

백암봉, 즉 송계삼거리에서 길이 나뉜다. 백두대간 가는 길과 정상 향적봉 가는 길, 남덕유 황봉 가는 길이 제각각 안내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향적봉을 향해 임훈의 발자취를 찾아서 간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온다. 바람도 거세진다. 덕유산 기상의 천변만화 하는 모습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이날도 그 상태를 여실히 보여 준다. 임훈 선생이 올랐던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오전 내내 햇빛이 쨍쨍 내려쬐더니 점심 무렵부터 순식간에 먹구름에 비 올 듯하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점심 먹을 장소도 마땅찮다. 600년 전 날씨나 지금이나 똑같이 변덕스럽다. 겨우 바람 막을 장소를 찾아 요기하고 다시 출발했다.

‘향목香木은 처음대로 넝쿨로 자라다가 해가 오래될수록 곧게 자라서 성목이 되면 절반은 땅에 눕게 되고, 비록 노목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무의 키는 몇 길에 불과하고 크기도 몇 아름에 불과하다. 나무줄기와 잎은 무리 중에서 뛰어나 만년송 같다. (중략) 이 나무의 지엽枝葉에서는 왜 달리 향기가 없느냐고 물어본 즉 반드시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살게 될 때를 기다려야만 된다고 말을 하니 승려들은 온갖 것에 말들이 많아 가히 우습다.’

임훈의 향나무, 즉 주목에 대한 설명이다. 주목을 향목香木 또는 적목積木이라 하며, 그는 향림이 즐비하게 있으므로 산봉우리 명칭을 향적봉이라 했다고 했다. 향적봉의 유래다. 향적봉은 당시 명칭과 지금 그대로다.

조선 선비들 유산기의 또 하나 특징은 승려들의 안내로 사찰이나 암자에 기거하면서도 절에 대한 안내나 설명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들이 유학자라 그런지 지금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된 마애석각이나 탑 등에 대해서 언급 자체를 아예 하지 않고 있다.

덕유산 주목에 대해서도 미륵부처님 설명을 듣고는 허황된 얘기라며 우습다는 반응은 임훈의 글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라 유산기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다. 불교는 서민종교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진 반면 유교는 학문과 더불어 음풍농월하는 식자층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듯한 분위기다.

‘향나무숲 가운데 옛 우물 둘레의 돌담벽은 틀림없이 옛날 암자가 있었을 때 손질한 것이다. 이 암자가 의지하고 있는 서쪽의 큰 산봉우리가 곧 상봉(향적봉)이다. 북쪽에서부터 동쪽과 남쪽이 넓고 막힌 것이 없어 모든 산들이 다 산 아래에 있다. 지세는 너그럽게 포용하고 넓어 한가롭기는 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그러하지 않으니 도를 닦는 스님들은 참으로 복지福地를 아는 바다.’

아마 향적봉 바로 아래 도착한 듯하다. 향적봉을 서쪽에 두고 있으니 오른쪽 사면 어느 곳에 자리를 잡아 쉬고 있다. 지금은 완전 숲으로 변해 있어 그 흔적을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곳에서 기상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일출과 일몰을 감상한다.

 산 그리메가 너울처럼 일렁이는 덕유산을 배경으로 오르고 있다.
산 그리메가 너울처럼 일렁이는 덕유산을 배경으로 오르고 있다.
“정상 돌무더기는 옛날 천왕당으로 천왕신 모시던 곳”

‘변하고 변하는 산봉우리들이 지나가는 홍운紅雲과 같았다. 북쪽에서부터 남쪽이 온통 일색一色으로 이뤄졌다가 가장 환하던 수도산에서 갑자기 명성을 쏘는 것 같은 붉은빛이 보이더니 희미하게 움직이던 둥근 해가 산꼭대기에서 솟구쳐 나왔다. 참으로 뛰어난 경관이었다. (중략) 석양에 이르자 자욱한 구름이 어지럽게 올라와 남쪽을 비롯한 북쪽 하늘이 캄캄해지니 일선스님이 “이와 같으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럿이 함께 걱정했다.’

먹구름과 햇빛이 오락가락 하는 기상 때문에 일행들은 내려갈까 정상에 오를까를 헷갈려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임훈은 “만약 오랫동안 버티어 견디면 반드시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먹은 마음이다”고 각오를 밝히자 일제히 정상으로 향한다.

‘마침내 신발을 신고 올라가면서 혜웅스님의 안내로 2리쯤 이르러서 산등성이를 돌아 북쪽으로 1리쯤 산꼭대기에 닿으니 암석으로 만들어진 돌무더기가 작은 돌을 사용해 틈새를 채워 보충해 놓았는데, 혹 제단이 아닌가? 그 위에 철마와 철우가 있는데 그 주인은 없다. 혜웅이 말하기를 “이곳은 옛날 천왕당天王堂으로 천왕신天王神을 처음 모시던 곳인데, 이 철물은 그때 제사를 모시던 것이다”라고 했다.

이 봉우리와 아주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이 이주해 와 지리산 상봉을 오가면서도 이 봉우리가 넓고 평평한 것이 너무나 광대하여 산 정상인 것을 알지 못했다. 당 앞 땅을 파내어 만든 연못 주변의 우물 벽돌은 오랜 세월을 묻혀 있다.’

혜웅스님은 산 정상을 숱하게 올랐는지 주변 산세를 아주 자세히 설명한다. 부안, 상주, 구례, 순천, 사천의 산세까지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의 산세에 대한 설명에 임훈은 하인에게 일일이 기록토록 지시한다.

‘무릇 산은 밖과 더불어 안이 있다. 뿐만 아니라 거듭 겹쳐지고 모여지며 가로 질러서 조금도 틈이 없다. 먼 산 밖에도 겹쳐진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만 보이는 것은 구름과 아지랑이뿐이라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살필 수 있는데, 그 모양이 번번이 변하는 것은 곧 구름이고, 그 자리에 멈추어 변하지 않는 것은 곧 산인데 하물며 그 장소와 명칭을 어떻게 다시 분별할 수 있겠는가.’

임훈 일행은 ‘산길이 비탈지고 험하니 모름지기 어둠이 이르기 전에 내려가자’며 서둘러 하산한다. 드디어 구름이 끼고 흐려져 빗방울로 변하기를 거듭하다가 곧 흩어졌다. 이들은 다시 향적봉 제1계, 2계, 3계를 거쳐 내려와, 다시 지봉을 넘어 탁곡암으로 돌아왔다.

취재 일행도 제1계, 2계, 3계를 찾아 지나간다. 계조굴이 나온다.

‘제3계는 구천둔九千屯 골짜기라고 한다. 옛날 이 골짜기에 성불공자成佛功者 구천인이 있었던 까닭에 이름하였는데, 그 터가 있는 곳은 알지 못하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는 “산이 신비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그 터의 동쪽에는 지붕이 있고 남쪽에는 계조굴이 있으며, 북쪽은 칠불봉, 서쪽은 향적봉이 있어 이 골짜기 안에서 나가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으니 가히 기이하다. 이곳이 바로 구천둔이다. 이 골짜기를 자세히 보니 비록 모든 인적이 이르렀던 곳이라 해도 가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이다.’

계조굴은 지금 오수자굴이라고 부른다는 안내문이 있다. 계곡 주변은 너덜지대이지만 그 위로는 비교적 평지가 많다. 구천 명은 아니지만 구백 명 정도는 족히 지낼 만한 공간이다. 앞쪽으로 계곡이 휘어져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다. 적에게 노출될 우려도 없다. 정말 숨어살기 좋은 공간이다. 그래서 구천동이 십승지 중의 한 곳으로 선정됐을 것 같다.

임훈 일행은 ‘날이 저물어 탁곡암으로 돌아왔다’며 끝을 맺고 있고, 취재진 일행은 우회 관계로 백련사를 거쳐 구천동마을로 내려왔다.

이성계가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고
전하는 향적봉 정상 돌
제단에 사람들이 쉬고
있다.
이성계가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고 전하는 향적봉 정상 돌 제단에 사람들이 쉬고 있다.

덕유산 산신

자연산·인신 좌정 흔적 없어…
향적봉 돌제단은 이성계가 산신제 위해 축성설

덕유산의 지명유래를 알 수 없다. 지명의 기원을 알 수 없으니 당연히 산신에 관한 유래도 없다. 임훈이 언급한 정상 비석과 제단에 대한 설명은 이미 덕유산이란 지명과 향적봉이란 봉우리 명칭이 정착됐을 때였다. 하지만 그 이전 고려와 삼국시대에는 어디에도 덕유산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을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또한 덕유산에는 절이나 절에 있는 문화재조차 변변찮다. 국가지정문화재가 한 점도 없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흔히 알려진 덕유산 지명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구천동계곡으로 피신해 왔는데 왜군들이 지나갈 때마다 짙은 안개가 내려 산속에 숨은 사람들을 못 보고 지나쳤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그 안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어, 넉넉한 덕이 있는 산이라 해서 덕유산德裕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 임진왜란은 16세기 말에 발발했다. 덕유산 지명은 고려까지는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시대, 즉 15세기부터 지리지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보다 시기적으로 100여 년 앞서 이미 덕유산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지명유래를 언급하는 건 시기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남한의 12대 명산이라 불리는 산이 어떻게 이렇게 흔적조차 없을까. 덕유산의 과거 명칭 ‘광여산’까지 <고려사>에 뒤졌다. 찾을 수 없다.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 바로 위 적상산이 눈에 들어왔다.

덕유산 백련사 산신도.
덕유산 백련사 산신도.
여기서 덕유산 인접한 북쪽에 있는 적상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상산은 신라가 통일 후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중사·소사로 나눈 소사의 한 곳이다. 당시까지 덕유산보다는 적상산이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로 볼 수 있다. 신라로서는 꼭 점령하고 다스려야 할 지역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권32 잡지1 제사조 소사 20여 곳 중 동로악冬老岳이 바로 적상산이다. 당시 지명은 진례군 단천현. 지금의 무주군 무주읍이다. 일부에서는 덕유산 백암봉 바로 아래 동엽령이라고 하지만 전혀 근거 없다. 동엽령은 무주 안성면과 거창 북상면의 경계로 위치상 맞지 않다. 적상산 안국사에 덕유산권에서 유일하게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한 점이 소장돼 있다. 그만큼 불교문화는 쇠퇴했거나 대접받지 못했던 지역이고, 비로소 조선시대 들어서 명산의 반열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산신제를 기존에 지내던 제전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했기 때문에 기존에 없었던 산신제는 아예 지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덕유산은 이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향토사학자인 김경석 전 무주문화원장과 김내생 현 원장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들었다. “덕유산에서 산신제를 지낸 적이 없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 전 전국 산천을 돌면서 산신제를 지낼 때 덕유산에도 왔었다. 향적봉 돌제단이 이성계가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는 설이 있다. 그에 관한 지명이 일부 남아 있다. 동비날銅碑峴과 밥진골炊餐洞이 그 예다. 동비날은 이성계가 산신기도를 올릴 때 제단을 쌓으면서 쇠로 만든 말과 비를 함께 세워 동비를 묻었던 곳이라 하며, 지역에서는 통빗날이라고도 부른다. 밥진골은 산신기도를 지내면서 산신에게 바칠 밥을 지은 곳이라 한다. 지금 무주리조트 설천 스키하우스 자리다. 관련 전설이나 설화는 전혀 없다. 덕유산의 산신 관련 내용은 이게 전부다.

그렇다면 결국 산신은 권력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산신이 실체가 있다든지, 인신이 좌정한 산은 전부 지방 호족이거나 국가에서 관리한 산이었다. 적상산만 해도 바로 아래 더 높고 아름다운 덕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사로 지정된 데 이어 최영 장군의 흔적이 있고, 조선시대 5대 사고지 중의 하나였던 점 등이 결국 적상산을 본거지로 한 권력이 있었기에 산신이 좌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좀더 많은 시간과 자료를 검토하면 덕유산은 또 다른 산신, 즉 자연신 계통의 산신 좌정 가능성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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