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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12> 송상기 <유계룡산기遊鷄龍山記>] 용과 닭, 산과 물이 휘감는 천하의 명당

월간산
  • 입력 2018.05.1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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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기는 동학사 · 갑사 · 신원사 두루 살펴… “조선 여러 명산에 경관 뒤지지 않아”

금계포란과 비룡승천형이 동시에 지형에 나타난다고 해서 계룡산이 되었다는 계룡산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금계포란과 비룡승천형이 동시에 지형에 나타난다고 해서 계룡산이 되었다는 계룡산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계룡산鷄龍山이 어떤 산인가? 북한산 대신 조선의 진산이 될 뻔한 산이 아니었던가.

한 국가의 수도가 될 뻔했으면 분명 명당은 명당이었을 것이다. 좋은 터는 영적인 기운을 필요로 하는 종교단체들에게는 특히 인기였을 것이다. 한때 계룡산 자락 신도안이 온갖 종교의 집산지였던 때도 있었다. 아쉽게도 계룡대 3군사령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100여개 이상의 종교가 모여 있던 신도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군 시설로 대체됐다. 1980년대 중반 계룡대 건립 이후에도 계룡산 신도안에 있던 많은 무속인과 전통신앙인들이 계룡산 곳곳에 흩어져 기도터를 짓고 생활터전을 조성해 살기도 했다. 지금은 신도안도 사라졌고, 기도처마저 사라졌지만 계룡산은 그대로다.

조선 선비들이 남긴 유산록은 수천여 편이 되지만 계룡산 유산록은 현재 9편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1700년 송상기(1657~1723)가 쓴 <유계룡산기遊鷄龍山記>는 계룡산의 3대 사찰과 주변 암자를 중심으로 풍경과 형체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분석된다.

1699년 충청관찰사로 부임한 송상기는 이듬해 이임할 즈음인 9월 9일부터 10일까지,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5일간의 유산기록을 <옥오재집>에 남겼다. <유계룡산기>는 <옥오재집>권13기記에 나온다. 그는 총 5일간 계룡산에 머물며 사찰 중심으로 계룡산을 왔다 갔다 한다. 첫 번째 방문지는 동학사, 두 번째 갑사, 세 번째는 신원사를 차례로 찾아 주변 암자와 함께 샅샅이 훑어본다.

송상기는 동학사에 들어선 뒤 정각암→상원암→두 개의 탑(남매탑 추정)→천장암→석봉암→(적멸암과 문수암은 가지는 않고 위치만 밝힘) 동학사로 내려와 숙박. 다음날 귀명암→오송대→동학사로 돌아와 회적으로 이동. 19일 갑사→두루 둘러보고 갑사 숙박→옛 절터에 부도와 석탑→사자암→여기서 일행은 둘로 나뉘어 송상기는 고개 넘어 의상암→원효암→대비암→갑사, 다른 일행은 진경암→갑사. 갑사 숙박 후 신원사로.

계룡산을 샅샅이 밟은 그의 동선을 따라가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신 최대한 그가 자취를 남긴 암자를 따라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길로 갔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출범하기 전 1977년부터 계룡산에서 일한 계룡산의 산증인 조성렬 자연환경해설사가 동행하며 송상기의 동선을 자세히 안내했다.

‘골짜기 입구로 막 들어가니 한 줄기 시내가 바위와 숲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혹은 격렬히 부딪히며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혹은 평탄하고 잔잔하게 흐르기도 한다. 물의 푸르기가 하늘빛 같고, 바위색도 푸른 기운이 감도는 흰색을 띠어 사랑스러웠다. 좌우에는 붉은 단풍과 푸른 솔이 마치 그림처럼 이어져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DB 인용

송상기가 동학사를 들어서며 밝힌 첫 분위기다. 그가 계룡산을 찾은 시기는 음력 9월이니 한창 단풍이 물들었을 때였다. 계룡산에는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많아 단풍이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당시에도 수종은 현재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성싶다.

중악단과 성소가 있는 신원사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중악단과 성소가 있는 신원사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송상기는 동학사를 ‘洞壑寺’로 표기

답사 가기 전날 봄을 재촉하는 많은 비가 내려 다음날 비가 계속 내리면 어쩌나 마음 졸였는데 다행히 비는 그쳐 날씨가 어느 때보다 맑았다. 불어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물소리에 마음을 씻고 계룡산에 들어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일종의 세심천洗心川이다.

송상기는 동학사에 들어가 이리저리 계룡산의 풍광을 감상하다가 뒤쪽 암자로 향한다.

여기서 잠시 동학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상기는 동학사를 ‘洞壑寺’로 표기하고 있다. 골짜기 사이에 있는 절의 개념으로 ‘洞壑寺’를 쓴 것으로 보인다. 지금 현재는 ‘東鶴寺’. 동서로 길쭉하게 계곡을 따라 늘어서 자리 잡은 동학사의 구조를 보면 ‘洞壑寺’라 해도 별 무리는 없다. 하지만 송상기 유산록 외에 어느 공식적인 기록에 ‘洞壑寺’로 표기한 문집은 없다.

동학사의 애초 명칭인 ‘청량사淸涼寺’는 맑고 서늘한 절이란 뜻이다. 계곡 바로 옆에서 동서로 뻗어 있으니 항상 서늘했을 것 같다. 이름만으로 볼 때는 여름산행이 제격인 셈이다. 지금 각각 보물로 지정된 계룡산 남매탑(공주 청량사지 오층석탑과 칠층석탑)의 명칭은 동학사의 옛지명에서 유래했다. 동학사는 고려시대까지 청량사란 명칭을 계속 사용했다. 조선 태조가 절을 대폭 확장하면서 ‘동쪽에 학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東鶴寺’로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라 성덕왕 23년(724) 상원조사가 터를 닦고 회의화상이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청량사란 명칭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남매탑 전설은 상원조사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다.

계룡산에는 특히 불교문화가 번성했다. 서쪽의 갑사, 남쪽의 신원사, 북쪽의 구룡사 등의 사찰이 크게 발전했다. 큰 절로서 동쪽의 동학사가 마지막으로 창건되어 계룡산 4대 사찰로 유명했다. 따라서 백제시대에는 불교문화의 성지로서 특징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산에 가면 남한의 어느 산보다 많은 절이나 암자 터가 남아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 들어 북쪽의 구룡사가 폐사됐다.

그런데 남쪽의 신원사에는 계룡산신에 제사하는 중악단, 동학사에는 삼은각三隱閣, 동학사東鶴祠 등이 있어 계룡산에 우리 전통 산악신앙과 불교, 유교문화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사실은 큰 특징이다.

‘정각암은 절 뒤에 있는데 매우 높고 험했다. 암자에는 두어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정실이 깨끗했다. 상원암은 또 그 위에 있었는데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암자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바위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깎아지른 듯 솟아 계룡산의 여러 산등성이들이 모두 발 아래로 보였다. (중략) 암자는 옛날 건물과 새 건물이 함께 있고, 옛날 건물 앞에는 두 개의 탑이 서 있었다. 탑 앞에 누대가 있는데, 그 주위는 비로 쓴 듯이 깨끗했다.’

보물로 지정된 남매탑 뒤로 계룡산의 암벽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남매탑 뒤로 계룡산의 암벽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다.
가는 곳마다 암자 터… 불교문화 번성한 듯

가는 곳마다 암자가 등장한다. 사실 계룡산은 지리산만큼 넓지도 않은데 이 정도의 암자가 등장할 정도면 단위 면적당 암자 수는 전국 최고에 꼽힐 정도다.

유산기에 언급된 정각암 터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석축이 제법 넓은 면적을 감싸고 있다. 주변엔 기와도 제법 널려 있다. 절터는 분명한 듯하다. ‘옆 계곡에 물이 있는데 왜 폐사됐을까’ 등등 세월을 넘어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다 상원사를 찾아 올라간다. 그 길은 송상기가 300여 년 전에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각암 폐사지에서 상원암까지는 현재 탐방로와 비슷하다. 가는 길은 돌길의 연속이다. 과거에도 돌이 많았을 텐데 송상기는 이 길도 견여를 타고 갔을까. 타는 사람은 편해도 가마를 메는 사람은 이만한 고통도 없을 것이다.

남매탑이 있는 상원암에 이르렀다. 남매탑은 청량사지 오층석탑과 청량사지 칠층석탑으로 명명되어 있다. 행정구역도 공주다. 탑 앞은 낭떠러지인데 유산기에는 누대가 있었다고 나온다. 탑의 위치가 조금 옮겨졌을까? 알 수 없다. 남매탑 옆에 상원사를 한창 복원 중에 있다.

송상기는 전날 상원암에서 천장암을 거쳐 석봉암까지 갔다.

‘석봉암石峰庵은 (천장암) 그 아래에 있었는데 물과 바위가 대단히 아름다웠다. 맑은 샘물이 콸콸 흐르니 그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으며, 절의 단청이 계곡에 비치어 찬란하였다. 석양이 산에 걸려 있어서 울긋불긋한 만 가지 경관을 연출하자 아득히 돌아갈 생각을 잊어 버려 땅거미가 지는 줄도 몰랐다.’

송상기는 동학사에서 올라와 다시 동학사로 원점회귀 유산을 하고 있고, 답사팀은 갑사로 넘어갈 길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 이제부터 방향이 다르다. 오히려 송상기가 다음날 갑사에서 올라온 길을 역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계룡산 봉우리와 능선 사이 짙은 안개가 내리고 안개가 걷히는 순간을 기다려 진달래가 잠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계룡산 봉우리와 능선 사이 짙은 안개가 내리고 안개가 걷히는 순간을 기다려 진달래가 잠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삼불봉은 인수봉 축소판 보는 듯

상원사에서 귀명암, 지금 심우정사로 가는 길은 비법정탐방로다. 조성렬씨의 안내로 길을 찾아 간다. 승려들이 다니던 길인지 길의 윤곽은 살아 있다. 하지만 길이 험하다. 뒤로는 삼불봉이 우뚝 솟아 있다. 삼불봉은 인수봉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정기精氣가 넘쳐 한때 삼불봉 기도터는 계룡산에서 제일갔다고 조씨가 설명했다.

귀명암歸命庵은 지금의 심우정사尋牛精舍. 바뀐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두 명칭 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삼보三寶로 돌아가 몸과 마음을 불도에 의지한다는 귀명이나 마음의 소를 찾아 정진한다는 심우정사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차이가 나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벼랑을 따라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뒤엉켜 우거져 있었다. 험한 고개를 하나 넘으니 계룡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뒤쪽에 귀명암이 있는데 비교할 곳이 없을 만큼 높고 가팔랐다. 앞마루에 앉자 기이한 봉우리와 높은 절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으니 계룡산의 참 모습을 단번에 다 살필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숲과 골짜기에 단풍잎이 무성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였다. (중략) 오송대五松臺는 서봉의 정상 부분에 있으니 예전에 송담 할아버지께서 노닐던 곳을 볼 수 있었다. 옛날에는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상원암에서 귀명암 가는 길, 귀명암에서 오송대 가는 길은 모두 비법정탐방로다. 너덜지대이거나 경사가 심해 조심해야 한다. 중간에 조그만 계곡이 하나 나온다. 널찍한 바위도 하나 있다. 조씨는 “공단에서는 이곳을 오송대라고 하는데 조금 더 가면 정말 오송대가 나온다”며 길을 안내한다.

너덜지대를 지나 능선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이 완만하게 솟아오르듯 동그란 평지를 만든 터가 있다. 완벽한 대臺의 형세를 하고 있다. 산의 기운도 만만찮다. 정말 명당 터 같아 보인다. 조씨는 이곳을 오송대라고 가리킨다. 정말 오송대같이 보인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물이 보이질 않는다. 조씨는 옆을 가리키며 “옛날에는 저기에 샘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이곳이 오송대로 추정된다. 하지만 다섯 소나무는 온데간데없다.

1 조성렬씨는 “공단에서는 너덜지대 계곡의 넓은 바위를 오송대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2 사자암, 지금 신흥암 주변 암벽에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구곡을 석각으로 새겨 놓았다.
1 조성렬씨는 “공단에서는 너덜지대 계곡의 넓은 바위를 오송대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2 사자암, 지금 신흥암 주변 암벽에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구곡을 석각으로 새겨 놓았다.

신라시대 가장 번성한 절이 갑사

이젠 삼불봉으로 넘어가서 갑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신라시대 가장 번성한 절이 갑사. 계룡산에서도 으뜸이었다. 갑사는 옛 기록에 ‘岬寺’ 혹은 ‘鷄龍岬寺’로 나온다. 지금은 ‘甲寺’다. 추정컨대, 원래는 산허리에 있다고 해서 ‘岬寺’라고 했는데, 세월이 흘러 신라 이후 가장 번성한 절을 알리려 ‘甲寺’로 바꾼 게 아닌가 여겨진다. 삼국 통일 이후 특히 화엄종 사찰로서 번성했다.

창건설도 다양하다. 신라 눌지왕 4년(420)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전설과 신라 진흥왕 17년(557) 혜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백제지역에서 신라 인물이 정말 창건했을까 의문이다. 또 다른 설로는 신라 문무왕 19년(679) 의상이 중수하고 초엄대찰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그럴 듯하나 관련 유물이나 자취, 전설은 전혀 없다.

송상기는 갑사에서 출발했지만 답사팀은 동학사에서 계속 넘어오는 길이라 유산기의 글 순서와는 반대 방향이다. 금잔디고개를 넘어 진경암과 사자암으로 향한다. 송상기는 의상암과 원효암이 있는 고개를 넘어 다시 갑사로 내려왔다. 그는 “특별히 볼 것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진경암으로 향한 일행은 “경치가 깊고 맑아 계룡산에서 가장 좋았으며, 폭포 또한 최고로 아름다웠다”고 자랑한다. 송상기는 다른 계곡으로 간 것을 한스러워한다. 조씨는 나름대로 파악한 계곡을 가리키며, 한쪽은 송상기, 다른 쪽은 다른 일행이 갔다고 말한다.

곧이어 사자암이 나온다. 계룡산에 절이나 암자가 정말 많다. 사자암은 지금의 수정봉이다. 바위 끝이 수정같이 우뚝 솟았다고 해서 개명했다. 암자 이름도 신흥암으로 바뀌었다.

‘사자암은 계룡산 뒤쪽 봉우리의 가장 높은 곳에 었었다. 온통 돌로 이루어진 봉우리는 대단히 괴이하고 장엄하여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 앞에는 깎아지른 벼랑에 층층의 폭포가 대여섯 길이나 되었지만 물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 암자에는 몇 명의 승려가 있었다. 동쪽 산기슭 한 줄기의 우뚝한 곳에 누대를 지었는데, 산 밖으로 은진恩津, 석성石城, 임천林川, 한산韓山의 큰 들판과 먼 산이 눈 아래 뚜렷하게 보였다.’

사자암, 지금의 신흥암 바로 아래 천진보탑이 있다. 아주 오래된 연혁을 가졌다고 안내하고 있으나 송상기 유산기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그럴 듯한 스토리를 갖다 붙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바위에 스토리, 아니 감성을 불어넣으니 많은 사람들이 심성을 움직여 그 바위를 보고 끊이지 않게 치성을 드린다. 그게 세상사다.

송상기는 갑사를 두루 살펴본다.

‘절 앞으로 시내가 모여 못 하나를 이루었는데 맑고 투명하여 거울처럼 비춰볼 수 있었다. 못 옆의 큰 바위는 위가 평평하여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절의 누각은 높고 웅장하였다. 겹겹의 봉우리와 높다란 숲이 사방을 에워싸 깊고 고요하였다. 양쪽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절 앞에서 합쳐져 흐르는데 물과 바위가 대단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구경할 만했다. 서남쪽 봉우리 아래에 암자가 하나 있는데 노란 잎과 푸른 숲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송상기는 갑사로 돌아와 다시 신원사로 향한다. 하지만 답사팀은 일정상 여기서 마칠 수밖에 없다. 신원사는 문헌에 기록된 내용으로 대체한다. 신원사의 원래 명칭은 ‘神院寺’지만 지금은 ‘新元寺’로 쓴다. 과거의 명칭은 제사처 또는 성소聖所로 여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계룡산사와 중악단이 신원사에 있는 이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651) 고구려의 보덕화상이 연개소문의 도교장려로 인한 불교박해를 피하기 위해 백제에 들어와 창건했고, 아울러 이 사찰은 보덕화상이 연 열반종에 소속된 도량이라고 전한다.

송상기는 계룡산 3대 사찰을 두루 둘러보고 역시 명산으로 평가를 내린다.

‘계룡산은 쉽게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경치이다. 비록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것은 소홀히 여기고 멀리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지금까지 이곳 명승지를 탐방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였지만 보기 좋은 아름다운 경치는 조선 땅에 있는 여러 명산에 뒤지지 않는다. 산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행함과 불행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애오라지 이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찾아와 유람하는 사람에게 전한다.’

조선 선비가 남긴 계룡산과 조선시대 지리전문가인 이중환이 <택리지>에 남긴 계룡산을 한 번 비교해 보자.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바위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또한 맑다. 또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큰 힘이 있다. 이와 같은 곳은 우리나라에 4곳이 있으니 개성의 오관산, 진잠의 계룡산, 한양의 삼각산, 문화의 구월산이다. (중략) 계룡산은 웅장한 것이 오관산보다 못하고, 수려함은 삼각산보다 못하다. 전면에 또 수량이 부족하고, 다만 금강 한 줄기가 산을 둘러 돌았을 뿐이다. 무릇 회룡고조라는 산세는 본디 힘이 적다. 그러므로 중국 금릉을 보더라도 매양 한편의 패자 노릇하는 고장으로 되었을 뿐이다. (중략) 내맥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를 함축하였다. 판국 안 서북쪽에 있는 용연은 매우 깊고 또 크다. 그 물이 넘쳐서 큰 시내가 되었는데 이것은 개성과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 산 남쪽과 북쪽에 아름다운 시내와 바위가 있다.’

계룡산은 역시 북한산에 버금가는 명산이라는 결론이다.

계룡산 쌀개봉 동릉에서 뒤돌아 본 황적봉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계룡산은 높지는 않지만 암벽지형이라 위험한 구간이 자주 있다.
계룡산 쌀개봉 동릉에서 뒤돌아 본 황적봉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계룡산은 높지는 않지만 암벽지형이라 위험한 구간이 자주 있다.

송상기의 <유계룡산기遊鷄龍山記>
1760년 <옥오재집玉吾齋集> 권13 記에서 발췌

余嘗聞洞壑寺之名,而未得一覽。八月念後,持卿携煥輩往遊,書報其水石庵寮之勝,心益嚮往。重陽日作省行,仍自孔巖,轉往訪焉。初入洞口,一派溪流,瀉出巖藪間,或激觸噴薄,或平鋪潺湲,色靑若空,石色亦蒼白可愛。左右楓丹松翠,點綴如畵。

入寺則鷄龍石峰,拔地磅礴,森立羅列,或如獸蹲,或如人立。寺居衆峰之間,面勢窄隘。寺前水石尤佳,懸而爲小瀑,匯而爲澄潭。淨覺庵在寺後,絶高且險,庵有數僧,淨室瀟洒。上院庵又在其上,而處於絶頂。庵後石峰千丈,削立如屛,鷄岳群巒,盡在脚下。東南兩面,千峰萬岫,簇簇於雲霄間,目力不及,莫辨爲何地何山也。庵有新舊兩構,舊庵前,竪雙㙮。㙮前有臺,淨潔如掃。自淨覺到此可數里,砯崖斗絶,步步欹危,攀藤捫葛,僅通人跡。一老僧守庵。自㙮臺循巖而下,甚危仄不能輿。踰一嶺,行四五里許,此乃鷄山後麓走散處,山形無奇,仍訪天藏庵,庵側石路陡斷,僅步而過,到此山勢稍下,庵亦無異觀。石峰庵在其下,水石最佳,淸泉㶁㶁,響穿林薄,精藍丹碧,輝暎澗谷,夕陽在山,紫綠萬狀,悠然忘歸,不知暝色之近也。寂滅、文殊兩庵,又在其上,而日暮未及見。過一小峙,歸宿寺中。

初十日,早朝,往訪歸命庵,緣崖有小逕,松櫟交蔭,度一峻峙,庵在鷄山第一峰後,高絶無比。坐於前軒則奇峰峭壁,指顧皆是鷄龍眞面目,一覽盡收,千林萬壑,丹葉紛披,眞佳境也。庵有小記,“崇禎甲辰,碧巖撰”云,未知誰人也。五松臺,在西峰絶頂指點,可見松潭祖考遊賞之所也。舊有庵今廢。日晩到寺,仍向懷川。是行,公牧鄭堥、營將尹淑、成歡察訪宋道錫隨之,沔川從兄及翼卿氏兩人,亦來會。

洞壑之遊旣訖,又聞甲寺在山外,以巨刹名,遊興不可遂已。十九日,自懷川歸路,踰九峙往訪。山回路轉,間有山村,石田茅屋,亦自淸楚。路傍有寺基,古稱玉山寺。前帶溪流,往往有佳處。行十餘里,卽甲寺洞口也。千章老木,蔭列左右,天日爲之礙。

寺前溪水,匯作一潭,淸澈可鑑。有一巨石臨潭,頂平可坐。寺樓宏敞高爽,疊嶂穹林,四圍幽邃。兩傍溪水,到寺前合流,水石雖非絶奇,亦頗可玩。有一庵在西南峰下,隱暎於黃葉靑林之間,望之如畵。寺東新創佛殿,藏置經板甚多。其前鐵㙮,高三十三節,不知何代所創,而製作功役,殆非近世所有。夜宿東寮。公牧及持卿、煥兒輩會話,亦有絲竹肉各一。蓋余於莅任後,一切不近,麻谷之遊,余謂同遊者曰“今日則雖有一琴一歌,也亦不妨”云,主牧聞此言而携來也。夜深月色如晝,樓影山翠,光景尤奇。

明早周覽殿宇,繚繞排布,不翅蜂房之開戶也。僧言上獅子庵最可觀,遂肩輿而行。崖路盤回,或高或低,松杉楓竹,夾路交暎,落葉覆逕,不見一塵。行數里,有古寺基,浮圖石㙮在焉。自此山益高路益險,庵卽鷄山後嶽最高處也。峰皆石色,奇壯怪偉,令人愕眙。前臨絶壑,層瀑可五六丈,而水勢幾斷。庵有數僧。東麓一支,斗起作臺。山外恩、石、林、韓,大野遠山,歷歷在眼下矣。眞境庵在獅子、義相兩庵間窮奧處,石路難通云。故余則踰一嶺,直向義相,持卿輩則轉向眞境,來言“其幽深淸絶,甲於一山,瀑流亦最勝”云,恨未與偕也。義相別無他觀,前有一臺,古木參天,可以盤旋徘徊。元曉庵又在數三喚地,萬壑蒼翠,皆集于此。東崖有懸瀑,散布層巖而下,水不甚大,石不甚白,而“若値雨漲,則頗壯”云。此溪卽寺之東邊水也。沿溪至寺,幾五里許,大悲庵在其間。自元曉以下,洞壑巖水,亦多娛悅處。

朝飯後,仍往神院寺,距甲寺十餘里也。姨兄李金堤 叔器氏、公牧,竝來會。寺樓頗明爽,而寺在鷄龍外麓。前帶平野,卑湫淺俗,無足開眼,寺後有數庵可觀,寺東水石亦佳云,而歷探已多,興闌遂止。初欲自此轉尋龍湫、鳳林之勝,適聞新伯行期迫近,難於迤留,乘夕還營。持卿輩則留宿寺中,明將往訪,分携之際,不獨惜別之恨而已。

仍念余平生非不癖於山水,名山衆刹,近在按部之內,而簿書勞汩,未暇及此。今幸偸得餘閒,能辦數日之遊,宿願忻始副者,正謂此也。又其溪山景物,亦自難得,雖人情忽近貴遠,前後濟勝者,足跡罕到,而其佳觀勝致,不必遽遜於域內名山,山之遭遇,亦有幸不幸而然耶聊記之,以詒後之來遊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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