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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돌로미티 전투 현장] 105년 전, 고산 전투의 현장을 가다

글·사진 임덕용 꿈속의 알프스등산학교
  • 입력 2020.09.22 09:49
  • 수정 2021.02.0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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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군용 터널을 따라 오르는 등반 코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터널로 들어가기 위해 라가주오이 정상에서 8부 능선의 참호 지대로 내려가고 있다. 멀리 우측으로 솟은 거벽이 치베타 북벽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터널로 들어가기 위해 라가주오이 정상에서 8부 능선의 참호 지대로 내려가고 있다. 멀리 우측으로 솟은 거벽이 치베타 북벽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오스트리아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테의 거대한 벽 정상을 대부분 점령했다. 돌로미테의 험악한 바위 산세는 탁월한 요새이며 장벽 역할을 했다. 대치 상태였던 이탈리아 산악 부대는 라가주오이 남쪽 경사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필자의 딸 유리가 하산 중 팔자레고로 가는 표지판을 바닥에서 주워 장난스럽게 들었다.
필자의 딸 유리가 하산 중 팔자레고로 가는 표지판을 바닥에서 주워 장난스럽게 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주변 모든 산꼭대기에 진지를 꾸리고 있었다. 고산 거벽인 돌로미테 상부에 터널을 파서 철통같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군이 공격을 위해 벽 아래 달라붙자 오스트리아 군은 벽에 3개의 폭발물을 설치해 터뜨렸다. 그중 가장 강력한 폭발물로 이탈리아 군 머리 위 200m 높이에서 벽을 폭파시킨 것.

폭발물로 인한 낙석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이탈리아 군은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1917년 6월 피콜로 라가주오이Piccolo Lagazuoi(작은 라가주오이)봉의 벽에 1km의 터널을 파고 들어가 오스트리아 군 터널 침투에 성공했고, 33㎏의 폭발물을 터뜨렸다. 이때 생긴 분화구 같은 거대한 웅덩이는 팔자레고 고개Passo Falzarego에서도 보인다. 전쟁의 상흔인 것이다.

하산하는 벼랑길 우측으로 아브레이봉과 누볼라우 정상이 보인다.
하산하는 벼랑길 우측으로 아브레이봉과 누볼라우 정상이 보인다.

1915년 5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21개월 동안 벌어진 돌로미테 전쟁 중 가장 유명한 전투였으며, 두 나라의 유명한 클라이머들과 산악인들이 자국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진 현장이다. 이렇듯 돌로미테는 단순히 등반 대상지가 아닌, 살아 있는 전쟁 박물관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고산 격전지로 유명한 라가주오이Lagazuoi는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코르티나 담페초는 이탈리아 북부의 해발고도 1,200m에 이르는 고산도시로 돌로미테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휴양도시다.

멀리 맞은편 벼랑길에서 하산하는 사람이 개미처럼 작아 보인다.
멀리 맞은편 벼랑길에서 하산하는 사람이 개미처럼 작아 보인다.

코르티나에서 볼자노와 카나제이로 넘어가는 길에 팔자레고 고개가 있다. 이곳에 서면 우청룡 좌백호를 만나게 된다. 우측에는 토파나Tofana와 라가주오이의 위용이, 좌측에는 친퀘토리Cinque Torri, 아브레이Avrei, 누볼라우Nuvolau봉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전쟁의 상흔이 담긴 터널은 등반 가능한 관광 코스로 개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용 터널을 내려가는 것을 선호하지만, 터널 내부는 매우 어둡고 습하며 돌계단에 물이 고인 곳이 많아 미끄럽다. 그래서 터널을 올라가는 것이 등산의 묘미를 살려 주지만 생각보다 무척 힘들다. 터널 안의 90%에 이르는 공간은 빛이 들지 않는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헬멧에 헤드램프를 장착하고 입장한다. 터널 한편에는 굵은 와이어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등반을 도와준다.

터널 안은 급경사로 이뤄져 있어, 계단과 와이어 로프가 고정 되어 있다. 헬멧과 헤드램프는 의무 착용이다.
터널 안은 급경사로 이뤄져 있어, 계단과 와이어 로프가 고정 되어 있다. 헬멧과 헤드램프는 의무 착용이다.

온 가족이 함께한 역사등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 간 딸 유리가 8년 만에 돌아왔다. 생명공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의대 6년 과정을 4년 만에 조기 졸업한 후 휴가 차 집을 찾았다. 유리는 고향인 이탈리아 볼자노에 오면 산으로만 다니는 아빠(필자)와 함께 스키와 클라이밍을 즐긴다. 덕분에 필자는 딸이 집에 오면 더 신명이 난다.

모처럼 가족 등반에 나선 유리가 터널을 오르며 즐겁게 웃고 있다.
모처럼 가족 등반에 나선 유리가 터널을 오르며 즐겁게 웃고 있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4박5일간 산 속 깊은 곳의 호텔에 숨어 지내며 시원한 휴가를 보냈다. 아들 동근(뮌헨대 재학)은 군 복무 의무자는 아니지만 한국의 해병대 복무를 희망하는 튼실한 청년이 되었다. 역사와 정치외교를 복수전공하는 동근에게 라가주오이 격전지 터널 등반은 최고의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세계 전쟁사를 훤히 들여다보는 아들에게 역사 공부가 될 것 같았다.

팔자레고 고개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라가주오이 중턱까지 올랐다. 아내는 라가주오이 산장 위의 정상까지 혼자 산행을 하고, 우리 3명은 헬멧에 헤드램프를 장착하고 3시간의 터널 등반에 나섰다. 터널 안은 생각보다 훨씬 습했고, 물기가 벽 천장에서 흘러내려 나무와 돌로 만든 계단을 적셔 매우 미끄러웠다. 다행인 것은 적에게 대포와 기관총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돌로 만든 창문으로 가끔 빛과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만든 지 105년 된 터널이다. 바닥에 흐르는 물도 105년 동안 흘러내린 물이라 미끄럽다.
만든 지 105년 된 터널이다. 바닥에 흐르는 물도 105년 동안 흘러내린 물이라 미끄럽다.

터널 안의 나무로 만든 진지에는 여러 설명이 붙어 있었고, 당시 사용된 무기를 박물관처럼 전시한 곳도 있었다. 급경사의 등산로에는 당시 사용하던 녹슨 철망과 참호들이 길게 폐허처럼 널려 있어 마치 우리나라 DMZ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오스트리아 군이 사용하던 대형 병원은 앙상한 벽만 남아 있었다. 환자를 위한 것인지 돌로 만든 욕조가 썰렁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고산 산악전투에서는 총알이나 포탄에 맞아 전사하기보다는 추위, 굶주림, 등반 중 추락과 눈사태로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탈리아 군 1,200여 명이 눈사태로 몰살당한 곳이 있으며, 이 중 700명 이상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춥고 습했을지, 얼마나 배고프고 목이 말랐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고향의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팔자레고 라가주오이 정상의 돌로 만든 참호. 라가주오이와
토파나 같은 엄청난 암봉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팔자레고 라가주오이 정상의 돌로 만든 참호. 라가주오이와 토파나 같은 엄청난 암봉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105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듯한 등반이었다. 여러 의미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구상에서 전쟁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6·25전쟁 후 아직도 휴전 중인 우리나라에겐 더욱 간절한 소망이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고지대에서 벌어진 극적인 전쟁을 배울 수 있는 이 루트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의 노력으로 1997~2004년 사이에 거의 모든 터널과 등산로가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산 전체가 살아 있는 야외 박물관이다.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서라도, 코르티나를 방문한다면 꼭 가보아야 할 등산로다. 

길은 터널로 들어갔다가 벼랑길로 나오기를 반복한다.
길은 터널로 들어갔다가 벼랑길로 나오기를 반복한다.

라가주오이 전쟁 터널 코스

시작 지점 팔자레고의 라가주오이 케이블카역(2,107m)

도착 지점 팔자레고의 라가주오이 케이블카 정상(2,746m). 케이블카 정상에는 미니바가 있으며 2층에는 전시장이 있다. 도보 5분 거리에 라가주오이 산장이 있다.

등반 시간 2시간 30분~3시간 30분 소요.

필수 장비 방수력과 접지력 좋은 등산화, 와이어로프를 잡고 오르내릴 때 손을 보호할 장갑, 헬멧, 헤드램프. 케이블카 매표소 아래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헬멧과 헤드램프를 비롯한 등반장비를 대여해 준다. 대여료는 헬멧 6유로, 헤드램프 6유로.

등반 시기 가장 좋은 시기는 5~10월.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세계대전 격전지를 도는 ‘지로 델라 그란데 궤라Giro della Grande Guerra’가 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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