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의 산 이야기] 이 드넓은 꽃밭, 우주에서도 보인다

글 신영철 산악문학가 사진 정임수 시인
입력 2022.05.16 10:16
미국 캘리포니아 랭커스터 야생양귀비 보호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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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바다 중간에 멈춰 있는 관광객의 차와 비교하면 야생 양귀비(파피) 꽃밭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금영화라고도 불리며 마약 성분은 없다.
세상에! 이런 거대한 꽃밭이 존재하다니. 평생 이런 꽃천지를 본 적이 없다. 정말 미국은, 땅과 사람 코만 큰 게 아니다. 오랜 여행 파트너인 정임수 시인을 앞장 세워 찾은 야생 양귀비인 파피꽃 군락지 첫인상이 그랬다.

캘리포니아 앤틸로프 밸리에 위치한 파피 보호구역Antelope Valley California Poppy Reserve이 바로 그곳. ‘파피(야생 양귀비)가 피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고 정 시인을 재촉해 차를 달렸다. 조급증에 길을 나섰으나 마지못해 따라나선 정 시인은 부정적이다. 아직 기대한 만큼 꽃 개화가 안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

2년 전 정 시인의 안내 덕에 처음 만났던 꽃바다는 가히 충격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때의 감동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사막의 짧은 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매년 봄 사막에 피는 파피꽃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아차!”하면 지나가는 짧은 개화기를 맞춘다는 게 쉽지 않았다.

모든 게 인연이 닿아야 하듯 코로나 사태 속에도 환하게 핀 파피를 만났을 때의 감동. 고맙게도 그해는 꽃폭탄과 동의어인 ‘슈퍼 블룸Super Bloom’이라 했다. 모든 미디어들이 다투어 슈퍼 블룸을 전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찍어 공개한 꽃바다 사진도 보였다. 얼마나 크면 우주에서도 꽃밭이 보일까. 사진으로는 실감할 수 없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보며 깜짝 놀랐다. 조물주가 일부러 선홍빛 물감을 사막에 쏟아 부은 건 아닐까? 그때 정 시인은 지평선까지 점령한 꽃바다를 보며 ‘꽃평선’이란 신조어도 생산해 냈다는 기억. 드디어 방문자센터가 보인다. 안내소 주차장에 10달러를 내고 차를 세운다. 꽃구경 나온 차량들이 북적여 한참을 기다린 후에 주차할 수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지요? 아직 일러 꽃이 만개하지 않았네요.”

그 말은 반쯤 맞고 반쯤 틀렸다. 그건 2년 전 풍경과 비교해서 그럴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금도 충분히 크고 아름답다. 요세미티나 시에라산맥 산행을 위해 지나쳤던 모하비사막의 황량함. 그걸 잘 알고 있는데, 황금빛 파피꽃(금영화라고 불린다)은 요술처럼 이제 사막을 붉게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는 모하비사막의 특산물 파피꽃을 1903년 주꽃州花으로 지정했다. 아직 지평선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금영화가 봄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게 참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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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양귀비 보호지역을 관할하는 레인저스테이션. 방문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황금잔 닮은 금영화

우리는 잘 만들어진 트레일을 따라 걸었다. 우리처럼 서둘러 온 사람들이 많다. 어느 매체인지 대형 카메라로 촬영을 나온 취재 모습도 보인다.

“정 시인, 만개한 파피도 아름답지만 지금처럼 꽃잎을 열기 직전의 봉오리 모습도 감동이네.” 

꽃잎을 열기 전 파피꽃 봉오리는 촛불을 닮았다. 촛불이 지금 들불처럼 사방으로 번지는 중이다. 활짝 핀 꽃을 살피면 넉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막에 살던 인디언들 전설이 있어요. 조물주가 사막 추위를 쫓기 위해 불꽃으로 이 꽃을 보냈다는 거지요. 스페인이 식민지로 통치할 때는 이 꽃을 ‘카파데로Capa de ro’라고 불렀다는데, 그건 ‘황금’으로 만든 ‘잔’이란 뜻이에요.”

정말 그러고 보니 활짝 핀 꽃은 술잔, 봉오리들은 촛불로 보인다. 4장의 꽃 잎사귀가 모여 배가 볼록한 와인글라스 형상을 연출한다. 꽃잎이 바람을 맞아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하늘거린다. 황금잔이 무시로 흔들리며 일렁이는 천상화원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잘 왔다. 지금 진홍색이 부드러운 구릉을 뒤덮고 습자지에 물감이 배듯 번져 꽃평선이 되어 가는 과정.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면 정말 시나브로 들불이 사방으로 번져가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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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 군락지에 도착하기 전인데도 성격 급한 관광객들이 차를 세우고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꽃 탐방은 볕 좋은 오전이 좋다고 하네요. 따뜻한 햇볕에는 꽃잎을 열지만 바람이 세게 불거나 흐린 날에는 꽃잎을 닫는 답니다. 번식을 위해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기 위한 꽃의 ‘모성애’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미모사도 아니고 춥다고 파피가 꽃잎을 오므린다? 파피꽃 밭과 자세히 눈을 맞추다 보니 정말 새침하게 꽃잎을 닫은 꽃도 더러 보인다. 참으로 오묘한 진화의 결과물.

“정 시인은 모르는 게 없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꿰고 있는 거야?”

“아까 들렀던 안내소에 그렇게 쓰여 있던데요? 레인저스테이션이야말로 자료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어요.”

당연히 영어로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을 봤다. 공연히 물어봤다. 어쩌다 그걸 즉석에서 번역해 낼 실력이 모자란다는 자기 고백이 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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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에서 기다리다 조건이 맞으면 폭발하듯 한꺼번에 개화하는 파피꽃Poppy. 야생 양귀비 또는 금영화라고 국내에서 부른다.
사막에서 파피꽃이 사는 방법 

트레일에서 나와 우리는 차를 몰고 꽃바다를 달렸다. 당연히 비포장도로. 홍해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꽃바다가 갈라지고 있다는 착시 속 드라이브. 구릉에 올라서자 광활한 파피 보호구역이 지평선까지 이어진다. 

엄청난 크기의 벌판에 활짝 핀 파피꽃들만 보인다는 생경함. 꽃이 붉은 파도가 되어 봄바람에 넘실대고 있었다. 사막의 본 면목이 누런 색감의 황무지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처럼 꽃밭을 가르며 달리는 사륜구동차들이 많다. 화려한 꽃길을 가르마처럼 가르며 달리는 기분 좋은 비밀을 저들도 안 것 같다. 

“기분이 묘한 걸. 멀미가 나는 것처럼 아득해지기도 하고. 정 시인은 괜찮아?”

호사스러운 꽃길 드라이브를 하며 뜬금없이 든 생각이었다. 발칙하고 농염한 꽃길을 걷고 달리다 보니, 정말 꽃향기 때문인지 어지럽기도 했다. 꽃 중의 꽃, 양귀비 꽃바다의 화려하고 나긋한 세상에 파묻힌 시간. 문득 파피가 양귀비와 같은 과라던데, 어질 머리가 혹 아편 성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설핏 스쳤다.

“파피에는 애당초 아편 성분이 없습니다. 너무 많은 꽃을 봐서 그래요. 그런 걸 꽃멀미라고 해요. 생각보다 올해 파피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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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모하비사막의 봄은 짧은 한 철 파피꽃으로 붉게 물든다.
오늘 신조어를 정 시인에게 많이 배운 날이다. 꽃바다, 꽃평선, 꽃멀미까지. 여행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 시인은 베스트 파트너였다. 파피만 그런 건 아니겠으나 식물의 진화는 정말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파피들이 어떻게 땅속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황금색만 길어 올려 꽃을 피울까? 태어 난 자리에 붙박이로 선 채 향기와 꿀로 동물을 불러 번식도 하고.

“나도 동물보다 열등한 게 식물이라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겨우 몇 주 꽃피우고 사라지는 야생 양귀비가 하찮게 보일 수도 있으나 꽃의 삶이 짧은 게 아닙니다. 이 사막의 야생화는 조건이 맞을 때까지 몇 십 년을 씨앗으로 버티는 종이 많답니다.”

그 말을 듣다 보니 식물의 생존 지혜는 버티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더욱이 이 가혹한 땅 사막에서는 더 그랬을 것. 씨앗에는 환경이 어떤가를 알아보는 일종의 촉, 센서가 있다고 했다. 싹을 틔울 기온과 수분을 감지하고 있다는 말. 유전자에 입력된 생존 조건과 맞지 않으면 그날이 올 때까지 버틴다는 것. 놀랍게도 수십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을 버티다 조건이 맞으면 지금처럼 꽃폭탄으로 피어나는 종도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사례를 읽은 기억이 난다. 경남 함안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꽃을 피웠다는 보도. 700여 년을 버틴 씨앗. 이스라엘에서는 2000년 동안 버티던 대추야자 나무 씨앗이 싹을 틔웠다는 글도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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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까지 이어진 광활한 꽃 세상. 평생 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이다.
신기루처럼 사라질 꽃바다의 윤회

갑자기 예쁜 파피꽃이 위대해 보인다. 하늘거리는 연약한 꽃잎 속에 숨어 있는 강인함. 환경이 좋든 나쁘든 불평하지 않고 태어난 곳에서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꽃. 파피는 오로지 살아남는 데 몰두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꽃길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오지랖 넓게 꽃의 위대성과 진화를 생각하는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까. 한 철 살다 갈 야생의 파피 바다에 바람이 밀린다. 지금처럼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파피는 온몸을 뒤척이며 흔들린다. 꽃이 파도가 되어 바람이 지나는 흔적을 실시간 보여 주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봄은 파피꽃 개화로부터 온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사막의 짧은 봄. 매년 봄 사막은 살아난다. 모든 게 무르익어야 인연이 되듯, 때를 잘 맞춰야 만날 수 있는 사막 꽃밭. 곧 이 꽃바다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광포한 사막의 태양이 모든 것을 말려 버릴 사막.

아득했던 파피꽃 꽃평선은 한 치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땅 위에서는 사라지지만 없어지는 게 아니다. 파피꽃 열매는 땅속에서 센서라는 감각의 촉을 켠 채 단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자연이 꽃 피울 조건을 맞춰 줄 때까지 말없이 버티기. 

황금빛 꽃잎 뒤로 배든 파웰Baden Powell(2,867m) 봉우리가 하얗다. 정수리에 눈을 뒤집어 쓴 채 우뚝한 산. 백두산보다 높은 눈 덮인 저 산 정상을 주말에 올랐었다. 정상부에서 나뭇가지마다 피어 난 눈꽃 세상을 만났다. 신기루처럼 아득한 파피 꽃밭 너머 구름처럼 둥실 떠 있는 흰 산. 오늘 이곳에서 봄과 겨울이 한 시야에 공존하는 풍경을 만났다. 농염하고 도발적인 진홍빛으로 사막을 채색한 파피꽃 보호구역. 종일 붉은색 속에서 보냈으므로 아마 머릿속도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 철만 존재하는 비밀화원을 거닐고 꽃잎처럼 가벼운 말장난을 즐기며 행복해 했다. 곧 사라지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닌 파피꽃. 장엄한 진홍색 꽃바다의 윤회. 어여 가라고, 우리끼리 모여 살아도 외롭지 않으니 이제 그만 가라고, 양귀비는 꽃손을 흔들고 있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5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