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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문경

월간산
  • 입력 2006.08.29 15:33
  • 수정 2006.08.2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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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마다 사연 넘치는 옛길을 걸어봐요"
역사와 자연이 조화이룬 영남대로의 관문

‘느림의 미학’이란 게 요즘 유행하는 화두인가 보다.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 서점가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느림의 미학을 권하는 시대. 이는 우리가 빠름의 미학이 돋보이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인간의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태어난 ‘길’은 느림의 미학이 잘 투영된 공간이다. 특히 산으로 가로막힌 고을과 고을,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는 고갯길은 느릴 수밖에 없는 현실과 빠르고자 하는 욕망이 교차하고 있는 지점이다.

영남 서북부에 자리한 문경(聞慶) 가는 길엔 터널이 두 개씩이나 뚫린 이화령을 지나게 된다. 중부내륙고속도로와 3번 국도에 각각 하나씩 뚫린 이화령터널은 우리에게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편리성을 주었지만, 그 대신 구절양장 고갯길을 오르내리며 누리던 느긋함을 빼앗아갔다. 다행이라면 이화령 고갯길이 아직도 남아있고, 문경새재 옛길도 흙길을 유지한 채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백두대간 분수령을 등지고 터를 잡은 문경. 맨 오른쪽의 높은 산은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이다.
▲ 백두대간 분수령을 등지고 터를 잡은 문경. 맨 오른쪽의 높은 산은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이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 위해 이화령(548m) 고갯길을 오른다. 차량통행이 뜸하다. 한때 쉬어 가는 차량 운전자들로 북적거렸던 고갯마루의 휴게소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종주하는 등산인들만 찾을 뿐 원래의 기능을 잊어버린 듯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화령은 좁고 한적한 길이었다. 대동여지도에 당당히 이화현(伊火峴)이라는 명패를 올렸으나, 영남대로의 가장 큰 고개로서 조선팔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새재 앞에 감히 명함을 내밀 처지는 못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5년 길이 넓혀지면서 신작로가 뚫리자 순식간에 운명이 뒤바뀌었다. 새재를 넘던 행인들은 명패를 이화령(梨花嶺)으로 고치면서 좀더 빠르고 편하게 바뀐 이 고개로 몰려들었다.

▲ 쌍룡계곡 하류에 터를 잡은 사우정. 옥빛 계류와 소박한 정자가 잘 어울린다.
▲ 쌍룡계곡 하류에 터를 잡은 사우정. 옥빛 계류와 소박한 정자가 잘 어울린다.
세월이 흘러 이화령은 3번 국도가 되었고, 포장이 되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1998년 고개 아래로 터널이 뚫림으로써 고갯길은 점차 인적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2004년 12월 경부내륙고속도로 이화령터널이 개통됨으로써 고갯길은 아주 한적했던 이전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길의 흥망성쇠를 짚다보면 ‘길도 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화령을 넘어 문경새재로 방향을 잡는다. 이번 문경새재 여행은 일부러 보름 무렵의 오후로 잡았다. 달빛 쏟아지는 고갯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옛 조선의 나그네가 느꼈을 법한 정취를 조금이나마 맛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달을 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장대비까지 내렸다. 바야흐로 장마전선이 무시로 오르내리고 태풍도 위세를 떨치는 계절이 아닌가.

그럼에도 길손은 뭐에라도 홀린 듯 제3관문까지 걷고야 말았다. 우산도 없이 흠뻑 비를 맞고 조령관에 도착했을 때 성벽엔 이미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성문은 잠기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옛 행인들처럼 내쳐 수안보까지 갈 입장도 아니었다. 어쨌든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되돌아 내려와야만 하는 게 21세기 여행객의 현실이 아닌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칠흑 같은 길을 홀로 되짚어 내려온 두 시간은 조금 무섭기는 했으나, 수백 년 역사가 있는 고갯길의 사연을 자유로이 상상해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과것길이나 한양나들이길로 알려진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즉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조선시대 한양을 기점으로 하는 아홉 갈래의 길 중에서 가장 번듯한 길이었다. 이 길은 충청도 동북부지방을 거쳐 부산 동래까지 이르는 380km. 낙동강 문화권과 한강 문화권을 연결하는 주요한 길목에 자리한 새재는 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통행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였다. 영남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이나 궁궐에 바칠 진상품은 물론,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나선 영남의 유생들도 대부분 이 고개를 넘었다.

▲ 아담한 석교가 돋보이는 대승사의 윤필암
▲ 아담한 석교가 돋보이는 대승사의 윤필암
문경새재를 읊은 노래도 많다. 잘 알려진 진도아리랑이다.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고 / 구비야 구비구비가 눈물이 난다.’ 평생 문경새재를 볼 일이 없던 호남의 섬에서 불려진 이 노래는 조선 고개의 대표격이던 새재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이런 노래도 있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도 좋아 / 큰애기 손질(길)에 놀아난다 / 문경새재 넘어갈 제 / 구비야 눈물이 난다.’ 장사꾼들이 문경새재를 오르내리며 부르던 노래라는데, 에로틱한 익살이 넘쳐 싱긋 웃음이 나온다. 새재를 넘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는 신경림 시인이다.

…한양이라 오백릿길 / 찾아가는 황소떼 / 두루마기자락 허리에 찌른 / 터벅대는 소몰이꾼. / 저것이 문경 새재 / 서러운 서른 굽이 // 박달나무 젖은 이슬 / 키장수 체장수 눈물일까. / 봄바람 타고 올라왔다 / 찬바람에 묻어 돌아가는 / 안동 영해 청상과수 한 맺힌 눈물일까. // 저 고개 넘으면 / 새 세상 있다는데, / 우리끼리 모여 사는 / 새 세상 있다는데,…’(신경림 시인의 ‘새재’ 중에서)

새재는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라는 유래가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조령(鳥嶺)은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새’를 ‘사이’로 풀면, 새재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개가 되고, ‘새로운’으로 해석하면 삼국시대 이후 쓰이던 계립령 대신에 ‘새로(新) 개척한 고개’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옛 문헌에 기록된 초점(草岾)은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고도 해석한다.

새재는 조선 태종 때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발굴조사 때 조령관터에서 고려시대 이전의 토기류가 출토되면서 고려시대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고개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엔 왜군이 북진할 때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이 이 새재를 지키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싸우다 전멸 당하기도 했던 사연이 있다.

▲ 문경새재의 제1관문인 주흘관. 역사를 다룬 드라마 전투 장면 촬영지로도 이용된다.
▲ 문경새재의 제1관문인 주흘관. 역사를 다룬 드라마 전투 장면 촬영지로도 이용된다.

신립이 탄금대전투에서 패하자, 호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새재는 그만큼 한반도에서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고개였던 것이다. 이를 파악한 조정에선 1594년(선조 27) 제2관문인 조곡관을 세웠고, 1708년(숙종 34)엔 조곡관 앞뒤로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조령관을 첩첩으로 세웠다.

이렇듯 영욕의 세월을 보낸 새재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추풍령과 이화령에 신작로가 나고 포장이 되면서 점차 잊혀진 길이 되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새재의 유적지를 복원하자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한반도의 대표선수로 명성을 드날렸던 문경새재의 실체를 확인하려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몇 년 전, 후삼국 영웅들의 권력투쟁을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이 크게 인기를 끌자 문경새재의 촬영장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병사, 백성, 장사꾼 등 옛 복장을 한 엑스트라들과 관광객들이 왕궁과 민가를 배경으로 뒤섞인 광경은 색다른 재미가 있다. 드라마 덕에 문경새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깎아 넓히고 포장하는 게 미덕인 시대에 고갯길이 아직 비포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덕이라 한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 박정희’는 그 해 4월에 문경공립보통학교로 첫 발령을 받아 1940년 떠날 때까지 2년9개월간 문경과 인연을 맺었다.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최고의 통치자가 된 ‘대통령 박정희’는 70년대 중반에 문경을 순시하다 무너진 성벽 위로 차량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 박정희’는 차량통행금지를 명령했다. 이게 문경새재가 아직 흙길로서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다. ‘선생 박정희’가 머물던 하숙집은 ‘청운각’이란 이름으로 문경초등학교 옆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흙길과 촬영장 등은 외적인 요인일 뿐, 문경새재의 장점은 무엇보다 풍부한 자체 콘텐츠에 있다. 주흘관(主屹關),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嶺關) 이렇게 세 개의 성문과 경상감사가 직인을 주고받았던 교구정, 조령원터 등을 살피며 걷는 맛은 오로지 문경새재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또 한글 고어로 ‘산불됴심’이라 쓰인 조선 후기의 비석을 만나는 재미는 얼마나 쏠쏠한가. 온갖 사연이 서린 바위와 동굴, 폭포, 성황당, 산신각, 약수 등등 정말 느리게 걷자고 맘먹으면 한나절로는 턱없이 부족한 고개다.

▲ 문경새재 장승공원을 찾은 한 어린이가 소원을 적은 종이를 매달고 있다.
▲ 문경새재 장승공원을 찾은 한 어린이가 소원을 적은 종이를 매달고 있다.

문경새재를 내려온 다음, 북쪽 가까이 있는 하늘재가 아니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순전히 영남대로 옛길의 분위기를 좀 더 느끼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문경읍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문경시(점촌) 방향으로 10분쯤 달리면 진남교반(鎭南橋畔)이 반긴다.

문경새재를 적시고 흘러온 조령천이 영강에 몸을 섞는 이 일대는 산줄기와 물줄기가 어우러져 태극 문양을 그리는데, 물가에 솟은 높다란 바위벼랑의 풍광이 제법 빼어나다. 강 위로는 가은선 철도, 그리고 구교와 신교가 나란히 놓여 있어 자연과 인공이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주민들은 경북8경 중 하나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도 인공물의 규모가 자연을 위압하지 않을 때 이야기다. 최근 용머리 형상의 진남 강변의 바위벼랑을 싹둑 잘라내고 뚫은 4차선 도로는 진남교반의 정취를 많이 망가트렸다.

어쨌든 진남교반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조망처는 강가 벼랑에 세워진 고모산성. 삼국시대 초기에 처음 세워진 이 산성은 위치로 보면 둘도 없는 철옹성이다. 진남교반 주차장에서 진남문을 향하다 오른쪽 성벽 아래로 난 작은 길을 따라 100m쯤 들어가면 토천(兎遷) 또는 관갑천 잔도라고도 불리는 옛길이 나온다. 주민들은 토끼비리, 토끼벼리, 토끼벼루 등으로도 부르는데, 토끼벼랑이란 말의 이 지방 사투리다. 고려 왕건이 견훤에게 쫓길 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길을 찾아냈다는 사연이 전한다. 토천은 세월이 흐르면서 길손들의 발길에 바닥이 닳아 유리알처럼 반들반들해졌다.

▲ 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 임진왜란 중인 1594년에 세웠다.
▲ 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 임진왜란 중인 1594년에 세웠다.
영강 비탈면에 아슬아슬하게 나있는 토천은 영남대로 전 구간 중 가장 험난한 길로 꼽혔다. 게다가 이 길을 장악할 수 있는 산성까지 있으니 전략상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임진왜란 때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진격하던 왜군 주력부대의 진격을 군사 한 명 없이 만 하루 동안 지연시켰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씁쓸하게 들린다. 당시 신립이 왜군을 막으러 내려왔을 때 이곳을 염두에 두었는데, 충주에 도착했을 땐 이미 왜군이 이곳을 장악한 뒤였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충주에서 배수진을 친 것이라고도 한다.

토천에서 되돌아나와 성벽을 밟으며 진남관으로 향한다. 성안엔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이었던 예천 삼강나루의 주막과 문경 영순주막을 복원한 초가 두 채가 있다. 주막거리를 지나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호위하고 있는 성황당이 나타난다. 당집 앞의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느티나무는 가은 출신 의병장인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1858-1908) 선생이 1896년 일본군과 고모산성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의 흔적이다.

진남관 성벽에 올라서면 절벽을 휘돌아가는 영강 물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문터 근처의 가장 높은 성벽이 포인트다. 아쉽게도 현재 한창 보수공사 중이라 진남관쪽에선 남문터로 올라갈 수 없고, 동문터나 서문터에서 접근해야한다. 이 산성의 보수공사가 마무리된다면 성 일주는 분명 제법 인기를 끌 것이다. 특히 서문~남문~진남관~성벽~토천으로 이어지는 답사 코스는 남한강의 온달산성에 뒤지지 않는 강변 조망과 영남대로 옛길답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명품이 될 듯싶다.

영남대로는 진남교반에서 점촌(문경시)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서쪽의 가은(加恩)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후삼국 시대 한반도의 한쪽을 장악하고 자웅을 겨루던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견훤(甄萱·재위 900-935)이다.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인 견훤(甄萱)의 본래 성은 이(李)씨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全州)에 입성하여 후백제를 세우고 왕이 되어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935년 왕위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킨 비운의 인물이라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견훤의 내력이다.

그러나 가은이 견훤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갈천리 아차 마을 금하굴엔 견훤의 출생에 얽힌 유래담이 전한다. 그런데 이 유래담은 견훤출생설화의 또 다른 배경인 광주(光州) 북촌의 유래담처럼 동네의 아리따운 규수가 동굴의 큰 지렁이와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고 한다. 길손도 어릴 적에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요즘의 해석은 좀 다르다. 견훤이 비록 역사의 패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대를 호령하던 영웅이다. 그런데 승자에 의해 역사가 쓰여지면서 용이 아닌 지렁이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아차 마을엔 견훤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2002년 숭위전(崇威殿)을 세우고 매년 견훤의 향사를 지낸다. 한때 삼한을 호령하던 견훤의 집터는 밭으로 변한 지 오래지만,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견훤의 내력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조항산 동쪽의 궁기리는 견훤이 활을 쏘며 야망을 키웠다는 곳이고, 가은과 멀지 않은 화남과 화북엔 견훤의 이름이 붙은 산성도 여럿 있으니, 이 부근은 견훤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셈이다.

문경은 한때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탄광도시였다. 1970년대만 해도 탄광이 40여 개에 이르렀고, 광부만도 1만 명을 헤아렸다. 그중 가은은 문경탄전(聞慶炭田)에 속하는 탄광 고을로서 왕릉리의 은성탄광은 제법 규모가 컸다. 지나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로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탄광은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1994년 가은의 은성광업소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자 문경의 경제는 급속하게 쇠퇴해버렸다. 23,000명이나 되던 가은의 인구가 5,000명으로 줄었다. 폐선을 이용한 철로자전거, 폐광자리에 들어선 석탄박물관, 연개소문 SBS촬영장 등은 관광도시로 거듭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견훤의 부활에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

 

석탄박물관을 나와 922번 지방도를 타면 길은 이강년 선생의 생가를 지나 대야산(930.7m)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 분수령인 대야산 둘레엔 넓은 반석과 크고 작은 폭포가 즐비한 계곡이 많다. 이 중에서 최치원이 머물던 선유동과 하트형 기암이 돋보이는 용추계곡은 경관도 수려해 한여름에 하루쯤 머물면서 무더위를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희양산에 자리 잡은 봉암사(鳳巖寺)는 1,600여 년 간 우리 겨레의 정신을 이끌어온 불교계에선 생명수처럼 소중한 가람이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남긴 유명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인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엔 9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내력이 자세히 전한다. 여기서 현대 한국 불교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희양산문의 가풍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광복 후 2년이 지난 1947년 겨울, 성철 스님을 중심으로 청담·자운·향곡·월산·혜암·법전 등 20여 명의 젊은 스님들이 모였고, 이들은 일제 35년 동안 일그러진 불교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봉암사결사’로 혁신의 싹을 틔운다. 당시 이들이 내세운 것은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아주 간결한 정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봉암사결사는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 자신이 노동하여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하였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맹세로서 나무해 오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을 일상화하였다. 또한 스님들의 왜색풍 가사·장삼·발우 등의 개선을 시도하였다. 오늘날 삼보에 대한 예로 정착된 ‘삼배’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천도재 등의 법회에서는 금강경과 반야심경 독송이 보편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 문경의 대표적 절집인 김룡사
▲ 문경의 대표적 절집인 김룡사

이러한 봉암사의 선풍은 1982년 6월 봉암사를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특별수도원이란 참배객이나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오로지 참선과 정진에만 몰두하는 수행도량이다. 이렇게 소중한 공간인 희양산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자랑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봉암사는 연중 4월 초파일날 하루만 일반인들을 위해 문을 연다. 허나 스님들의 뜨거운 정진을 궁금해하는 중생들은 봉암사도 손쉽게 드나들고 희양산의 여러 산길도 두루 걷고 싶어하면서 가끔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한다.

서암 스님은 생전에 봉암사의 필요성을 이렇게 역설한 적이 있다. “사찰은 수행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공간이기도 하고 중생 교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봉암사 같은 도량은 한국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아쉽지만 맞는 말이다.

문경 동북쪽의 운달계곡으로 달린다. 문득 수림으로 둘러싸인 고찰이 나타난다. 김룡사(金龍寺)다. 일주문의 이름은 홍하문(紅霞門). ‘붉은 노을 문’이라. 참 감상적인 작명이다. 그러나 감상하고는 거리가 멀다.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꿰뚫는다’는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에서 따왔다. 이는 성철 스님이 평소 즐겨하시던 말씀으로 용맹정진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 일주문 주련엔 이렇게 씌어있다.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入此門來莫存知解) / 비우고 빈 그릇에 큰 도가 가득 차리라(無解空器大道成滿).’

김룡사는 신라 588년(진평왕10) 운달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다. 몇 번의 화재로 대부분 불에 탔고 중창을 거듭했으나 1997년에 다시 큰불이 나 대웅전을 제외한 많은 불전이 화마에 사라졌다. 따라서 대웅전 주변의 전각과 당우들은 최근 다시 지은 탓에 예스런 맛이 좀 떨어진다.

대웅전 마당엔 노주석 2기만 서있는 게 특이하다. 야간 행사가 있을 땐 석등이 아니라 노주석 위에다 관솔불을 놓아두고 어둠을 밝혔다고 한다. 이웃한 사불산(일명 공덕산)의 대승사와 봉암사도 역시 노주석이 있다. 웬일인지 탑은 금당 앞이 아니라 응진전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대웅전은 공포의 처마밑 장식인 살미가 아름답다. 살미 사이엔 물고기, 다람쥐, 새, 국화문, 연꽃문 등 다양한 동식물이 숨어 있다. 그래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듯한 즐거움이 있다.


▲ 과거보러 가는 선비에게 버림 받은 마을 처너에 얽힌 고모산성의 성황당.
▲ 과거보러 가는 선비에게 버림 받은 마을 처너에 얽힌 고모산성의 성황당.
언덕의 약사여래석불 앞에 앉으면 금강송에 둘러싸인 아늑한 산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수가들은 김룡사의 가람은 소가 누운 형국인 와우형(臥牛形)이란다. 그래서 지맥의 흐름에 따라 약사여래석불을 세우고 탑을 두었다고 한다. 이런 지세에선 큰 일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성철·서암·서옹, 그리고 법전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밖으로 나가 큰 이름을 떨쳤다. 고승들은 모두 소의 눈에 해당하는 동쪽 계곡 너머의 명부전에 머물렀다 한다.

절문을 나와 전나무 숲길을 따라 비구니 암자인 대성암으로 간다. 500m도 안 되는 짧은 길이지만 예쁘다. 저 유명한 월정사나 내소사의 전나무 숲보단 길지 않고, 길가의 전봇대가 거슬리긴 하지만 제법 품위가 넘친다. 숲엔 단풍나무, 느티나무, 떡갈나무가 짙다. 숲도 불법도 울창한 김룡사의 으뜸은 바로 자연의 후광이다. 이 길을 느릿느릿 걷다보면 욕심은 버려지고 대신 자연이란 신선한 공기에 마음은 한없이 평화스러워진다.

김룡사 숲이 이렇게 잘 보존된 이유는 운달산이 능묘의 제사에 쓰이는 향목과 목탄을 조달하기 위해 수목을 보호하던 향탄봉산(香炭封山)이었기 때문이다. 손이라도 씻을 겸 대성암 앞의 개울로 다가가니 냉기가 철철 넘쳐난다. 금세 한기가 돈다. 과연 운달계곡을 냉골이라고 일컫는 까닭을 알 것만 같다.

문경의 마지막 답사 코스로 잡은 하늘재로 간다. 조선 태종 때 새재가 개척되자 역사상 백두대간 최초의 고갯길이었던 하늘재는 한갓 샛길로 전락하고 말았다. 포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새재를 떳떳하게 지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나 검문이 번잡스런 부보상들, 그리고 길을 더럽히는 말이나 소를 동반한 천민들은 간섭 없는 이 고개를 넘었다.

불교문화가 전해지는 길목으로의 역할도 컸다. 하늘재를 중심으로 충주쪽의 ‘미륵’과 문경쪽의 ‘관음’이라는 지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고갯마루 양쪽엔 제법 큰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오히려 외세에 의해 모두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경쪽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인 관음리 일대엔 반가사유상·약사여래입상·오층석탑·석불좌상 등 여러 점의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하늘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불교 흔적은 고갯마루에서 2km쯤 내려간 관음마을 안쪽에 자리한 반가사유상이다. 작은 바위면에 새겨져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머리에 삼면화관(三面花冠)을 썼으며, 원만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입술도 예쁘다. 다만 몸에 비해 오른팔이 너무 짧고 무릎 아래쪽이 명확하지 않아 미적으로는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하늘재를 넘어 다니는 길손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다정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마을의 지명으로 하늘재 부근서 짚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미륵리의 ‘점말’과 관음리의 ‘사점’이다. 지명에서 둘 다 사기그릇을 굽는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주쪽 점말 가마터에선 청화백자·철화백자·초문철화백자 등이 많이 출토되었고, 일제 때 일본인이 자리를 잡고 자기를 굽던 가마터도 발굴되어 한국과 일본의 도자문화 교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충주 점말의 가마에선 연기가 끊긴 지 오래되었지만, 문경 사점 마을의 가마에선 아직도 연기가 솟아나고 있다. 사점 마을뿐만 아니라 하늘재 아래의 관음리·갈평리 일대엔 문경 도자기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도요지가 널려 있다.

문경은 도자기의 고을이다. 이곳에선 경기도 광주·이천 등에서 고급 도자기를 굽던 관요(官窯)와 달리, 소박한 멋을 담고 있는 막사발류의 생활자기를 굽던 민요(民窯)가 발전해왔다. 그런 문경에서도 하늘재 주변이 도자기로 유명하게 된 까닭은 흙·불·물의 자연조건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도자기의 몸체가 되는 고운 흙인 태토(胎土)다.

문경의 태토는 끈기가 있고, 철분 함유량이 많아 민기(民器)를 빚는 데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문경 일대에 널려 있는 회황색 사토는 고급스런 청자류보다는 투박한 분청사기를 만드는 데 적합했다. 분청사기는 분방한 형태와 빛깔로 우리 민족의 소박한 심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백두대간 분수령의 첩첩산골에 있으니 땔감으로 쓸 소나무도 넉넉했다. 흙을 물에 넣고 휘저어 잡물을 없애는 수비(水飛)작업엔 맑은 석간수가 반드시 필요한데, 하늘재 주변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질 좋은 석간수도 지천이었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이 잘 갖춰져 있다 해도 판로가 마땅치 않으면 도자기 산업이 발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문경은 백두대간의 험한 산줄기로 첩첩산중이면서도 남한강과 낙동강이 인접해 있어 영남대로의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기 편리했다. 관음리에서 백두대간의 하늘재를 넘어 달천을 따라 내려가면 남한강의 황강나루에 이르고, 동로면쪽에서 차갓재나 벌재를 넘어 단양천을 따라 가면 남한강 하진나루가 나온다. 이렇게 남한강에 도착하면 배를 타고 한양을 비롯한 경기도 등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수계는 문경에서 영남대로를 이용하거나, 문경의 산북과 산양을 거쳐 금천을 따라 가면 영순의 삼강나루에 이를 수 있었다. 낙동강 뱃길은 상류의 안동이나 하류의 상주·선산을 지나 부산의 동래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향토사학자들은 문경 도자기가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발굴된 가마터로 살펴보면, 문경지역에서 최초로 시작된 곳은 동로면 인곡리 사기점에 있는 도요지라 한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동로면 적성리·노은리를 거쳐 하늘재 아래의 관음리로 확산되었다. 현재 적성리·노은리 지역에는 민간에서 사용하던 소박한 백자편이 발견되었으며, 관음리엔 조선 중기 이후의 가마터가 57개소나 있다고 한다.

관음리의 경우 16세기 이후 번창하면서 생산공정이 분화되어 사발대정과 불대정 등의 전문화된 숙련도공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으면 나라에서 운영하는 광주분원으로 뽑혀가서 일하다가 계약기간이 끝나면 귀향하곤 하였는데, 이런 기술적 교류가 관음리 도자기를 한층 더 번창하게 했다. 일제 때도 불이 꺼지지 않던 가마였지만, 6·25전쟁 뒤에 생활 용기의 재료가 양은·플라스틱·스테인리스스틸 등으로 바뀌면서 문경의 도자기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 사기그릇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겼고, 불을 지피지 않는 가마도 하나둘 늘어갔다. 남은 도공들은 단지나 요강 등을 구우며 겨우겨우 연명해갔다.

이런 문경 도자기가 다시 재기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였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되자, 조선 도자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본인들이 문경을 찾아왔던 것. 임진왜란 때 강탈해간 뒤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찻사발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의 기술적, 정신적 뿌리를 문경에서 발견한 것이다.

문경이 이도다완의 본 고향은 아니다. ‘우물’이라는 이도(井戶)의 어원은 경남 하동의 ‘샘골가마’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현재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단절되었던 이도다완의 생산기법을 근래에 발견해 이를 재현한 곳은 하늘재 아래의 관음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신정희·천한봉·서선길·김정옥 같은 도공들이 이도다완 재현에 매달린 지 수십 년. 이제 이곳은 우리나라 찻사발의 요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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