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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알프스에서 온 편지/쿠베르클 산장] '정당한 방식이 아니라면 후세에 남겨둬라'

월간산
  • 입력 2007.01.19 14:23
  • 수정 2007.01.2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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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조라스 북벽을 바라보며 언스워즈의 <알프스의 북벽>을 읽다

가을이 한창인 무렵, 한낮에도 2,000m 이상의 알파인 지대는 선선하다. 따뜻함에 녹아들고파 햇볕이 내리쬐는 산장의 창가로 다가간다. 침상에 붙어 있는 유리 창문 사이로 빛이 부서져 들어온다. 한껏 다리를 펴고 눕는다. 몇 분간 눈을 감고 정적을 즐긴다. 편하다. 게으름이 좋다. 곧 눈을 뜨고 지난밤에 못다 읽은 책을 집어든다. 월터 언스워즈의 <알프스의 북벽>이다.

운치 있는 자그마한 옛 산장의 따뜻한 창가에 누워 산서를 읽는 재미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창밖 저 멀리 그랑 조라스(Grandes Jorasses·4,208m) 북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읽는 <알프스의 북벽> 이야기는 더없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거대한 돌 아래에 새의 둥지처럼 위치한 쿠베르클(Couvercle·2,687m)의 자그마한 산장에서였다.

배낭을 짊어지고 몽탕베르 산악열차에 올랐다. 지난 시즌 내내 보수공사 중이던 역 건물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가파르게 오르는 톱니바퀴 열차는 한층 덜커덩거리며 산으로 오른다. 20여 분이 지나 드류(Les Drus·3,754m)가 보이며 모퉁이를 도니 몽탕베르(Le Montenvers·1,909m)다. 건너편의 드류 서벽을 위시하여 메르 데 글라스 빙하(Mer de Glace) 좌우로 침봉들이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너무 눈에 익어 감흥이 덜할 만도 하건만 좀체 줄어들지 않는 건 변함없는 그들의 위용 때문이리라.

▲ 몽블랑 산군과 현대식 쿠베르클 산장을 배경으로 하산하고 있는 산악인들.
▲ 몽블랑 산군과 현대식 쿠베르클 산장을 배경으로 하산하고 있는 산악인들.

감흥이 줄어들지 않는 메르 데 글라스 주변 풍광

긴 철사다리를 타고 빙하에 내려선다. 빙하를 따라 오르지 않고 드류가 있는 방향으로 가로지른다. 모레인 지대의 큰 돌 위를 오르내리며 빙하를 건넌다. 곧 절벽 위로 난 철사다리 아래에 닿는다. 두 명의 산악인이 먼저 와 있다. 위로 100여m 이상 이어진 철사다리의 맨 아랫부분은 새롭게 가설되어 있다. 매년 빙하가 100m 이상 움직이기 때문이리라.

그들보다 먼저 철사다리에 올라탄다. 몇몇 구간은 아찔할 정도로 고도감이 느껴진다. 두 산악인이 안전벨트에 확보줄까지 점검하던 이유였다. 진땀을 흘리며 사다리 구간을 지나 배낭을 벗고 쉰다. 곧 두 산악인도 저만치 뒤따르고 있다. 줄곧 오르던 그들은 그랑 몽테(Grands Montets·3,295m)쪽으로 빠진다. 쿠베르클 산장쪽으로 난 메르 데 글라스 빙하의 발콘 코스를 함께 가면 심심치 않겠다 여겼건만 아쉽다. 할 수 없이 혼자 걷는다.

길은 빙하 좌측 둑길로 나 있다. 곧 샤르푸아(Charpoua) 빙하 아래의 개울을 지난다. 얼음바다라는 메르 데 그라스의 웅장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혼자 보기 아깝다. 곧이어 샤르푸아 산장(Ref. de la Charpoua·2,841m)과 쿠베르클 산장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른다. 이미 시즌이 끝나 두 산장 모두 문을 닫은 상태다. 이곳서 샤르푸아 산장까진 1시간이면 된다. 발길은 3시간 이상 더 가야 하는 쿠베르클 산장으로 향한다.

이제 정오가 지났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길은 가파른 바윗길로 오르락내리락 이어진다. 물론 철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이제부터 그랑조라스 북벽 상단부를 빤히 바라보며 걷는다. 메르 데 글라스 빙하는 오른편 발아래에 둔다. 급할 게 없는 발걸음이라 경치를 즐긴다. 하지만 혼자 하는 즐거움이라 왠지 흥이 나지 않는다.

발걸음이 무거워질 정도로 가파른 길을 오르내린 후 쿠베르클 산장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선다. 케언이 보기 좋게 위치해 있다. 이것 너머로 보이는 그랑 조라스는 더욱 웅장하다. 잠시 쉰 다음, 산장으로 향했다. 큰 건물의 쿠베르클 산장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여기서 한 50m 떨어진 지점에 자그마한 알루미늄 건물이 있다. 거대한 바위 아래에 위치한 이것은 산악인들을 위해 겨울철에도 개방되는 산장이다. 몇몇 산악인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10여 평 되는 내부엔 주방 겸 홀에 나무탁자가 놓여 있고, 큰 방엔 잠자리가 약 20개, 작은 방엔 4개가 있다. 마침 작은 방에 아무도 없어 거기에 짐을 푼다.

▲ 랑조라스 북벽과 레쇼 빙하를 지켜보며 트레킹하는 즐거움은 일품이다.
▲ 랑조라스 북벽과 레쇼 빙하를 지켜보며 트레킹하는 즐거움은 일품이다.

또다른 연극무대 준비하고 있는 그랑 조라스

오후 6시가 넘은지라 먼저 온 산악인들은 저녁을 먹고 있다. 가이드 한 명을 포함해 모두 프랑스인들이다. 카메라만 챙겨 밖으로 나온다. 그랑 조라스 북벽에 물드는 저녁놀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산장을 보호하고 있는 큰 바위 위가 전망이 좋다. 옅게 떠 있는 구름에 차츰 붉은 놀이 물들기 시작한다. 멋지다. 조금 있으니 산장에 있던 이들도 그 장면을 즐기러 올라온다. 부부를 손님으로 데려온 젊은 산악가이드 크리스토퍼가 남자 손님에게 산들을 설명한다.

북벽은 이제 면사포처럼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루 내내 빛이라곤 들지 않더니만 이렇게 저녁나절에 잠시 그것도 북벽에서 돌출된 크로 스퍼와 워커 스퍼의 일부분에만 빛이 닿고 있다. 북벽은 이미 동계시즌에 접어든 것이다. 지난 여름 한국 산악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열정의 무대가 아니었던가. 또 다른 연극무대의 오픈을 위해 북벽은 저렇게 또 눈의 장막을 치고 있는 것이다.

어둑해지고서야 산장에 들어선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뜨겁게 차를 끓여 마신다. 이미 저녁을 마친 다른 이들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필자 또한 막 침상에 들려는데, 두 명의 젊은이가 산장 문을 연다. 영국인인 이 둘은 물 뜨는 곳을 묻는다. 약 50m 아래로 내려가면 있다고 알려준 다음, 침상으로 돌아온다.

▲ 몽블랑과 발레 블랑쉬 설원을 배경으로 두 산악인이 주변 산들을 지켜보고 있다.
▲ 몽블랑과 발레 블랑쉬 설원을 배경으로 두 산악인이 주변 산들을 지켜보고 있다.
<알프스의 북벽>을 펼쳐든다. 랜턴 불에 비춰 읽지만 페이지들이 잘도 넘어간다. 한두 시간 읽자 눈이 침침해진다. 랜턴을 끄고 침상 옆 유리창으로 시선을 던진다. 창밖 저 멀리 북벽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침낭 속으로 몸을 숨기며 잠자리에 든다. 그 때까지도 두 영국인이 지핀 휘발유 버너의 요란한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어둠이 물러가기 전인 아침 6시, 모두 부스스 일어난다. 불을 지펴 차나 스프를 끓이고 장비를 챙기는 등 부산하게들 움직인다. 크리스토퍼와 손님 부부는 산장 바로 뒤에 솟은 무안느(Aig. du Moine·3,412m)에 오를 예정이라 한다. 그들이 떠난 후 아침 해가 뜨는 장관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 7시가 넘자 몽블랑 산군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최고봉 몽블랑의 하얀 눈 언덕에 햇볕이 닿을 즈음, 두 명의 산악인이 산에서 내려온다. 그들은 드루아트(Droites·3,400m)에서 내려온다고 했다. 지난밤에는 큰 돌 아래에서 비박했다고. 50대 중반의 이들은 샤모니의 산악가이드였다. 산장 안이 답답해선지 해가 뜨지 않아 아직도 찬 기운이 감도는 밖에다 자리를 펴고 아침을 준비한다. 그랑 조라스 북벽을 등진 채 담배를 빼어문 잰이라는 가이드는 지난 여름에 손님과 함께 북벽의 워커 스퍼에 올랐다고 한다. 그것도 24년만에.

필자 또한 1990년에 워커 스퍼를 비롯하여 다른 두 루트를 올랐다고 하니 꼭 다시 올라보라고 한다. 함께 온 자기 친구는 2년 전에 등반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 그 전에는 등반을 썩 잘했다고.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걷는 자세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둘은 아침을 챙겨먹자 곧 길을 떠났다. 수정채취를 위해 다시 드루아트쪽으로 향하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몽블랑의 초등자요 수정채집자였던 자크 발마(Jacques Balmat)의 후손인 셈이다. 

지난 밤에 늦게 도착한 두 영국인이 커피를 들고 산장 밖으로 나온다. 30세쯤 된 이들은 자기들도 무안느를 오를 예정인데, 이곳서 며칠 묵을 생각이기에 천천히 출발해도 된다며 서두르지 않는다. 필자 또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들 먼저 산장을 떠난다. 무안느의 등반출발지점을 알고 있던 터라 모레인 돌길을 천천히 오른다. 영국인 둘은 루트개념도까지 보면서도 트레일을 따라 한참을 돌고 있다. 그들이 무안느쪽으로 돌아오를 때까지 바위에 앉아 쉰다.

이제 태양이 한껏 떠올라 춥지 않다. 잠시 후 도착한 둘은 길을 잃고 헤매 지친 탓인지 바위 위에 벌러덩 누워 쉰다. 그런 후 가이드북을 보며 등반루트를 살핀다. 차림새나 행동거지로 보아 등반경험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잘 다녀오라 이른 후, 무안느 아래의 작은 모레인 물웅덩이에 이른다. 물에 비친 그랑 조라스며 샤모니의 침봉들이 보기 좋다. 하지만 사진에 담을 정도는 아니다.

아무도 없는 산장에 돌아와 점심을 준비한다. 산에서 먹는 거라 커피와 빵으로 간단히 먹는다. 창가로 가 <알프스의 북벽>을 집어든다. 머메리부터 시작하여 프란츠, 윈드롭 영, 라우퍼, 슈미트 형제, 코미치, 캐신 등에 이르는 이야기로 책의 중반부에 접어든다. 바로 이 큰 바위 아래의 쿠베르클 산장 창밖으로 1937년 8월5일 저녁 캐신 일행이 워커 능선을 오르는 불빛을 산장지기가 목격하지 않았던가.

기술문명 발전할수록 불굴의 정신 퇴보

2층 침상의 창가에서 2시간 이상 <알프스의 북벽>을 뒤적였더니 몸이 근질거려 밖으로 나온다. 두 가이드 수정채집가가 간 드루아트쪽으로 가본다. 한동안 알파인 산록지대로 이어진 길은 탈레프르(Talefre) 빙하로 뚝 떨어진다. 빙하 건너편에는 가파른 돌사면이 드루아트 남벽으로 이어져 있다. 발길을 돌려 산장에 오니 가이드 크리스토퍼와 손님 부부가 막 산에서 내려와 샤모니로 내려가고 있다.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서쪽 트레일로 간다. 마침 두 명의 트레커가 저만치 오고 있다. 웃으며 다가온 그들은 곧바로 샤모니로 내려갈 거라 한다.

▲ 레쇼 빙하와 그랑조라스 북벽 위로 저녁놀이 한창이다.
▲ 레쇼 빙하와 그랑조라스 북벽 위로 저녁놀이 한창이다.
레쇼 빙하와 메르 데 글라스 빙하가 내려다보이는 큰 바위 위에 앉아 사방으로 펼쳐진 경관을 지켜본다. <알프스의 북벽>에 나오는 산악영웅들의 무대가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머메리의 에귀 플랑에서부터 캐신의 그랑 조라스까지. 변변찮던 당시의 장비로 저리 큰 벽들을 올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기술문명이 발전할수록 불굴의 정신은 오히려 퇴보하는 게 아닐까 싶다. 첨단 인공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요즘의 젊은 산악인들이 주시해야 할 바다.

<알프스의 북벽> 첫 장에 나오는, 하켄 하나 사용하지 않은 머메리의 등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 한국 산악계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고 본다.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 변화해가고 있다고 해도 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면 머메리즘의 왜곡이요, 오히려 퇴보하는 셈이 아닐까. ‘길이 끝난 데서부터 등산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고정로프에서 벗어난 시점부터 등반이 시작되는 셈이며, 장비에 대한 의존보다는 자신의 정당한 능력에 의존하는 자세가 진정 바람직할 터이다. 정당한 방식으로 오르지 못하면 후세를 위해 남겨두는 양심은 있어야겠다.

어느덧 해는 서쪽에 펼쳐진 샤모니의 침봉들 너머로 기울고 있다. 산장으로 돌아오니 바로 위 암벽에 두 산악인이 붙어있다. 올라가보니 샤모니 산악가이드 필립과 그의 손님이다. 그들은 다음날 드루아트에 오를 예정이라고 한다. 그들과 함께 산장으로 내려가니 두 수정채집가가 막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흙투성이가 된 옷들을 벗어 털고서 바위에 널고 있었다. 수정채집이 어느 정도 돈벌이가 되는지 모르지만, 가이드 잰은 이제 더는 산악가이드 일을 못하는 친구를 위해 이렇게 함께 나선 것 같았다. 샤모니 알파인 박물관에 전시된 많은 멋진 수정들이 이 쿠베르클 산장 주변에서 난 사실로 미뤄보아 아직도 채굴의 여지가 많은 듯하다.

▲ 100여 년 전에도 같은 자리에 산장이 있었다. 이 산장은 산악인들을 위해 비수기에는 늘 개방해둔다.
▲ 100여 년 전에도 같은 자리에 산장이 있었다. 이 산장은 산악인들을 위해 비수기에는 늘 개방해둔다.
무안느 남벽으로 간 영국인들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에 서쪽 트레일에 갔을 때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 내려오는 중이라 여겼던 건데 너무 늦어 은근히 걱정된다. 저녁을 먹고 <알프스의 북벽>을 마저 읽은 밤 11시가 되어도 둘은 산장에 들어서지 않았다. 별일 없겠지 생각하며 막 잠들려는 순간 산장 문이 열린다. 그들이다. 마음을 놓으며 다시 잠자리에 든다.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결이 어수선하다. 새벽 2시. 가이드 필립 일행이 드루아트 등반을 위해 일찍 서두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오후에 샤모니에 내려갈 수 없다.

이렇게 밤잠을 설치며 선잠 결에 생각해 본다. 밤 늦게 도착하거나 새벽 일찍 떠나는 산악인들을 챙겨야 하는 알프스 산장지기의 생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아침 7시. 두 가이드 수정채집가가 먼저 일어나 샤모니로 내려갈 채비를 한다. 필자 또한 차 한 잔을 끓여 마신다. 지난 이틀간 수정을 얼마나 채집했는지는 모르지만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내려가는 그들 둘을 지켜보며 다시 침상으로 돌아온다.

해가 따뜻하게 떠오른 후에나 하산할 심산으로 느긋하게 누워 <알프스의 북벽>을 마저 읽는다. 보나티의 파란만장한 활동에서부터 할린의 아이거 직등까지 단숨에 읽어 버린다. 마침 창틈으로 햇살이 비친다. 그 전까지 잘 보이던 그랑 조라스 북벽은 희미해져 있다. 침낭을 배낭에 챙겨 넣고 샤모니로 하산할 준비를 한다.

밤늦게 돌아온 두 영국인은 쥐죽은 듯 누워있다. 그들을 깨워 그들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이메일 주소를 받아 챙긴다. 이윽고 그랑 조라스 북벽을 등지고서 샤모니까지 길고 지루한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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