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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흔적으로 좇는 동물이야기] 멧토끼

월간산
  • 입력 2008.11.0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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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으로 둘러 싸여 1년 이상 살지 못하는 동물
기다란 큰 귀는 달아날 때 체열 발산 위한 것

이른 봄 초등학생들이 교문을 나서면 병아리와 어린 토끼를 팔고 있는 아줌마와 만나게 된다. 어린 토끼는 같은 또래 꼬마들의 동정심을 자극한다. “귀엽고 깜찍하다”는 말은 애처롭고 보호해주고 싶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보드라운 솜털과 몸보다 약간 작은 머리, 큰 눈이 시선을 고정시킨다.

만약 한 꼬마가 토끼 한 마리를 사 간다면 필시 엄마와 갈등이 시작될 것이다. 토끼를 산 그 꼬마는 엄마의 호통에 토끼를 되물리러 가지만, 토끼 장수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났다. 친구에게 토끼를 주려고 찾아가지만 친구 엄마에게도 거부당한다. 그 꼬마는 무거운 마음으로 공원이나 뒷산에 가 토끼를 풀어준다. 꼬마의 생각으로는 산토끼(멧토끼)의 본래 고향은 숲이고, 멧토끼를 잡아 집토끼로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보면 옳다. 집토끼도 본래는 야생 토끼였으니까. 그러나 우리나라 산에 사는 멧토끼(Lepus Coreanus)는 집토끼의 조상이 아니다.

긴장한 멧토끼. 멧토끼는 머리 바로 뒤쪽을 제외하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거의 사방을 감시할 수 있다.
긴장한 멧토끼. 멧토끼는 머리 바로 뒤쪽을 제외하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거의 사방을 감시할 수 있다.

집토끼는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 사는 굴토끼(Oryctoiagus Cuniculus)를 가축화한 것이다. 때문에 둘은 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사이이며, 둘 사이에는 새끼가 태어나지 않는다.

집토끼를 풀어놓고 키우면 땅에 굴을 파고 숨으며 그 속에다 새끼를 낳는다. 그러나 멧토끼는 굴을 파지 않는다. 집토끼의 새끼는 눈을 감은 채 태어나고 털도 없는 벌거숭이다. 이에 반해 멧토끼는 눈을 뜬 채 태어나고 짧은 털로 덮여 있다.

멧토끼는 흔한 야생동물이다. 지금도 “흔하다”는 위치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예전처럼 많지는 않다고 느끼게 되는 동물이 되었다. 지금은 30년 전보다 숲이 빽빽해져 멧토끼 자체를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밤에도 낮에도 사방에 천적 투성이
멧토끼는 사람을 피해 잘 숨지만 똥을 감추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똥조차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 건 분명히 수가 줄었음을 뜻한다.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요 근래 멧토끼의 밀도가 최저로 감소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사실이 되려면 몇 년 후 대폭 수가 늘어나야 할 것이다.

멧토끼는 완전히 성장하면 2~3kg 정도가 된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육식동물들과 비교해 볼 때 이 크기는 가장 효율적인 먹이가 된다. 즉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여러 초식동물 중 중간 크기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1 멧토끼 발자국. 앞발은 작고 뒷발은 훨씬 크고 넓다. / 2 멧토끼의 똥. 겨울에는 마른 식물을 먹어 갈색을 띤다. 여름 똥은 검은 색 또는 흑록색을 띤다. / 3 멧토끼가 잘라먹은 가시오갈피. 멧토끼가 잘라 먹은 나무줄기는 칼로 자른 듯 깔끔하다.
1 멧토끼 발자국. 앞발은 작고 뒷발은 훨씬 크고 넓다. / 2 멧토끼의 똥. 겨울에는 마른 식물을 먹어 갈색을 띤다. 여름 똥은 검은 색 또는 흑록색을 띤다. / 3 멧토끼가 잘라먹은 가시오갈피. 멧토끼가 잘라 먹은 나무줄기는 칼로 자른 듯 깔끔하다.

다 자란 멧토끼는 스라소니, 삵, 여우, 담비의 주요 먹이가 되며 늑대나 표범처럼 대형 육식동물에게는 보충 먹이가 된다. 심지어 멧토끼보다 100배나 더 큰 호랑이도 가끔씩 멧토끼를 사냥한다. 맹금류도 멧토끼의 위협적인 천적이다. 낮에는 검수리와 참매, 그리고 말똥가리가, 밤에는 수리부엉이와 올빼미가 공중에서 습격한다.

어리거나 갓난 멧토끼는 너구리와 족제비, 집쥐 크기의 쇠족제비의 사냥감이 되며 구렁이에게도 먹힌다. 한 마디로 멧토끼는 천적으로 둘러싸인 채 사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화는 한 종에게 특혜를 몰아주지도 않지만 결점 투성이로 ‘왕따’시키지도 않는다. 천적이 많다는 뜻은 그에 대응한 방어력도 극대화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대개의 야생동물이 그렇듯, 멧토끼도 잠을 깊게 자지 않는다. 그냥 그 때 그 때 토막잠을 자며 귀는 항상 쫑긋 세운 채 낯선 소리를 찾는다. 좌우측에 붙은 큰 눈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사방 전체에 가까운 범위를 감시할 수 있다.

앞다리는 짧은 데 비해 길고 억센 근육질의 뒷다리는 한 번에 멀리 또는 높이 뛰게 해준다. 따라서 멧토끼가 도망칠 때는 내리막으로 내달리기보다 등고선과 평행해 달리거나 오르막으로 뛴다. 어디 그뿐인가. 긴 귀는 달릴 때 급격히 상승하는 체온을 식히는 데 유용하다. 멧토끼의 귀 안쪽은 짧은 털이 드문드문 나 있어 피부가 들여다보인다. 이는 달릴 때 급격히 상승하는 체열을 발산시키기 위함이다. 아주 짧은 꼬리는 천적의 입이나 앞발에 잡히는 걸 방지해 준다.

집토끼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사실 중 하나는 번식력이 놀랍다는 것이다. 집토끼는 연간 11회까지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천적이 없고 양질의 먹이와 교미 상대가 항상 곁에 있는 상황이기에 가능하다. 멧 토끼의 경우 연간 3~5회의 출산에 그치지만, 육식동물의 번식률(연간 1회)에 비하면 꽤 높은 편이다.

멧토끼가 자기 똥을 받아먹는 이유
멧토끼의 배란은 주기적이지 않다. 그들은 교미 자극에 의해 배란이 유도되며, 임신기간은 42~47일로 출산 후 바로 교미와 임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높은 번식률은 포식자에 의한 손실을 신속히 보충하기 위한 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 멧토끼는 태어나 1년 이상 생존하는 경우가 드물다.

멧토끼는 침엽수가 빽빽한, 그래서 지면에 풀이 드문 곳에서는 살지 않는다. 그저 지나칠 뿐이다. 빽빽한 숲이라 해도 풀이 무성한 공터에서는 자주 눈에 띄며,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뒤 관목이 들어찬 곳, 작은 숲이 드문드문 있는 목초지를 좋아한다. 그런 곳에는 먹이가 다양하고 자신과 새끼를 숨길 곳이 많기 때문이다.

새끼 멧토끼. 새끼 멧토끼의 이마에는 항상 흰 점이 나 있다. 어미는 새끼를 덤불에 숨기고 하루 1~2회만 찾아와 젖을 물린다.
새끼 멧토끼. 새끼 멧토끼의 이마에는 항상 흰 점이 나 있다. 어미는 새끼를 덤불에 숨기고 하루 1~2회만 찾아와 젖을 물린다.

풍성한 여름에는 각종 초본류를 즐기지만 겨울에는 관목의 마른 잎과 가는 줄기를 잘라 먹고 나무줄기도 갉아 먹는다. 멧토끼는 하루에 자기 체중의 10~20%의 식물을 먹는다. 섬유질이 많은 풀과 나뭇가지가 주식이다. 그러나 체구가 작아 되새김질하는 동물처럼 복잡한 위와 긴 창자를 가지지 못한다. 때문에 식물을 완전히 분해시키기 위해 위와 작은창자에서 대충 영양분을 흡수한 후 맹장으로 보낸다.

맹장에서는 발효에 적당하지 않은 크기의 식물입자는 똥으로 신속히 배출한다. 작은 입자는 맹장에서 보다 천천히 발효된 후 배출되는데, 이 배설물을 멧토끼가 다시 먹어 완전히 영양분을 흡수한다.

멧토끼는 목과 몸이 짧은 반면 뒷다리가 길다. 이는 빨리 뛰는 데 적당할 뿐 아니라 맹장에서 발효된 1차 배설물을 받아 먹는 데도 유리하다.

멧토끼는 천적이 다양한 중간형 동물이다. 현재 멧토끼의 천적들은 감소하거나 아예 멸종했다. 그럼에도 멧토끼의 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 건 분명히 인위적 요인 때문일 것이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멧토끼가 많은 산은 포식자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멧토끼의 증가는 농작물 피해가 늘어남을 의미하고, 그러므로 소탕작전에 의해 곧 감소될 게 뻔하다.<계속>


/ 글 사진 최현명 조경·동물연구가·<야생동물 흔적도감>(최태영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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