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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한반도 해안 요트 탐사(4)] 배가 좌초해 쓰러져도 우리는 즐거웠던 까닭

월간산
  • 입력 2009.10.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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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떠나 충무공의 명량해협 지나 우이도까지 항해

6m… 5.5m… 5m… 4.5m…  

전남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 서쪽, 깊고 아늑한 만(灣)을 이룬 돈목을 겨누고 진입하던 집단가출호의 수심계가 비상사태를 알리고 있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심상찮은 느낌에 수심이 깊을 것으로 예상되는 북쪽 방파제 방향으로 틸러를 밀어 뱃머리가 돌아간다 싶은 순간,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처량하게 좌초된 집단가출호 뒤로 해가 저물고 있다. 배 위에 남아 있는 사람은 송영복, 홍선표.
처량하게 좌초된 집단가출호 뒤로 해가 저물고 있다. 배 위에 남아 있는 사람은 송영복, 홍선표.

정지할 때 충격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 미뤄 바닥은 다행히 모래인 듯했다. 어이없는 좌초. 바람과 물때, 모두 우리 편이 아니었다. 섬의 지형에 교란된 바람은 배를 수심이 더 낮은 돈목 쪽으로 밀어붙였고, 썰물은 바람과 반대방향으로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배에 있는 밧줄을 몽땅 연결해 100여m 떨어진 방파제에 우선 확보한 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2개의 닻을 더 내렸다.

미리 상륙한 선발대가 마을 주민들로부터 얻어온 정보에 의하면 집단가출호가 좌초한 위치의 간조 수심은 1m. 우리 배는 앞으로 3시간 가량 물이 더 빠지면 완전히 옆으로 드러누울 것이고,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배가 기울 것에 대비해 선실의 물건들을 정리한 뒤 배가 잘 보이는 방파제 위에 캠프를 설치하는 동안 필자 등 몇 명은 스킨다이빙으로 물에 들어가 배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바닥이 부드러운 모래층이어서 배가 다칠 염려는 없었다. 해가 저물며 바람이 잤다. 이대로 밀물이 파도 없이 얌전히 들어온다면 배는 다시 둥실 뜰 터였다.   

좌초선의 선원들은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오는 길에 트롤링 낚시로 잡은 삼치와 조피볼락을 모닥불에 구워 방파제 위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간조는 저녁 8시쯤에 찾아왔고, 일찌감치 뜬 보름달이 와불(臥佛)처럼 누워 있는 집단가출호에 교교한 월광을 드리웠다.

(좌)해풍과 가을볕에 잘 마르고 있는  삼치. 뜻밖에도 낚시가 잘 되는 바람에 스포츠 세일링 요트가 어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앞에 플라스틱통의 생선은 조업중인 어선에서 직구입한 간자미다.(우)제네이커와 메인세일에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흑산도에서 우이도 방향으로 20마일 지점을 항해 중인 집단가출호.
(좌)해풍과 가을볕에 잘 마르고 있는 삼치. 뜻밖에도 낚시가 잘 되는 바람에 스포츠 세일링 요트가 어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앞에 플라스틱통의 생선은 조업중인 어선에서 직구입한 간자미다.(우)제네이커와 메인세일에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흑산도에서 우이도 방향으로 20마일 지점을 항해 중인 집단가출호.

해저 지형은 생물처럼 변화
세일링 요트는 배 밑바닥에 크고 무거운 킬(keel)이 달려 있어 수심에 특별히 민감하다. 해도에는 전 해역의 수심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해저 지형은 퇴적물의 양과 조류에 따라 생물처럼 변화하므로 그걸 일일이 업데이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번 좌초는 최근 몇 년 동안 우이도 서쪽으로 모래 퇴적이 급격히 진행 중인 탓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인천부터 독도까지 한반도 연근해를 순례하는 집단가출호의 4차 항해는 9월 4, 5, 6일 목포에서 흑산도를 거쳐 우이도를 돌아오는 항로에서 이뤄졌다. 서남해로 진입하면서 항해는 말이 2박3일일 뿐, 실제로는 4박5일이 됐다. 이 수역은 조류가 거세서 날물에 출항해 들물에 입항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날물 시간이 새벽 3시경이어서 목요일 저녁에 서울에서 출발해야 다음날 새벽 3시에 출항이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육로상의 거리도 멀어 항해를 모두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면 항상 새벽 2~3시가 되니 일수로는 5일을 소비하게 된다. 

흑산도 가는 길. 박영석 대장이 뉴질랜드에서 물고기 작살 사냥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크루들이 흥미롭게 듣고 있다.
흑산도 가는 길. 박영석 대장이 뉴질랜드에서 물고기 작살 사냥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크루들이 흥미롭게 듣고 있다.

목포에서 흑산도는 서쪽이지만 방향대로 질러가질 못한다. 팔금도, 비금도 수역은 수로가 좁고 수심이 얕아 남쪽으로 진도 끝까지 내려간 뒤 조도와 하의도 사이로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 수군 133척을 대적한 명량의 썰물을 배의 왼쪽으로 받으며 진도 남녘 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여명 속에 주변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아침 햇살이 퍼지며 섬과 바다를 온통 금빛으로 물들였고 상쾌한 바람결에선 가을 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1, 2, 3차 항해 때 우릴 괴롭혔던 더위는 이제 계절이 바뀌어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프 선수인 아들 성우군과 함께 온 8,000m의 사나이 박영석은 낚시 준비를 시작했다. “두고 보세요. 오늘 점심식사는 회덮밥입니다.”

낚시에 일가견이 있다는 부자(성우군은 뉴질랜드에서 낚시를 많이 해봤다고 한다)는 점심을 해결해주겠다며 의욕적으로 덤벼들었으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조용했다. 움직이고 있는 배에서는 끄심바리 같은 트롤링 장비가 있어야 하는데 배에 준비된 것은 기껏 릴대 2개뿐이었으니 당연한 결과. 회덮밥은커녕 라면으로 점심을 떼운 박 대장 부자는 흑산도에 도착하자마자 낚시점을 수소문해 끄심바리 장비를 확보했다.

(좌)일타사피! 박 대장이 한 번에 4마리의 조피볼락을 낚아 올리고 있다.박 대장은 새벽에 어민들로부터 이른바 포인트의 위치를 귀띔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우)낚시면 낚시, 칼질이면 칼질…. 8,000m의 사나이도 집단가출호에서는 여러‘노예’중의 한 명일 뿐이었지만 맥가이버처럼 다방면에 재능을 보여 선배들의 총애를 받았다.
(좌)일타사피! 박 대장이 한 번에 4마리의 조피볼락을 낚아 올리고 있다.박 대장은 새벽에 어민들로부터 이른바 포인트의 위치를 귀띔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우)낚시면 낚시, 칼질이면 칼질…. 8,000m의 사나이도 집단가출호에서는 여러‘노예’중의 한 명일 뿐이었지만 맥가이버처럼 다방면에 재능을 보여 선배들의 총애를 받았다.

8,000m의 사나이 박영석, 낚시 솜씨도 그만
첫날의 ‘회덮밥 대신 라면’의 굴욕을 만회하려는 박영석 부자의 오기 탓에 이튿날 우이도로 향한 집단가출호는 어선으로 돌변했다. 큰소리 뻥뻥 치는 품이 불안했으나 박영석의 재능은 과연 산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전 일찍 흑산도 북서쪽 장도 앞에서 회심의 낚시를 드리운 박 대장은 한꺼번에 조피볼락을 3마리씩 꿰어 올리며 점심거리를 마련하더니, 남서풍을 받아 서쪽으로 항진하는 배 위에서 끄심바리로 한창 제철인 삼치를 낚아 올리기 시작했다.

아들과 파트너가 되어 한 사람이 고기를 끌어 올리면 다른 한 사람은 낚싯줄을 정리하는데 손발이 척척 맞는다.

“아빠, 몇 마리 잡을까?”
“여기 있는 선원들이 내일까지 먹어야 하니까 한 사람당 2마리씩.”

박 대장 부자는 평균 3분에 한 마리씩 삼치를 잡아 올렸다. 초반에 잡힌 삼치는 박 대장의 익숙한 칼질에 회로 떠졌다. 크루들은 박 대장의 칼질이 끝나자마자 도마 위에서 그대로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회로 먹고 남은 생선들은 저녁 식사 때 쓰기 위해 깔끔하게 손질한 뒤 소금을 뿌려 이물에 걸어 말렸다.

출항 전날 심한 몸살(신종인플루엔자가 아닌가 걱정했으나 과로로 인한 단순 몸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에 걸려 입원한 탓에 이번 항해가 시작된 뒤 처음으로 결석한 허영만 선장은 병실에서 30분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항해 첫날 새벽, 목포에서 진도 남쪽 끝을 빠져나와 북서진하며 만난 섬들. 마침 아침 안개가 자욱해 신비로웠다.
항해 첫날 새벽, 목포에서 진도 남쪽 끝을 빠져나와 북서진하며 만난 섬들. 마침 아침 안개가 자욱해 신비로웠다.

“그래, 나 없으니까 재미있냐?”(허)
“재미라기보다는……삼치가 많이 잡히는데요?”(필자)
“야! 지금 염장 지르는 거 맞지?”(허)
“염장이라기보다는……삼치회가 아주 살살 녹는데요?”(필자)
“이런, 젠장할…….”(허)

허 선장에 대한 ‘염장질’은 정상욱 부선장이 삼치회 파티 장면을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허 선장에게 전송한 대목에서 절정에 달했다.

소금 뿌려 뱃전에 걸어 말린 삼치는 우이도에 도착해 깡그리 먹어치웠다. 선창에서 나뭇가지를 주워와 피운 모닥불에 석쇠구이로 요리된 삼치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눈으로는 좌초한 배를 걱정스레 바라보면서도 크루들의 젓가락질은 쉼 없이 계속됐다.

우이도 사구는 돈목해변의 북쪽 끝과 연결된 곳으로서 남서풍과 북동풍이 번갈아가며 해변의 모래를 구릉 위로 불어 올려 자연적으로 생성시킨 모래언덕이다. 미디어를 통해 사구의 존재가 알려진 뒤 많은 사람이 찾은 탓에 사구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려 지금은 자연휴식년제가 적용되어 출입금지구역이 됐다.

(좌)스피네커를 펼치고 우이도 돈목항으로 진입 중인 집단가출호. 이곳까지는 수심이 충분했으나 200여m 더 진입하자 퇴적된 모래로 인해 수심이 급격히 낮아졌다.(우)벽돌로 만든 아궁이에 주워온 잔가지로 불을 피워 삼치와 볼락을 직화구이로 요리하고 있다. 어느새 날이 쌀쌀해져 저녁엔 불기운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좌)스피네커를 펼치고 우이도 돈목항으로 진입 중인 집단가출호. 이곳까지는 수심이 충분했으나 200여m 더 진입하자 퇴적된 모래로 인해 수심이 급격히 낮아졌다.(우)벽돌로 만든 아궁이에 주워온 잔가지로 불을 피워 삼치와 볼락을 직화구이로 요리하고 있다. 어느새 날이 쌀쌀해져 저녁엔 불기운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온갖 돛 골고루 펼치고 쏜살같이 달리다
싸늘한 초가을 아침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성촌마을과 돈목해변에서 아침 산책을 즐긴 크루들은 오전 7시에 ‘좌초의 현장’ 우이도를 떠났다.

되도록 현지 음식 재료를 구입, 직접 요리해 먹는다는 집단가출호의 항해 원칙에 따라 배에 준비된 식량은 비상시에 대비한 장기 보존식품 몇 가지를 제외하면 쌀과 양념류밖에 없다. 이날 점심도 하의도 남쪽 8마일쯤에서 만난 주낙 어선으로부터 간자미 몇 마리와 숭어를 사서 숭어는 회로 먹고 간자미는 마늘, 간장, 고춧가루, 풋고추 등 단 네 종류의 양념으로 조림을 만들어 해결했다.

생선 손질하는 것과 요리는 모두 박영석의 몫이었다. 오랜 고산 등반으로 필드 쿠킹(field cooking)의 감이 탁월한 박영석은 잡고, 손질하고, 요리하는 모든 과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주를 보이며 크루들의 미각을 사로잡았다.

돈목해변의 결 고운 백사장. 휴가철이 지난 덕분에 해변엔 우리밖에 없어 한적했다.
돈목해변의 결 고운 백사장. 휴가철이 지난 덕분에 해변엔 우리밖에 없어 한적했다.

진도를 끼고 목포로 들어가는 중에 모처럼 바람이 살아났다. 섬과 섬 사이를 흐르는 기류가 골바람이 되어 불어닥친 덕분이다. 집단가출호는 다음달 목포~제주 간 요트 레이스를 앞둔 상황. 당초 전남도와 제주도가 공동으로 마련한 공식대회였으나 신종플루 확산 우려 때문에 지자체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며 개최가 무산된 탓에 동호인들끼리의 친선 레이스로 대체됐다.

목포~제주 항로는 원래 비교적 강한 바람이 부는 곳인 데다 다음달쯤엔 북서계절풍이 시작되어 만만찮은 항해가 될 것이다. 강한 바람을 만난 집단가출호는 다음달 레이스를 염두에 두고 온갖 돛을 골고루 활용하며 훈련을 겸해 총알 같은 속도를 내며 오후 5시, 사흘 전에 떠났던 목포항 삼학도 마리나에 진입했다.<계속>


 / 글 송철웅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blog.naver.com/timbersmith
   사진 이정식 아웃도어 포토그래퍼 photo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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