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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150주년 기념 특집] 대동여지도 제작과 읽기

최선웅·한국지도학회 이사, 매핑코리아 대표
  • 입력 2011.11.15 10:27
  • 수정 2011.11.1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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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점 하나마다 깊은 의미 담겨
축척은 약 1:216,000에 산은 3,000여 개 수록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김정호는 1804년경 황해도 토산(兎山)에서 태어나 1866년경 사망했으며, 그의 나이 30세 되는 1834년에 청구도(靑邱圖)를 제작하고, 1857년에 동여도(東輿圖), 1861년에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으며, 1822년경부터 1834년까지 <동여도지(東輿圖志)>를 편찬하고, 1849년부터 1864년까지는 <여도비지(輿圖備志)>를, 1851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는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편찬했다고 전한다.

김정호가 생존했던 19세기 초부터 후반까지의 조선 사회는 한마디로 근대로 들어서는 과도기로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가 일기 시작한 시기였다. 학문적으로는 실학이 활기를 띠면서 새로운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지도 제작 면에서도 기법이 개선되고 내용이 충실해져 종전의 군현지도(郡縣地圖)에서 대축척 조선전도(朝鮮全圖)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같이 조선전도가 제작될 수 있었던 배경은 저본이 되는 방안도법(方眼圖法)으로 제작된 군현지도가 있었고, 시대적 요구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있어 전국을 동일 축척으로 만든 전국도로지도가 나온 것은 1992년 성지문화사가 펴낸 <10만 道路地圖(도로지도)>가 처음이다. 이 지도책이 제작될 수 있었던 배경도 조선전도의 제작과 비슷하다. 기도(基圖)가 되는 5만분의 1 지형도가 1974년에 국립지리원(현재의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작되었고, 1980년대 이후 경제 발전과 더불어 레저와 마이카 붐이 일면서 도로지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청구도 건, 곤. 위 지도는 청구도 건(乾)권 16층 14ㆍ15판이고, 아래 지도는 곤(坤)권 17층 14ㆍ15판이다.
청구도 건, 곤. 위 지도는 청구도 건(乾)권 16층 14ㆍ15판이고, 아래 지도는 곤(坤)권 17층 14ㆍ15판이다.

청구도에서 보는 옛 지도 제작방법
대동여지도의 제작방법을 알기위해서는 김정호가 가장 먼저 제작한 청구도의 제작방법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구도는 그 체제나 형식, 지도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국지도였으며 특징적인 것은 일정한 축척으로 전국을 세로 29층, 가로 22판으로 나누어 건곤(乾坤) 두 책으로 엮은 것이다. 건(乾)권에는 1·3·5층 순으로 홀수 층만 실었고, 곤(坤)권에는 2·4·6층 순으로 짝수 층만 실어 그림과 같이 건권과 곤권을 위 아래로 연결해 넓은 지역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최한기(崔漢綺, 조선 후기의 실학자)가 쓴 청구도제(靑邱圖題)와 김정호가 작성한 청구도범례(靑邱圖凡例)는 당시 지도제작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과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원문은 1970년 초 백린(白麟, 서지학자), 이병도(李丙燾, 사학자), 성락훈(成樂熏, 한학자) 등이 번역 교열했으나 지도제작에 대한 번역이 난해한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주를 붙여 재해석했다.

청구도의 서문 격인 청구도제의 내용은 당시 지도제작 상의 원칙을 밝힘과 아울러 김정호에 대한 유일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는 최한기의 주석이다. 

『생각컨대 여도(輿圖, 지도)의 제작은 획야분주(劃野分州, 필자 주(註): 중국 하夏나라의 우禹왕이 중국을 9주로 나누었다는 데서 비롯된 말)에서 시작되어 경선과 위선을 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월식이 빠르거나 늦어져도 경선은 달라지지 않는다.[하늘의 1도가 땅의 200리가 되고, 시時로는 4분이 된다. 월식 때 동서의 시각차가 4분이니 동서간의 거리가 200리가 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시분時分의 많고 적음의 비례로 추측하고, 그 지역 경도의 원근은 달라지지 않는다] 또 북극성의 고저를 추측해도 위도는 한정이 있다.[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200리면 북쪽 끝 땅의 높이가 1도이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200리면 남쪽 끝 땅의 높이가 1도이니 두 곳의 거리가 수천 리에 이를 수도 있다] 이는 바로 천문관측으로 지형을 두루 굽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조 신해년(辛亥年, 1791년)에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의상(儀象, 필자 주: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으로 밝혀 선표(線表, 방안선)에 따라 지역을 분별하니, 목부(牧府) 112개와 군현(郡縣) 222개를 산수의 형세에 따라 나누었다. 경도 154와 위선 280여로 바다와 육지의 방위를 바로잡으니 이야말로 방위와 위치를 정하는 좋은 본보기요, 체국경야(體國經野, 필자 주: 주례에서 나온 말로 도시를 건설하고 토지를 개혁한다는 뜻)하는 법칙이다.<중략>

친우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도지(圖志, 지도와 지지)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점을 자세히 살펴 시간 날 때마다 확론(確論, 명확하게 논의)하고, 간편한 비람식(比覽式, 필자 주: 선을 나누어 그릴 때 쓰는 방식이나 도구로 추정됨)을 구해 방안선을 그렸으나 물줄기를 자르고 산줄기를 끊고 모든 고을을 흩어 놓았으니 참으로 땅의 주위를 살피기 어려웠다. [위의 두 구절은 종래 지도의 폐단을 밝힌 것이다. 한 장의 종이에 이수(里數)에 따라 바둑판과 같이 선을 그린 후 물줄기와 산줄기를 그 위에 그리니 물줄기가 끊어지고 산줄기가 잘라져 보인다. 또 334개 주현을 각각 규격이 같은 종이에 그리니 작은 고을은 넓어졌고, 큰 고을은 작아져 땅의 주위를 살핌에 있어 촌(寸)을 척(尺)으로 헤아리는 것과 같아 항상 헛갈리기 일쑤였다]

이에 전폭을 구획에 맞춰 쪼개어 우화정전(禹畵井田, 필자 주: 禹왕이 중국 전역을 1리 사방의 우물 정자 모양으로 나누었다는 고사)을 본받아 가장자리 선에 당시의 역산표(曆算表, 필자 주: 책력과 산술을 나타내는 표)를 써넣고 혹은 올리고 혹은 내려서 넓이와 형세(形勢, 필자 주: 산의 모양과 지세를 이름)를 맞추었다. <중략> 차례를 따라 펴보면 완연한 한 폭의 전도(全圖)요, 접어서 책을 만드니 팔도의 모습이 뚜렷하다. 이는 실로 배수(裵秀, 필자 주: 중국 진나라의 지도학자)의 6체(六體)가 후대에 이르러 더욱 분명하다. [지도를 제작하는 데는 여섯 가지 격식이 있다. 첫째 분율(分率)이니 땅의 넓이를 일정하게 나누는 것이요, 둘째 준망(準望)이니 이쪽과 저쪽의 방위와 방각을 바르게 하는 것이요, 셋째 도리(道里)이니 이쪽과 저쪽의 거리를 정하는 것이요, 넷째 고하(高下)이니 땅의 높고 낮음을 말하는 것이요, 다섯째 방사(方邪)이니 바르고 비뚤어진 것을 말하며, 여섯째 우직(迂直)이니 굽은 것과 곧은 것을 말함이다. 이 여섯 가지는 각각 그 땅에 따라 지도를 만드는 것이니 평탄하고 험한 것을 비교하고, 멀고 가까운 것을 살펴 그 형태를 밝힌다는 뜻이다]』

청구도의 지도식. 청구도의 지도제작 방법과 기호 등을 지도상에 표시한 지도식(地圖式).
청구도의 지도식. 청구도의 지도제작 방법과 기호 등을 지도상에 표시한 지도식(地圖式).

청구도 제작의 규범과 지도 읽기에 관해 쓴 청구도범례는 9개 항의 설명과 지도식(地圖式) 그리고 지도의 주기(註記)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청구도 제작과 관련된 요점만 풀이한다. [ ]는 김정호의 주석이다.

제1항의 내용은 종래 지도의 폐단과 전국지도의 제작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지지(地志)는 지도의 근원이다” 했는데 지지는 지리지(地理志)와 같은 말로서 지역 정보에 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으로 지도와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정조 때에 이르러 모든 주군(州郡)에 명하여 그 지방의 지도를 만들어 올리게 하였더니 경위선식(필자 주: 당시의 경위선이란 가로 세로 방안좌표를 뜻함)이 있고 혹은 8도로 분폭하고 혹은 주현으로 나누는 등 임의로 판단하여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정철조(鄭喆祚, 1730~1781년, 필자 주: 학자 겸 화가로 천문학과 지도제작에 조예가 깊음), 황엽(黃燁, 필자 주: 1666~1736년 <여지도輿地圖>와 <지도영의地圖衍義>를 제작함), 윤영(尹鍈, 필자 주: 이순신의 서외손으로 <항부도기恒符賭奇>란 지도를 제작함)이 만든 것이 가장 우수했다.
대개 종이 크기에 한정이 있어 도본(道本, 필자 주: 행정구역을 그린 기본지도) 전폭 안에는 방면(坊面, 필자 주: 읍ㆍ면ㆍ동리의 행정단위)과 분계선을 다 넣기 어려워 자세함을 다할 수 없고, 주군각본(州郡各本, 필자 주: 각 지방의 기본지도)은 그 지역이 넓거나 좁거나, 길거나 짧거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한 판에 배치하자니 경위선의 간격이 넓거나 좁은 구분이 생기고, 경계를 살핌에 있어 표(表)를 찾기 어려운, 즉 관규(管窺, 필자 주: 견식이 좁음을 이르는 말)의 폐단을 금치 못한다. 고로 대폭의 전도를 가지고 층판(層版)으로 국정(局定, 구획하여 정함)해 비늘처럼 잇달아 책을 만들었으니 거의 두 가지 결점이 없게 되어 지지에 실린 바와 전에 만든 지도를 서로 견주어 고찰할 수 있다.』

제2항은 지도표현 방식과 생략기법에 대한 설명이다.
『줄기와 물줄기가 땅의 근골과 혈맥이 되어 하천의 길이가 수십 리 혹은 수백 리에 이르고, 산이 에워싸고 있는데 사방 한 치가 되는 10리 선 안에 비록 파리 대가리만큼 작은 글씨로 쓴다 할지라도 산과 물의 명칭을 두세 개밖에 쓰지 못하는데 어찌 거기에 읍창(邑倉)ㆍ방면ㆍ역원(驛院)ㆍ진포(鎭浦) 등 여러 가지 명칭을 다 쓸 수 있겠는가. 또 지도에서 작은 하천이나 산봉우리, 동리 명을 찾다가 없으면 소홀해 빼먹었다고 하는 자는 지도 만드는 법을 모르는 자다. 또 옮겨 쓴 것 같지 않고, 한 산에 두 가지 이름이 있어 속칭이 때에 따라 현재의 명칭과 다르면 실로 다툼이 생기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다만 이 지도를 가지고 산수의 형세와 군읍의 동서(東西) 방위와 도리의 멀고 가까움과 고개와 골짜기의 험하고 평탄함을 살필 것이니 이것이 지도 그리는 방법의 이치이며, 경륜의 중요함이다.』

제3항은 자료마다 지명이 다른 점을 설명한 것이다.
『산 이름과 읍간의 거리가 지지 간행자마다 다른 것이 있다. <중략> 또 지도에 표기된 것과 지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선 옛 지도에 있는 대로 따르고 뒤에 생각하기로 한다.』

제4항은 지지에 기록된 지명의 위치가 전위되었거나 과장된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수는 읍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혹은 동남, 동북으로 나뉘어 있다. 가령 동쪽 몇 리라 한 것은 역원이나 진보(鎭堡) 등의 명칭이 서쪽에 있지 않고 동쪽의 위 또는 아래에 있다고 해서 정확함을 잃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상하좌우가 약간 틀림이 있다 하여 지도 전체를 잘못 됐다고 하면 참량(參量)하는 도리가 아니다.』

제5항은 읍ㆍ면ㆍ동리 명의 통일에 관한 설명이다.
『방면의 명칭이 서로 달라 관북에서는 사(社)라 하고, 관서에서는 방(坊)이라 하고, 해서에서는 방 또는 면(面)이라 하고, 삼남에서는 방이라 부르는 곳이 서너 읍에 불과하고 대부분 면이라 하여 그 칭호가 통일되지 못하여 혼잡하므로 그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칭호에 따라 모두 면이라 하였다.』

제6항은 지형을 간략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땅위에 서로 이어 있어 골이 깊은 곳에 산이 솟고 수원이 갈라지는 사이로 산줄기가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으니, 꼭 산줄기를 다 이으면 지면이 어지럽고 본질을 잃기 쉬우므로 이름 난 산 서너 개만 표기한다.』

제7항은 기호와 지명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다.
『옮겨 쓸 때 서너 자로 된 명칭을 가로 또는 세로로 썼지만 두세 번 다시 옮겨 쓸 때는 그 소재(所在, 필자 주 : 제 위치)를 잃기 쉽다. 그래서 진보ㆍ사원ㆍ역창 등의 글자는 그 위치에 써 넣되 ○○보ㆍ○○창의 ○○은 자리에 따라 가로 또는 세로로 썼다.』

제8항은 부록 지도에 대한 설명이고,
제9항은 지도도식과 지형지물의 총묘(總描, generalization) 및 위치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지명이 바뀐 것과 읍과 진이 이전한 것은 수시로 개정해야 하지만 일정한 범례에 따라 합쳐 한 질로 만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범례가 정확지 못하면 각 군에서 수집한 것이 자세한 것도 있고 간략한 것도 있어 통일하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규칙과 범식을 정하여 지도와 지지를 서로 대조하면 당시 조정과 관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 될 것이다.
지도라는 것은 지계(地界, 필자 주: 땅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의 넓이를 정하고 산수(山水)의 복잡함을 분별하는 것이니, 먼저 모든 읍의 지형을 나누어 그린 것을 각 읍에 보내어 그 읍으로 하여금 별폭에 모사케 하여 넓이나 틀린 것을 바로잡은 다음 산수의 복잡함을 바로잡아 세밀하게 하고, 지면에 읍 소재지를 그린 후 사방을 12위로 나누어[주위에 12자를 표기한다] 읍을 중심으로 가는 선으로 동심원을 긋고 [만약 방괘로 만들게 되면 네 귀에 이수가 4방위 쪽보다 멀어지므로 평평한 원보다 균일하지 않다] 이 때 원의 간격은 10리로 한다. 예로 북쪽 가장자리에서 읍까지의 거리가 100리면 원을 10개 긋고, 남쪽 가장자리에서 읍까지의 거리가 120리면 원을 12개 그린다. 이와 같이 주위의 넓이에 따라 읍까지의 거리가 가장 먼 이수에 따라 원을 그린다. 만약 읍 소재지가 한쪽으로 치우쳐 남쪽 가장자리까지 10리밖에 되지 않고, 북쪽 가장자리까지는 90리가 된다면 원이 남쪽으로는 2개, 북쪽으로는 9개가 될 것이다. 이는 방원구곡(方圓句曲, 필자 주: 모나거나 둥글며 굴곡이 있음)한 읍계가 제 모양을 잃지 않고 지면에 알맞게 배치되도록 한 것이다.
물줄기의 흐름이 모이고 합쳐진 것을 헤아리고, 산줄기의 갈라진 것을 분별해 어떤 물줄기가 어느 쪽 몇 리 되는 곳에서 발원하여 몇 리를 돌아왔고, 어느 물줄기는 어느 쪽 몇 리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돌아 어떤 물줄기와 합류해 어느 쪽으로 몇 리를 흐른다는 것을 동심원 수에 의해 물줄기의 크고 작음을 알게 한다. 산이 있는 곳에는 산을 그리되 산봉우리를 많이 그리지 말고 형세만 갖출 것이며, 높은 봉우리는 여러 겹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톱니처럼 그린다.
들판은 넓게 하고, 진보ㆍ사원(院)ㆍ 봉(烽)ㆍ역(驛)ㆍ창(倉)ㆍ방면ㆍ영액(嶺, 
험준한 산)ㆍ산성ㆍ사찰ㆍ시장 등을 자세하게 제 위치에 그려 넣고 바깥 주위에는 경계를 나누어 쓰되 5~6개의 읍이 연결되어 있어도 필히 위치에 따라 모두 써 넣는다.』

이밖에 지지에 관한 설명이 있으나 생략하고, 지도 제작법에 대한 것만 설명을 옮기기로 한다.

『지도를 그리는 법은 기하원본(幾何原本, 필자 주: 1605년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의 전반부를 한문으로 번역한 책)에 나타나 있다. 지도를 그리는데 축소해서 작은 지도를 만들거나 혹은 확대해서 큰 지도를 만들 수 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갑을병정’이란 지도를 축소해서 원도의 4분의 1 크기로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지도상에 임의로 수를 나누어 가로 세로 선을 긋는다. 다음 갑을병정의 4분의 1 크기로 그린 4각형 테두리 안에 갑을병정과 같이 가로 세로 선을 긋는다. 그 다음 원도에 그려져 있는 산천ㆍ성곽ㆍ촌서(村墅, 필자주: 마을과 농막)ㆍ임원(林園) 등을 네모 칸에 맞춰 그려 넣으면 ‘무기경신’과 같은 지도가 된다.
한편 도면에 가로 세로 선을 긋는 번거로움을 없앤 방법으로는 밑이 비치는 얇은 종이를 길이와 넓이에 따라 자른 후 가로 세로 선을 긋고, 축소할 작은 종이에도 같은 방법으로 가로 세로 선을 그린다. 그 다음 선을 그린 종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그릴 종이를 올린 후 비쳐지는 선에 따라 옮겨 그리면 산영수회(山水回, 필자 주 : 산이 둘러싸고 물이 돌아 듦)의 범위가 틀리지 않는다.{후략}』

지도 축소 방법. 청구도범례에 나오는 지도 축소 방법
지도 축소 방법. 청구도범례에 나오는 지도 축소 방법

옛 지도와 비교한 현대 지도 편집
이상 청구도제와 청구도범례에 나오는 지도 편집과 제작의 원칙이나 기본적인 방법은 현대 지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지도를 축소하거나 확대하는 일은 현대에서도 많이 사용되던 방법이다. 옛날 지도제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 지도의 편집방법을 알아보기로 한다.

지도를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 제작방법에 따른 분류로는 지도를 실제 측량해서 제작한 것인지, 아니면 편집해서 제작한 것인지에 따라 실측도(實測圖)와 편집도(編輯圖)로 구분한다. 편집도는 지도 제작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수집해 그것을 분석 평가한 후 사용목적에 따라 편집한다. 이때 지도는 거의 축소해서 사용하고 목적에 부합하는 도식(圖式)을 만들어 지도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편집도의 제작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지도 편집을 하려면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첫째 요건이다. 자료라 하면 그 종류가 수없이 많고 다양하겠지만 크게 저본이 되는 기도(基圖)와 일반적인 자료로 나눌 수 있다. 기도는 지도편집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편집해야 할 지도보다 축척이 크고, 최신 정보가 담긴 것이라야 한다. 일반적인 자료란 지도의 내용과 표현에 필요한 모든 자료로서 지형이나 하천, 도로, 철도, 경계, 도시, 인구, 지명 등을 비롯해 각종 통계자료, 안내서, 여행기, 신문, 잡지 등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는 근거가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자료를 분석 평가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

지도 편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도의 축소와 확대다. 지금은 복사기로도 간단하게 축소 확대가 가능하나,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도면을 축소하거나 확대하려면 사진제판용 카메라를 이용하거나 도형을 임의의 크기로 축소 확대해서 그릴 수 있는 팬토그래프(pantograph)란 기계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기계는 워낙 고가여서 국내에서는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청구도범례에도 나오는 방안전사법(方眼轉寫法)이다. 이 방법은 기계에 의한 방법보다는 정확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언제 어디에서도 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고, 특히 지도의 도법(圖法)을 변경할 때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방법이다. 소축척의 세계지도를 제작할 경우 원도와 다른 도법으로 작도(作圖)할 때 이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지도는 어차피 축소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숙명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지표상의 모든 것을 지도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따라서 축소 비율에 따라 취사선택과 생략이 이루어지고, 중요한 지형지물을 과장하거나 단순화해서 기호로 표시하고, 제 위치에 표시하기 어려울 때는 그 위치를 이동하는 등 표현의 한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지형도를 제작할 때 도식적용규정에 명시된 표시대상과 일반원칙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형도에 표시하는 대상물은 영속성이 있는 현존물(現存物)과 건설 중인 시설물을 우선 표기하고, 영속성이 없는 것이라도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은 표시할 수 있다.
• 표시할 대상물의 취사선택은 중요도와 형태를 충분히 고찰해야 하며, 그 형태 표시가 실제와 다르게 표현되지 않도록 묘사해야 한다.
• 표시 대상물은 실제 모양으로 표시하되 그것이 곤란한 것은 기호에 의해 표시한다.
•주기나 건물기호, 각종 목표물, 특정지구, 하천 및 바다의 인공물, 식물기호 등의 같은 색상 기호는 서로 중복을 피해야 하며, 중복될 경우에는 0.2mm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각종 기호가 다른 색상의 기호와 중복될 경우에 중복해서 표시할 수 있다.
•대상물의 기호는 진 위치에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위치의 이동 허용오차를 도상 0.5mm 이내로 하고 부득이한 경우 1.2mm까지 이동시킬 수 있다.

대동여지도 제작 공정표
대동여지도 제작 공정표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제작되었나  
최한기가 쓴 청구도제에 따르면 김정호는 20세 이전부터 지지와 지도 일에 관여했고, 최한기의 부탁으로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를 판각(板刻)할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났다. 먹 제도(墨製圖)와 스크라이빙(scribing)제도로 지도를 제작하던 1950~1980년대에도 지도제도 기술자를 뽑는 기준은 그림 솜씨를 볼 정도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도제작은 손재주가 좋고, 성격이 꼼꼼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김정호는 지지를 편찬하고 직접 지도를 그려봄으로써 지도제작의 기획에서부터 자료 분석, 원고편집, 원도작화, 판각, 제책에 이르기까지 지도제작 전반에 걸친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지식과 기술을 지닌 전문가로 현대로 말하면 맵 아트 디렉터(map art director)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예시하는 <대동여지도 제작 공정표>에 따라 대동여지도가 어떠한 절차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지도제작은 기획에서부터 시작된다. 기획의 첫 단계는 지도의 사용목적을 정하는 일이다. 지도를 분류할 때의 기준은 사용목적, 제작방법, 축척, 표현방법, 형식, 매체, 투영도법 등의 따라 분류하는데 이 가운데 사용목적에 따른 분류를 대분류라 하여 지도를 분류하는 방법 가운데 대표적인 방법으로 쓰인다.

사용목적에 따라서는 일반도와 주제도, 특수도의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일반도(一般圖)는 여러 가지 목적에 사용된다고 하여 다목적 지도라고도 하며 국가 차원에서 제작되는 지형도가 대표적이다. 주제도(主題圖)는 어떠한 목적이나 특정한 주제에 따라 제작되는 지도로 토지이용도나 지적도, 도로지도, 관광안내지도, 등산안내지도 등 일반도 이외의 모든 지도가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수도(特殊圖)는 사진지도, 입체지도, 조감도, 점자지도 등 일반도나 주제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지도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도 사용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의 지도가 있었는데 나라 전체를 한 장에 그린 ‘조선전도(朝鮮全圖)’, 각 도의 현황을 그린 ‘도별도(道別圖)’, 수도 한성이나 큰 도성을 그린 ‘도성도(都城圖)’, 지방의 목부군현을 그린 ‘군현도(郡縣圖)’,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된 ‘관방도(關防圖)’ 그리고 세계지도 등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부터 전국을 대축척으로 만든 조선도(朝鮮圖)나 대동여지도와 같은 전국지도(全國地圖)가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지형도와 같은 일종의 국가기본도라 할 수 있는 지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동여지도는 행정이나 국방 등의 목적으로 다량 배포를 위해 목판본으로 제작하기로 기획되었을 것이다. 대동여지도 제작이란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재정지원과 지휘 감독을 맡을 관리를 비롯해서 제작진행을 전담할 지도제작 전문가, 판각(板刻)을 담당할 각수(刻手), 지도를 찍어낼 인출장(印出匠), 제책을 담당할 기술자 그밖에 용지나 먹ㆍ판재(板材) 등을 조달할 인원 등 대략 8~9명으로 진용을 짰을 것이며, 이 가운데 김정호는 지도제작 전문가로서 제작진행을 맡았을 것이다.

동여도와 대동여지 비교. 왼쪽은 동여도, 오른쪽은 대동여지도. 두 지도의 내용이 같아 보이나 동여도가 대동여지도보다 지명이 많다.
동여도와 대동여지 비교. 왼쪽은 동여도, 오른쪽은 대동여지도. 두 지도의 내용이 같아 보이나 동여도가 대동여지도보다 지명이 많다.

둘째, 지도 제작할 때는 편집 작업으로 우선 필요한 자료 수집이다. 김정호가 대동지지를 편찬하면서 참고한 문헌목록이 60여 권에 이르는 것을 보면 당시 지지와 지도를 제작하는 데 많은 자료가 참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를 분석해 어떤 자료가 최신 정보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를 가려내어 저본으로 삼을 자료, 부분적으로 참고할 자료 등을 선정해야 한다. 자료의 분석 작업은 지리에 밝고, 지도제작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이 역시 김정호가 담당했을 것이다.

그 다음 책자의 크기에 맞춰 지도의 크기(축척)를 정하고 그에 따라 도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 정한다. 김정호는 동여도를 제작할 때 분명 널찍한 대청마루에 청구도의 전 도엽을 잇대어 펼쳐놓고 층과 판을 짜느라 고심했을 것이다. 최근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전국지도책의 색인도를 보면 청구도나 동여도와 같이 층판을 나누어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0만 도로지도>의 경우 남한 전역을 동일 축척으로 A4(국배판) 크기에 맞춰 세로 20층, 가로 최대 8판으로 나누어 총 124면으로 책을 꾸몄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같이 조선 전국을 세로 22층, 가로 19판으로 나누어 총 120판으로 구성하였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지도의 품질을 좌우하는 지도표(地圖標), 즉 도식(圖式)을 정하는 일이다. 도식은 지형의 표현과 지물의 기호, 주기의 위치 등 시각적으로 목적에 맞는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규정으로 지도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청구도에도 지도식이라 하여 지도상에 직접 바다·섬·강·산·읍성·목장·못·다리·고개·봉수·누각 등의 기호가 있고, 동여도에는 12항 26종의 기호를 나타낸 지도표가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14항 22종의 기호를 표시한 본격적인 지도표가 등장한다.                  

그 다음 단계로는 지도표에 있는 기호 외에도 산줄기, 하천, 해안선, 섬, 행정계, 도로, 성벽 등의 기호와 서체에 이르기까지 지도제작에 필요한 시방서를 작성한 다음 시방서에 따라 직접 한 도엽을 골라 본보기 지도(파일럿 지도)를 제작한다. 이 본보기 지도는 전체 제작공정의 모범이 되기 때문에 몇 번의 수정을 거치더라도 완벽한 것이 되도록 한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를 비교해 보면 내용상으로는 비슷하나 지형지물의 표현이나 기호, 지명의 표기 량 등이 다르므로 판각(板刻)을 위한 원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본보기 지도대로 지도의 골격을 잡는 편집원고를 만들어야 된다.

편집원고가 작성되면 그 위에 원도용 용지를 올린 후 원도작도(作圖)에 들어간다.  이때 지도 전체가 동일한 품질을 유지하도록 작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빠지거나 틀림이 없도록 세심하고 정확하게 작도해야 한다. 작도가 끝난 뒤에는 검수책임자가 편집원고대로 틀림없이 작도되었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수해야 한다. 판각작업은 한번 실수하면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완벽한 원도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편집원고 작성과 원도작도 역시 김정호가 직접 하거나 적극 관여했을 것이다.

양각법과 대동여지도 목판. 대동여지도 판각에 쓰인 양각법(陽刻法). 대동여지도 목판이 45° 각도로 양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각법과 대동여지도 목판. 대동여지도 판각에 쓰인 양각법(陽刻法). 대동여지도 목판이 45° 각도로 양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도를 새길 판재(板材)의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판재의 경우 배나무나 감나무, 대추나무, 박달나무 등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크기로 자른 후 소금물이나 물웅덩이에 2~3개월 동안 담가 나뭇결을 삭힌 다음 방충과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소금물에 삶아 말려야 한다. 잘 건조된 판재는 대패질로 판면을 매끈하게 고르고, 판재 가장자리에는 손잡이가 되는 마구리를 만들어 끼운다.

소재구(蘇在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의 논저 <金正浩 原作 大東輿地圖 木板의 調査(김정호 원작 대동여지도 목판의 조사)>에 따르면 대동여지도 판각에 사용된 판재는 피나무로 알려졌고, 일반적인 목판과 달리 두께는 1.5cm 내외로 매우 얇았으며 손잡이도 없었다고 한다. 판재의 크기는 가로 43cm, 세로 32cm로 판재의 비례가 일반적인 것과는 매우 다르게 제작되었으며, 특이한 것은 판재를 아끼기 위해선지 판재 양면에 판각을 했으며, 층ㆍ판에 따라 원도가 작아 판면이 남는 경우에는 한 면에 2개 또는 3개의 도엽을 새기기도 하였다.

작도된 원도를 판재에 붙이는 작업 또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원도를 붙이는 풀은 쌀가루나 찹쌀가루를 물로 반죽해 매끄럽게 쒀야 한다. 이때 반죽을 너무 되게 하거나 묽게 해서는 안 된다. 판재에 풀을 고루 칠한 다음 원도를 뒤집어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재빨리 붙여야 하고, 그 위에 다시 한 번 풀칠을 한 뒤 말린다. 종이가 마른 뒤에는 원화가 잘 보이도록 들기름이나 콩기름을 얇게 바른다.

새김질에 쓰이는 도구로는 서각도(書刻刀)와 끌, 망치, 숫돌 등이 있다. 서각도에는 창도(槍刀)·환도(丸刀)·삼각도(三角刀) 등의 종류가 있으나 이 가운데 기본적으로 쓰이는 것은 창도이다. 전통적인 창도는 굴곡 면을 새길 때 자유자재로 방향을 꺾을 수 있도록 칼날은 양날 형이고, 칼날의 각도는 35~40도 정도가 적당하나 선과 글자의 크기나 굵기에 따라 편리하게 각도를 조절해서 사용한다.

대동여지도 목판. 대동여지도 17층 4판의 목판, 대구ㆍ영천 부근
대동여지도 목판. 대동여지도 17층 4판의 목판, 대구ㆍ영천 부근

대동여지도와 같은 인출용 판각은 선과 글자가 튀어 나오는 양각(陽刻)을 한다. 양각은 음각과 달리 선이나 글씨 부분을 그대로 두고 주위 부분을 떠내는 각법(刻法)으로 서각도를 45도 각도로 눕혀서 새긴다. 새김질을 할 때는 실수로 선이나 글자 획수 하나라도 날아가면 수정이 어려워 낭패를 본다. 그래서 새김질의 과정은 판각 제작의 마지막 단계이며 가장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서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 대동여지도와 같이 복잡한 지도를 새기는 각수(刻手)는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이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새김질이 끝나면 조심스레 물을 축여 종이를 떼어낸 후 인출(印出) 작업에 들어간다. 인출용 용지는 판재에 맞게 일정한 크기로 재단해 먹물과 함께 준비한다. 먹솔에 먹물을 적당히 묻혀 판각본에 골고루 칠한 다음 인출지를 그 위에 놓고 말총을 뭉쳐 만든 문지르개로 인출지 위를 고루 문지르거나 가볍게 두드린다. 이때 인출지가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도를 찍은 인출지는 교정책임자가 판각이 잘 되었는지 선이나 글자가 잘 찍혔는지 꼼꼼하게 교정을 봐야 한다. 대동여지도 표지에 ‘古山子校刊’이란 주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최종 교정은 제작진행을 맡은 김정호가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책이나 지도를 만드는 종이나 먹 등의 재료가 풍부하지 않고,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어려웠기 때문에 작업규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책의 교정과 인쇄를 담당하던 교서관(校書館)의 인쇄관련 규정을 보면 소속 장인들이 책 한 권에 글자 한 자가 틀리거나 인쇄가 희미한 글자 한 자만 나와도 곤장 30대를 맞았다고 한다. 이런 것으로 봐서 대동여지도의 제작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작업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끝으로 지도의 제책작업이다. 인출된 도엽은 층별과 판의 순서를 맞춰 정리한 후 층별로 도엽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길게 이어 붙여 병풍처럼 접는다. 대동여지도 완성본의 규격이 가로 20cm, 세로 30cm이므로 이 규격에 맞춰 층별로 도엽을 이어 붙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제책이 끝난 22층을 가지런히 쌓으면 대동여지도 한 질이 되는데 이러한 제책 법을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이라 한다. 인출작업을 마친 뒤에는 판목을 깨끗이 닦아 말린 다음 목궤에 넣어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존한다.

방안편
방안편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읽어야 되나
청구도에는 건곤으로 나눠 지도를 찾아 볼 수 있는 색인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本朝八道州縣圖總目)이 들어 있으나 대동여지도에는 이 같은 색인도가 없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와 달리 분첩절첩식으로 제책되어 책자 형태보다는 원하는 도엽 찾기가 수월했을 것이나 원하는 도엽을 쉽게 찾기 위해서는 별도의 색인도를 만들어 사용했을 수도 있다.

대동여지도 축척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나 옛 지도는 실제 측량한 지도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축척을 논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대동여지도 본문 앞에 실려 있는 방안편(方眼片)은 지도상의 거리 측정은 물론 지도의 축척도 계산해 낼 수 있다. 방안편은 지도 1면의 크기로 가로 8칸, 세로 12칸으로 그려진 것으로 내부에는 ‘每方十里 每片 縱百二十里 橫八十里’라고 거리를 적고, 대각선 거리는 ‘十四里’라 적었다. 이는 모눈 한 칸의 거리가 10리요, 방안편의 세로 12칸의 거리는 120리요, 가로 8칸의 거리는 80리란 뜻이다.

모눈 한 칸의 도상 길이를 재보면 약 2.5cm이므로 도상 거리 10리를 미터로 환산하면 현대식 축척을 계산해 낼 수 있다. 성남해(成南海, 측지기사)의 글 <靑邱圖(청구도)와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의 縮尺(축척)과 자(尺)의 考察(고찰)>에 따르면 조선 10리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5.4km라 하였다. 그렇다면 매방 10리의 실제거리가 5.4km이므로 실제거리를 도상거리로 나눠 축척을 계산하면 축척은 1:216,000이 된다. 현대식 환산법으로 10리가 4km라면 축척 계산은 1:160,000이 된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의 위쪽이 북쪽인 방위 개념을 도입한 지도다. 이는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정의된 것이 아니라 청구도 지도식에도 나오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아래 단위인 십이지(十二支) 즉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방위와 대응시킨 것이다. 십이지는 동양 문화와 전통 속에 오랫동안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지기(地氣)에 속해 음양오행과 결부되며 열두 동물과도 결합되어 방위나 시각, 역월(曆月) 등 여러 가지로 이용되었다. 십이지에서 자는 북쪽이고, 묘는 동쪽, 오는 남쪽, 유는 서쪽을 가리킨다.

지도표(地圖標)와 대동여지도의 보기
지도표(地圖標)와 대동여지도의 보기

지도표는 현대 지도의 지도범례(map legend)와 같은 것으로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는 여러 가지 선이나 기호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소개하는 것으로 지도읽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대동여지도 지도표에 있는 기호는 모두 14개로 지물의 형태에 따라 다시 세분했다. 이들 기호에 대한 설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펴낸 <박물관에서 대동여지를 만나다>와 현진상(안양시청 근무)의 <대동여지도 지도표 해설>의 내용을 참조하여 풀이했다. 

•영아(營衙)는 오늘날의 군사령부인 군영(軍營)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병영(兵營, 오늘날의 육군지역사령부)과 수영(水營, 오늘날의 해군지역사령부)이 표시되어 있다. 영재읍치측무표(營在邑治則無標)라는 글은 군영이 읍치에 있는 경우 이 기호를 생략한다는 뜻이다.
•읍치(邑治)는 전국 330개 지방행정 단위의 소재지로 성이 있으면 두 개의 원(◎)으로, 성이 없으면 하나의 원(○)으로 표시하고 각각 그 안에 고을 이름을 적었다.   성지(城池)는 원래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城)의 둘레에 파놓은 못(池)을 말하나 산성과 관성(關成)을 뜻한다. 진보(鎭堡)는 지방의 군사 주둔지로 성이 있으면 두 개의 
네모로, 성이 없으면 하나의 네모로 표시했다.
•역참(驛站)은 말과 역졸(驛卒)을 두어 공문 전달과 관물(官物) 수송을 담당한 기관으로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했다. 주요 도로에 약 30리 간격으로 설치되었다.   창고(倉庫)는 관에서 운영하는 관창(官倉)으로 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했다.
•목소(牧所)는 행정이나 군사적으로 필요한 말을 먹이던 관영목장(官營牧場)으로 네모 안에 ‘牧’자를 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이것은 목장의 규모나 관리 주체를 구분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봉수(烽燧)는 횃불과 연기로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통신 제도의 하나로 여기에서는 공공의 정치나 군사적 통신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봉수대를 뜻한다.  능침(陵寢)은 임금이나 왕비의 묘(墓)로 원 안에 능호(陵號)의 첫 글자를 적었다. 시봉능호서권내(始奉陵號書圈內)라는 글은 기호 안에 능호를 써넣어 표시했다는 뜻이다.  방리(坊里)는 하위 행정구역 단위로서 지금의 동리(洞里)에 해당된다.  고현(古縣)은 폐지된 부목군현의 소재지로 성이 없는 곳, 성이 있는 곳, 구읍지(舊邑址)로 성이 있는 곳 세 가지로 구분했다.
•고진보(古鎭堡)는 옛 진(鎭)과 보(堡)로 성이 있는 곳과 없는 곳 두 가지로 구분했다.
•고산성(古山城)은 옛 산성이나 폐산성(廢山城)을 뜻함.
•도로(道路) 기호는 가는 단선(單線)으로 표시하여 중간에 방점(傍點, 현재의 지도용어로  티크 tick)을 찍었고, ‘十里二 三四’라 적었는데 이는 방점과 방점 사이가 10리라는 뜻이다. 이 방점은 지형지세에 따라 그 간격이 달라지는데 평지에서는 방안편의 모눈 한 개의 길이와 같이 약 2.5cm정도로 찍혔으나 산지로 갈수록 그 간격이 좁아져 금강산 부근에서는 그 폭이 1.5cm로 좁게 찍혀 있어 이는 산으로 갈수록 굴곡이 심해지고 경사가 급해지는 정도를 감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지형 표현은 산줄기와 물줄기로 대별할 수 있다. 산줄기의 표현은 조선 전통의 산경표(山經表)에 따라 국토 전체의 산줄기를 이어 그렸으며, 산줄기의 규모와 산의 높낮이에 따라 그 굵기에 차이를 두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은 가장 굵직하게, 대간(大幹)에서 갈라져 큰 강을 가르는 정맥(正脈)은 두 번째 굵기로, 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支脈)은 세 번째 굵기로, 지맥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산줄기는 가장 가늘게 표현하였다.

산줄기의 표현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산의 모습. 토산인 오대산은 첨형(尖形)이 표시되어 있는데, 바위산인 설악산은 첨형이 없다.
산줄기의 표현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산의 모습. 토산인 오대산은 첨형(尖形)이 표시되어 있는데, 바위산인 설악산은 첨형이 없다.

이우형(李祐炯, 지도전문가) 저 <대동여지도의 讀圖(독도)>에 따르면 대동여지도 상에는 3,000여 개의 산이 수록되었으며, 산의 규모에 관계없이 지역적이나 풍수와 관계있는 군현의 조종산(祖宗山)이나 진산(鎭山) 등을 수용했으며, 고산성과 봉수가 있는 산은 모두 수용했다. 특히 산줄기 상에 뾰족뾰족하게 첨형(尖形)으로 표시한 산이 42개가 있는데 이는 바위가 없는 산에도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암봉(岩峰)에만 표시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물줄기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하류 쪽의
쌍선하천(雙線河川)과 상류 쪽의 단선하천(單線河川)이다. 현대 지형도에서는 축소 비율에 따라 하천의 폭이나 쌍선, 단선이 결정되나, 조선시대의 화물 운반은 육로보다 뱃길을 이용하는 하운(河運)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쌍선하천은 배가 다닐 수 있는 가항하천
(可航河川)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총 1,105개의 섬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 섬의 위치는 거리와 방위에 관계없이 육지에 인접하여 배열했다. 섬의 모양은 산줄기를 그릴 수 있을 정도의 큰 섬은 해안선과 산줄기를 그려 넣었고, 그 밖의 작은 섬들은 단순히 산과 같은 모양으로 표현했으며 그보다 더 작은 섬들은 불규칙한 작은 조각 모양으로 그렸다. 이밖에 대동여지도에는 점선으로 행정경계가 표시되어 있으나 도계는 표시되지 않았고, 전국의 군현 334개와 월경지(越境地, 다른 행정구역에 둘러싸여 격리된 지역으로 비입지(飛入地) 또는 두입지(斗入地), 포령(包領)이라고도 함) 74개의 경계선만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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