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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해외 트레킹 | 그레이트 오션 워크 백패킹 종주 (下)] 하얀 포말 일으키는 파도, 쏟아지는 별빛… 상상으론 부족한 행복

글·사진 김영준 부천 미래로소아과 의사
  • 입력 2017.01.1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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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발걸음, 호주 그레이트 오션 워크 104km 백패킹하며 종주

리얀스 덴(Ryans Den) 캠핑장을 나서면 뒤로 멋진 바다가 펼쳐지는 언덕이 나타난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리얀스 덴(Ryans Den) 캠핑장을 나서면 뒤로 멋진 바다가 펼쳐지는 언덕이 나타난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8월 3일, 모두 간만의 제대로 된 잠자리인 ‘그레이트 오션 워크 리트리트’의 뽀송한 침대에서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다. 비싼 숙소에서 ‘본전 뽑고 가자’는 생각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도 한참을 늘어져 있다가 오전 10시에야 짐을 정리해서 밖으로 나왔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도 만만치 않다. 점심식사를 할 장소인 요한나 비치(Johanna Beach) 캠핑장까지 8km, 거기서 또 야영지인 리얀스 덴(Ryans Den) 캠핑장까지 14km로 총 22km를 걸어야 한다.

무지개가 떴다. 해가 났다 비가 내렸다 반복하니 무지개가 잘 생길 만하다. 캐슬 코브 뒤로 멀리 케이프 오트웨이 등대가 가물가물하다. 참 멀리 왔구나 싶다. 그러나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걷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많은 선각자들이 걷기를 예찬하며 걷고 또 걸었을까? 그리고 나는 또 왜 이 먼 호주까지 와서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각자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 각자 좋아하는 일과 추구하는 바도 다르다. 사는 동안 산에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혹은 마라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걷는 것은 어떤가? 태어나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인간에게 걷는 행위는 삶의 필연이요, 숙명이 된다. 걷지 않는다면, 걸을 수 없다면 숨을 쉬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나 비치(Johanna Beach)와 만나는 요한나강(Johanna River)을 건너는 중. 너울성 파도가 한 번씩 들이치므로 잘 살피고 조심해서 건너야 한다.
요한나 비치(Johanna Beach)와 만나는 요한나강(Johanna River)을 건너는 중. 너울성 파도가 한 번씩 들이치므로 잘 살피고 조심해서 건너야 한다.

변화무쌍한 요한나의 파도

소설가 박완서는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고 했다. 같은 행위를 즐기는 사람은 암묵적으로 그와 나는 벗이며 영혼의 교류가 가능한 ‘소울 메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걷기에 의기투합한 다섯 명의 동료는 모두 내 영혼의 동반자들이다.

드디어 요한나 비치에 다다랐다. 해변 입구에 ‘Decision Point(결정지점)’ 경고판이 서있다. 이 경고판을 천천히 자세히 읽고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말았어야만 했다. 우리는 이 표지판을 허투루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바다가 나왔다며, 신난다며 해변에서 마냥 즐거워했다. 엄청나게 큰 파도가 거대한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바다가, 그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 암수를 품고 있는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요한나강은 해안을 따라 1km쯤 흐르다가 바다로 흘러든다. 다른 우회로는 없다. 어느 지점에선가 강폭이 좁고 물살이 약한 곳을 골라 강을 건너야만 한다. 강을 탐색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강 하구에 이르렀다. 제일 좁아지는 목이었고 일견 제일 얕아보였다. 겁도 없이 저벅저벅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허리까지 차는 높은 물결이 밀어닥쳤다.

“어이구, 후퇴, 후퇴!”

예상치 못한 높은 파도였다. 아! 그랬구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는데. 약한 파도가 칠 때를 기다려 조심스레 강을 건넌다.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젖은 물건들을 꺼내놓고 모래톱에 앉아서 신발을 다시 신으려는 찰나, 엄청나게 큰 파도가 모래언덕 위로 덮쳐온다.

“파도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신발과 배낭을 들쳐 메고 혼비백산하여 뭍 쪽으로 도망친다. 결국 양말 두 짝과 스패츠 한 짝, 스틱 다섯 개가 수장되고 말았다. 그나마 스틱은 용왕님이 바로 뱉어내시는 바람에 여기저기 모래밭에서 수습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그토록 무서운 바다가 될 수 있다니. ‘요한나’라는 이름을 얻은 내력도 바로 이곳 바다의 변화무쌍한 파도 때문이라고 한다. 1843년 요한나 선장은 거친 파도를 피해 이곳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엄청나게 큰 파도가 덮쳐와 배를 삼켜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드넓은 초지가 펼쳐진 목장. 호주에서는 소들을 방목해서 사육한다.
드넓은 초지가 펼쳐진 목장. 호주에서는 소들을 방목해서 사육한다.

요한나 비치 캠핑장은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어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에이레 리버에서 이틀째를 보낸 트레커라면 이곳 요한나에서 삼일째 밤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 숙소에서 미리 만들어 온 멸치주먹밥을 먹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오늘 밤 숙영지인 리얀스 덴 캠핑장까지 남은 거리는 14km, 현재 시간 오후 3시. 아무리 서둘러도 해 지기 전에 도착하기는 힘들 것 같다.

밀라네시아 비치(Milanesia Beach) 근처의 약속된 장소에서 우리 보물창고와 접선했다. 이곳에서 리얀 덴까지는 6.6km를 더 가야 한다.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서 한국을 떠나올 때의 초심은 어디 가고 어떡하든지 무거운 배낭을 안 졌으면 하는 생각이 마음을 지배한다.

밀라네시아 비치에서도 바다로 흘러드는 개울을 만났다. 요한나 비치에서 데인 상처가 있어 작은 개울을 건너면서도 무척이나 마음이 조심스럽다. 마음이 급한데 길도 급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곳부터는 가파르게 내려섰다 급하게 오르는 경사 길이 이어진다. 전체 구간 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은 구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를 악물고 용을 쓴 끝에 오후 7시가 넘어 캠핑장에 도착했다.

저녁 메뉴는 인스턴트 짬뽕이다. 힘들게 걸으며 땀을 쏟은 까닭일까? 얼큰한 짬뽕 국물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짬뽕 너,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야!” 과연 서울에서도 이 맛이 날까?   

‘그레이트 오션 워크’라는 푯말이 세워진 초원길을 걷는다. 걷고 또 걸어도 계속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라는 푯말이 세워진 초원길을 걷는다. 걷고 또 걸어도 계속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별 세상

8월 4일,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호주의 겨울 날씨는 정말 매력적이다. 미세 먼지가 전혀 없어 코끝에 닿는 공기는 알싸하고 드맑다. 걷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오늘의 목표 지점은 렉 비치(Wreck Beach) 카 파크로 대략 11km 거리다. 그동안의 여정을 생각하면 짧은 거리지만 텐트와 침낭을 지고 걸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리얀스 덴 캠핑장과 데블스 키친(Devils Kitchen) 캠핑장은 차가 드나들기 어렵다.

여러 가지 방안들을 놓고 머리를 굴린 끝에 예약된 ‘악마의 부엌’ 캠핑장이 아니라 렉 비치 카 파크에서 야영하기로 했다. 이거야말로 길 위에 머무는 진정한 비박 노숙이다.

배낭은 무거웠지만 가야 할 거리가 짧아서 마음이 여유롭다. 벤치를 만나면 놀며 쉬며 렉 비치 카 파크에 도착했다. 다른 차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우리의 차만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캠핑장도 아닌 이곳에서 야영할 용기를 낸 것은 물이 확보되어 있는 덕이다. 우리 차는 짐차이면서 우물이고 냉장고다. 오늘의 트레킹은 모두 마쳤으므로 오후에는 해변에서 마음껏 놀면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렉(Wreck)은 난파선이라는 말로, 이곳 바다 속에는 암초가 많아 해안을 지나는 배들이 난파하는 경우가 많아서 ‘렉 비치’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물이 빠지면 바위에 박혀 있는 난파선의 커다란 닻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렉 비치(Wreck Beach)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다. 과연 배들이 뒤집어질 만한 엄청난 파도다.
렉 비치(Wreck Beach)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다. 과연 배들이 뒤집어질 만한 엄청난 파도다.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망중한을 즐긴다. 렉 비치에 황혼이 진다. 바닷가에서 잡아온 다시마와 해초, 그리고 보말 비슷하게 생긴 고동을 손질한다. 호주의 바다 생물은 어떤 맛일까? 기대보다 맹탕이다. 숙소에서 챙겨 온 건조 야채수프  조각을 세 덩이나 풍덩 넣었더니 이제 너무 짜다. 망했다. 고동을 빨아 보니 모래가 씹힌다. 또 망했다. 렉 비치에서의 수고로움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잊지 못할 추억 한 조각은 남았으니 그걸로 족하다.

새벽 2시쯤 되었을까. 화장실이 급해 잠에서 깨고 말았다. 귀찮아서 조금 버텨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다. 텐트를 열고 천막을 걷어 올리며 천천히 밖으로 나오는데, 아~ 입에서 길게 탄성이 터진다. 저 멀리 지평선 위에서부터 별이 떠서 밤하늘을 뒤덮고 반대편 땅 끝까지 온통 별이다. 아! 별 세상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5시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8월 5일, 드디어 걷기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18km. 마지막 종착지인 12사도 바위 비지터센터(Twelve Apostles Visitor Center)에 오후 1시까지 도착하는 것이 목표다.

어둠을 뚫고 랜턴을 켠 채 숲길을 걷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둘러보고 조망할 것도 없다. 조수미의 노래를 휴대용 스피커로 듣는다. 숲의 적막을 뚫고 ‘밤의 여왕’이 울려 퍼진다. 아! 음악 없는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날이 밝아온다. 프린스 타운(Prince Town)이 막 보이기 시작할 즈음 마을 쪽에서 웬 금발 미녀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온다. 길 위에서 만난 첫 번째 사람이다. 아침 조깅을 즐기는 모양이다. 키가 크고 강인한 인상이 한 마리의 야생마를 연상시킨다. 반가운 마음에 기념사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겠냐고 부탁하니 흔쾌히 포즈를 취해 준다.

겔리브랜드강(Gellibrand River)에 도착했다. 누런 억새와 어우러진 강 풍경이 무척 평화롭다. 겔리브랜드강을 끼고 작은 시골마을인 프린스 타운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제법 넓은 공간에 캠핑 시설과 캐러밴을 갖춘 사설 캠핑장이 있었지만 비수기라 문을 닫은 상태라고 했다.

언덕 위의 식당은 주유소도 겸하고 있으며 연중무휴로 아침 7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제 목적지인 12사도 바위까지 남은 거리는 7km. 그레이트 오션 워크는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이다.

트레킹 6일째. 마침내 12사도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멋진 조망 포인트.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트레킹 6일째. 마침내 12사도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멋진 조망 포인트.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숲길에서 바닷길로 접어드니 드디어 저 멀리에 12사도 바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 얼마나 만나고 싶던 그대들인가! 가슴이 벅차오른다.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가 되어 한 발씩 12사도 바위를 향해 나아간다. 바다에 우뚝 선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노라니 어떤 거룩한 신심이 저절로 마음에 스며든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 빅토리아의 상징’인 전망대에 도착했다. 12사도 바위가 가장 잘 보이는 포인트에 나무 데크로 근사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여행 떠나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찍어 올린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날이 흐리면 전망이 잘 안 보이기도 한다는데 오늘은 기가 막히게 날씨가 좋다. 결정적인 날 이리도 좋은 날씨라니, 우리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다.

깁슨 스텝(Gibson Steps)에 도착했다. 이곳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해변으로 계단을 걸어 한참 아래로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와 절벽이 압도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파도가 일으키는 거대한 물보라가 장관이다.

이른 아침 조깅을 즐기는 호주 아가씨를 만나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긴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람이 반갑다.
이른 아침 조깅을 즐기는 호주 아가씨를 만나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긴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람이 반갑다.

걸을 수 있음은 참으로 행복한 일

깁슨 스텝에서 비지터센터까지는 1.2km. 목표했던 오후 1시에 12사도 비지터센터에 무사히 당도했다. 5박6일 동안 이어졌던 104km 걷기 여행의 대장정을 끝내는 순간이다. 생각과 달리 너무 덤덤하다. 짐에 대한 부담 없이 편하게 걷기여행을 했기 때문일까? 이대로 며칠 더 걸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배낭을 무겁게 하고 거친 길을 오르내리며 고생을 했다면 마지막 순간 끝장을 본 후련함에 온 몸이 전율했을 텐데.

12사도 바위 전망대를 향한다. 비지터센터에서 전망대까지는 왕복 20분 거리다. 멋진 12사도(현재 바위 4개는 쓰러지고 8개만 남아 있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바람과 파도와 시간이 빚어낸 자연의 걸작이다.

12사도 바위 관광을 마치고 짐을 정리한 후 멜버른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비지터센터에서 서쪽으로 6km쯤 떨어져 있는 레이저백(Razorback)과 로크 아드 조지(Loch Ard Gorge)라는 곳으로 갔다.

레이저백은 이름 그대로 면도날처럼 깎아지른 바위가 아주 절경이다. 로크 아드 조지도 협곡과 종유석 절벽이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마지막 피날레를 공중부양 기념샷으로 장식하고 우리의 호주 그레이트 오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장장 일 년에 걸친 기획과 사전조사, 일정 확정과 예약 진행, 세 차례의 예행연습과 출정식. 그 모든 과정들이 오늘의 걷기 여행을 성공으로 이끈 밑받침이 되었다.

걷는 일은 숭고하다. 두 발로 산과 들을 걸을 수 있음은 축복이다.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내년에 걷게 될 스코틀랜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겨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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