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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삶, 예술, 자연…ㅣ소설가 이순원] "고향 강릉은 영원한 제 삶의 무대입니다"

월간산
  • 입력 2017.10.1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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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하며 등단
고향 배경으로 한 주옥같은 작품 써… 강릉바우길 만들기에도 앞장서

이순원 작가는 강릉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도시로 나왔지만 고향의 정서를 문학적 토대로 삼아 <19세>, <은비령>, <아들과 함게 걷는 길> 등 주옥같은 소설을 썼다.
이순원 작가는 강릉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도시로 나왔지만 고향의 정서를 문학적 토대로 삼아 <19세>, <은비령>, <아들과 함게 걷는 길> 등 주옥같은 소설을 썼다.

몇 번이나 강릉 바우길을 걸었다. 그때마다 (사)강릉바우길 이기호 국장은 길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그 이야기들을 정리한 이는 소설가 이순원(60) 작가라고 말했다. ‘이순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원도’다. 그리고 ‘강릉’ 하면 소설가로서는 이순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도배마을에서 태어나 대학 진학 전까지 살았다. 위촌리는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유일하게 촌장이 존재하는 400년 된 대동계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유교 마을이다. 그 또한 도시에선 양복을 입고 다니는 멋쟁이지만 고향에 갈 때는 도포에 갓을 갖춰 입고 촌장께 인사를 드린다.

Q 위촌리가 강원도에선 꽤 유명하죠?

A “혹시 ‘우추리 이장님 마을방송’이라고 아세요? 동네 도사견이 목줄을 풀고 도망가서 조심하라는 내용인데 강릉 사투리가 압권이에요. ‘우추리 주민 여러분들인데 알코 디레요. 클나싸요, 클나싸요(여러분한테 알려드립니다. 큰일 났습니다, …)’ 하면서 시작해요. 그 우추리가 위촌리예요. 강릉에선 우추리라고 불러요. 한마디로 촌동네의 대명사쯤 되었지요. 우추리 아이들이 강릉 시내 학교로 유학 가면 별명이 죄다 ‘우추리’였어요. 하하. 참. 요즘에는 딴 걸로 유명해요. ‘K리그 최고령 응원단’이오. 마을 어르신들이 강원FC 경기가 있으면 단체버스를 타고 원정 응원을 가세요.한 9년 됐지요.” 

이순원 작가는 2009년부터 강릉바우길을 냈다. 난생 처음 등산화를 신고 걸으며 길에 숨은 이야기들을 찾아냈다.
이순원 작가는 2009년부터 강릉바우길을 냈다. 난생 처음 등산화를 신고 걸으며 길에 숨은 이야기들을 찾아냈다.
Q. 작가님의 소설엔 고향인 강릉이 자주 등장합니다. <은비령>, <워낭>,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삿포로의 여인>, <사임당> 등이 그렇죠.

A “제가 작가가 되기 전에는 소설 속에 강릉이란 고장이 거의 나온 적이 없었어요. 강릉이 워낙 오지여서 그랬겠죠. 황순원 선생의 <비늘>이란 소설은 김무월랑과 연화부인의 ‘양어지전설’을 토대로 쓴 것인데, 거기에 강릉이 언급되죠. 그 외에는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작가가 되면 강릉을 배경으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어요. 강릉은 제 고향이잖아요. 제가 자란 마을의 유교적 전통, 산촌의 풍경 같은 것은 제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제 세계인 거죠. 저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처럼 정서와 태생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작가로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삶의 무대에서 나온 정서를 태생적인 생각의 뿌리로 여기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얼마 전에 TV에서 소설 <19세>를 원작으로 한 옛날 드라마를 재방송해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 역시 강릉이고, 무엇보다 작가님의 성장소설 같다고 하던데요. 

A “큰 틀에서는 제 경험에 관한 이야기가 맞습니다. 주인공 정수가 바로 저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상고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은행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어요. 강릉시내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대관령 너머 세상에 대한 동경심이 생겼어요. ‘나는 촌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촌에서 안 살리라’ 다짐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춘기의 방황이었죠. 그런데 제가 왼손잡이인지라 주판을 잘 놓을 수 없어서 1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고 외삼촌이 계신 대관령에 올라 2년간 고랭지채소 농사를 지었습니다. 돈을 벌려고요. 소설에서도 비슷해요. 물론 소소한 이야기들은 창작이죠. 2년 있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니 여동생과 같은 학년이었어요.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었고요. 하하.”

그는 “남들은 2년 동안 헛된 시간을 보낸 게 아니냐고 하지만 그 경험을 토대로 <19세>라는 소설을 썼으니 작가의 입장에서는 결코 버리는 시간이 아니었다”며 “작가에게는 버리는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작가가 작품만 쓴다면 삶을 낭비하는 시간은 없다. 젊은 시절의 일탈도 문학적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Q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A “어릴 때부터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문창과나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늘같은’ 아버지 뜻에 따라 경영대를 들어갔죠.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당구장에 갔다가 주운 문예지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었어요.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길로 ‘나는 소설가가 돼야겠다’고 뜻을 굳혔죠. 혼자서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엔 금융기관에 취직했는데 그곳에서 편집·홍보 쪽 일을 맡아 10년 동안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소설도 함께 썼어요.”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서 <소>가 당선되었고, 1988년에는 <낮달>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특별할 것이 전혀 없었던 아주 평범한 아이’라고 말했다. 그가 27세에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을 때 한 친구가 고등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담임선생께 “순원이가 소설가가 되었습니다”라고 알리자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음… 그럴 리가 있나?”라고 말하셨단다. 그런 그가 1994년 번듯한 회사를 나와 전업 작가 선언을 했다.

이 작가는 ‘길도 브랜드’라는 생각으로 길 하나하나에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다. ‘대관령 옛길’, ‘산 우에 바닷길’ 등의 이름을 얻은 길들은 생기 넘치는 바우길로 다시 태어났다.
이 작가는 ‘길도 브랜드’라는 생각으로 길 하나하나에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다. ‘대관령 옛길’, ‘산 우에 바닷길’ 등의 이름을 얻은 길들은 생기 넘치는 바우길로 다시 태어났다.
Q 우리나라에서 글만 쓰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가정도 있으셨고.

A “회사에 들어가면서 ‘소설을 쓰려면 사회생활도 한 번 해봐야 하니 10년만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딱 10년 되는 해 회사를 나왔어요. 그 당시 신문 두 군데에 연재를 하고 있었고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라는 소설이 1993년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집도 장만했어요. 회사를 계속 다녀도 괜찮을 것 같고, 그만두고 글만 써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 뒀죠. 그렇다고 한순간도 설렁설렁 하지는 않았어요. ‘이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정도로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지금도 1년에 한 권씩은 꼭 책을 내려고 해요. 글만 쓰면서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요.”

Q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19세>, <은비령>,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수색, 그 물빛 무늬>,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등 7~8편이나 되네요. <압구정엔 비상구가 없다>는 영화로 만들어졌고요. 어떠한 이유가 있을까요?

A “주로 ‘TV 문학관’이라는 드라마로 많이 방영되었죠. 드라마로 옮기기 좋은 이야기들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강원도를 주제로 한 소설은 영상으로 옮겼을 때 그림이 예쁘기도 하고요.”

Q 교과서에도 소설이 실렸지요?

A “<19세>도 한때 중등교과서에 실렸었고,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모두 실렸어요. 발췌 대목과 시험문제 수준이 달라지는 게 차별점이라더군요. 덕분에 학교에서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와요. 하하.”

Q 1996년에 쓴 <은비령>은 소설의 제목이자 배경이었는데, 실제로 지명이 생겼다고요?

A “은비령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귀둔리에 있는 고갯길이에요. 한계령에서 필례약수터 쪽으로 내려오는 계곡 방향에 있죠. 소설 속에서는 ‘신비롭게 감추어진 땅’이라는 뜻으로 ‘은비령隱秘嶺’이라고 이름 붙였죠. 소설이 발표된 후 그 장소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어요. 그 장소에 은비령이라는 지명을 독자들이 붙여 주었어요. 사람이 찾으니 식당이 생기고 카페와 펜션이 생겼어요. 작은 다리에 ‘은비령교’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그리고 세계에서도 예를 찾아보기 드물게 문학이 길을 만들고 마을을 만든 사례예요. 그런 점에서 저는 독자들로부터 남다른 선물과 빚을 동시에 받은 작가라고 생각해요. 한편으론 작가로서의 행운과 의무가 함께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의 작품 세계는 스펙트럼이 넓다. 1992년에 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경영·정치적인 입장에서 쓴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드러나고, 1993년에 쓴 <얼굴>에서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주요 소재이다. 이런 사회문제를 다루던 그가 <19세>, <은비령> 같은 감성적인 소설도 썼다.

그는 “30대까지는 감수성으로 글을 쓰고, 40대가 되면 사람에 대한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다”며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내 소설을 보이면 이게 누구 작품인지 잘 모를 만큼 폭 넓은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다.

내로라하는 상도 많이 받았다. 1996년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1997년 현대문학상, 2000년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2006년 허균작가문학상, 남촌문학상 등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나무>로 녹색문학상을, <삿포로의 여인>으로 동리문학상을 받았다.

Q 상복이 참 많으십니다.

A “제가 잘 써서 받았다기보다는 운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가로서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고만고만하게 왔다는 뜻이 아니라 작가로서 많은 가호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참 복 받은 작가라고 생각해요.”

Q 이순원하면 강릉바우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참여하게 되신 건지. 

A “2009년에 고향 선배들을 만났는데 제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강릉에도 걷기 길을 만들면 어떻겠냐’며 저에게 한 번 해보라는 거예요. 저는 ‘작가는 글로 고향을 빛내면 된다’며 고사했죠. 그런데 한 선배가 ‘너는 강릉을 글에 이용만 했지 현실적으로 강릉을 위해서 한 일은 없지 않으냐?’고 하는 거예요. 뜨끔하더라고요.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일을 벌이기로 했지요.”

고향을 위해 멋진 길을 만들고 다시 작가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으나 일이 커졌다. 짧으면 6개월, 길어도 1년이면 일을 마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옛길을 찾아내 답사하고 정비하는 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강릉 출신 산꾼 이기호 국장과 탐사대원들은 개척산행처럼 풀숲에 파묻힌 길을 찾아다녔다.

Q 답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A “고생은 이기호 국장과 탐사대원들이 많이 했어요. 제가 ‘이런 콘셉트를 가진 길을 찾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내면, 이 국장과 탐사대원들이 그에 알맞은 길을 찾아내죠. 이 국장은 고산자 김정호 같은 사람입니다. 생전 처음 가본 마을에서도 뒷산에 올라 한 번만 슥 훑어보면 길이 어디에서 어디로 통하는지 금방 머리에 그려내요. 저는 그 뒤를 따라 다녔죠. 하하. 사실 저는 바우길 답사 직전까지 등산을 거의 하지 않았거든요. 등산화도 그때 처음 신어봤어요. 저는 글 쓰는 사람이니 그 길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내 스토리텔링 작업을 했습니다. 처음 3개월은 아예 와서 살다시피 했어요. 2년 동안은 주말마다 강릉에 갔고요. 흔히 ‘주말부부’라 하는데 저는 ‘주중부부’였죠. 3년 정도 지나니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그렇게 4년 만에 바우길이 완성되었어요.”

Q ‘바우길’이란 이름도 예쁘지만 각 구간의 이름도 참 정감 있어요. 그런 이름들은 어떻게 다 지으신 건가요?

A “경영학을 전공하고 직장에서 홍보 일을 했던 만큼 ‘길도 브랜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에게 길 이름을 이야기할 때 그 이름만으로도 그 길이 어느 지역에 있고, 어떤 특징이 있는 길인지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외지인들이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감자바우’에서 ‘바우길’이란 이름을 지었고, 각각의 길들엔 그 지형적 특색과 이야기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령 2구간 ‘대관령 옛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과 함께 오죽헌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며 걸은 길입니다. 3구간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은 광화문을 복원할 때 기둥으로 쓰려고 옛날 방식으로 어명을 내리고 베어낸 소나무가 있는 어명정을 지나는 길입니다.”

Q 우후죽순 생긴 전국의 걷기길이 흐지부지 사라지는 와중에 바우길은 제 자리를 잘 잡은 듯합니다.

A “소위 ‘망한 길’들이 왜 그렇게 되었나 조사해 봤더니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지자체에서 길을 만든 후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중간에 책임자가 바뀐 탓이 크겠지요. 두 번째 이유는 ‘길을 만드는 사람과 걷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바우길은 지역 사람들이 더 많이 걸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어요. 강릉 사람들이 함께 걷고 더 많이 걷는 길이어야지 외부 사람들이 와서 걸어 주기만을 바라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강릉시민을 대상으로 매주 정기 걷기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벌써 400회가 넘었어요. ‘바우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겨 1만2,000여 명의 회원이 모이고 인터넷에서 자연스럽게 홍보되더군요. 후원금을 내면서 자원봉사해 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Q 바우길은 잘 되었지만 작가로서는 공백이 생겼던 셈인데.

A “밤이나 새벽에 강릉 가는 버스를 타면 창밖이 깜깜해요. 그런데 대관령을 넘다 보면 날이 밝아 주변 풍광이 드러나죠. 계절에 따라 그 모습이 또 다르고요. 그런 모습들이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어요. 또한 매주 걷다 보니 건강도 좋아지지만 생각을 길게 할 수 있는 지구력을 길러 주더라고요. 그런 것이 작품 쓰는 데 도움이 되니 공백이라고 할 순 없죠. 길을 내면서 새롭게 많은 걸 알게 되고 작품에도 녹아들어 더 깊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실 계획이신지?

A “올해 연말까지 우화집을 한 권 내려고 해요. 25년 만에 추리소설을 낼 계획도 있어요. 독자들은 이순원의 추리소설이 어색하시겠지만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도 추리기법의 사회 비판 소설이었습니다. 이번에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추리소설의 모범사례를 남기고 싶습니다. 장기적으로 계획하는 것도 있어요.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가 급속히 발전했잖아요. 경영·경제학 전공자로서 그런 우리나라의 자본사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로 쓰고 싶어요. 어느 작가나 자기의 시대를 정리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 하거든요. 너무 큰 작업이라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길을 인생에 비유한다. 이순원 작가가 걸어온 인생길은 바우길의 구간 중 어떤 길과 같을까 생각해 봤다. ‘대관령 옛길’처럼 아흔아홉 굽이 같은 길이었을까, ‘바다 호숫길’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길이었을까. 하지만 이내 생각의 꼬리를 잘라냈다. 작가의 일생은 그의 작품 속에서 찾으면 될 일이다. 그가 직접 사인해 선물한 <삿포로의 여인> 속에서도 그의 일생을 엿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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