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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삶, 예술, 자연… | 경기민요 명창 김영임] "소리 인생 45년, '회심곡'으로 각박한 세상에 孝 알렸죠"

월간산
  • 입력 2017.11.0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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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에 소리 입문… 1974년 회심곡 완창 앨범으로 ‘국민 명창’ 반열에 올라
23년째 ‘효 공연’ 열며 우리 국악 알리기에 매진

김영임 명창은 올해 소리인생 45주년을 맞았다. 19세 나이로 조금은 늦게 소리에 입문했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국민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김영임 명창은 올해 소리인생 45주년을 맞았다. 19세 나이로 조금은 늦게 소리에 입문했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국민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우리의 소리는 좋은 것이다. 요즘에야 클래식, 록, 힙합, 댄스음악 등 귀 호강할 수 있는 음악들이 넘치지만 그래도 우리의 피에 흐르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의 뿌리는 분명 우리 몸과 마음속에 있다.

경기민요의 대가이자 ‘국민 명창’으로 불리는 김영임(64·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보조자. 아리랑 보존회 이사장) 명창을 만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소임 김영임 소리전수원’으로 들어섰다. 고풍스런 한옥에 단아한 한복을 입고 있을 줄 알았으나 그 반대였다.

전수원 내부는 서양식의 모던한 분위기의 공간이었고, 김 명창은 한복이 아닌 세련된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거실 중앙에 놓인 장구가 이곳이 경기민요 명창의 집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Q 한복에 부채를 들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A “무대에 설 때는 매무시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한복을 차려 입지요. 하지만 평소엔 세련되게 멋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부터 그랬어요. ‘내가 소리하는 사람인 줄 다 아는데 굳이 밖에서도 한복을 입고 다녀야 하나’ 생각했죠. 어릴 때 얼마나 입고 싶은 옷이 많고 꾸미고 싶은 욕구가 컸겠어요. 국악 하는 사람이라고 평소에도 늘 병풍 앞에서 한복을 입고 쪽머리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 같아요.”

19세 소리에 입문한 지 1년 만에 ‘회심곡’으로 단숨에 인기를 얻은 김 명창은 스타 소리꾼이 되었다. 가냘픈 몸매에 단아한 외모, 거기에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는 출중한 실력까지, 그녀는 요즘으로 치자면 ‘신세대 아이돌 소리꾼’이었다.

Q 소리를 좀 늦게 시작하셨죠?

A “14세 때부터 고전무용을 했어요. 어릴 적부터 라디오에서 은방울자매, 이미자 선생님 등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했어요. 그걸 집에서 못마땅하게 여기셔서 ‘그럴 거면 차라리 고전무용을 하라’ 하신 거죠. 무용을 하니 자연스럽게 국악을 듣게 되었죠. 운명이었나 봐요. 창부타령, 한강수타령 등을 들으면서 세상에 저런 소리가 있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어요. 그래서 나는 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무용도 모자라 소리를 하고 싶다고 하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여자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에 대해 선입견이 짙게 깔려 있던 시절이었다. 

Q 반대가 무척 심했겠네요.

A “2~3년 동안 집에 감금되다시피 했었어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역할을 대신한 오빠들에게 머리카락을 잘리기도 하고, 큰언니는 빨리 시집가서 현모양처가 되라며 맞선을 열두 번도 넘게 주선했어요. 그래도 소리를 하고 싶어 이불을 둘러쓰고 노래 부르고, 처마 밑에 빗물받이로 놔둔 항아리에 머리를 처박고 노래를 불렀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소리가 운명이긴 했나 봐요. 집안과 잘 아는 스님이 ‘이 아이는 결국 자기 길을 갈 테니 그냥 자기 좋을 대로 살게끔 내버려 두라’고 하셨어요. 그 스님 덕분에 지금의 김영임이 있게 된 거죠.” 

어렵게 집안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국악예고를 졸업한 후 경기민요 대가 벽파 이창배(1916~1983) 명창이 운영하는 소리양성소에 들어가 소리의 기본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Q 이를 악 물고 배우셨겠네요.

A “집에서 허락은 했지만 일절 지원해 주지 않으셨어요. 혼자 고생해서 유학을 가든지 시집을 가든지 하라고 하셨죠. 단돈 몇 백 원으로 하루를 살며 소리를 배웠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교육 체계가 없어서 선생님 입 모양만 보고 소리를 배웠어요. 주변의 인식도 곱지만은 않았죠. ‘젊은 처자가 궁상맞게 한복 입고 장구 치느냐’는 말까지 들었어요. 그래도 참 열심히 했어요. 무용할 때 소리를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던 습관이 있어서 처음 소리를 배우는데도 ‘어디서 배우다 왔냐?’는 말을 줄곧 들었어요.”

늦게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서너 배는 더 공부하고 연습했다. 오전 9시부터 시조로 시작해 10시부터는 경기12잡가雜歌를, 11시부터는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배웠다. 12시에 수업이 끝났는데 그녀는 집에 가지 않고 남아서 그날 배운 것을 복습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가서도 소리 연습을 했다.  

Q 경기민요는 어떤 소리인가요?

A “조선 후기 이후 서울과 경기도에서 발달해 온 민요와 잡가예요. 화려하면서도 경쾌하고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면서도 서정적인 것이 특징이에요. 고음으로 치고 올라가다가 내려오면서 살짝 소리를 꺾어 줄 때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판소리와는 다른 매력이죠.”

Q 잠을 자도 환청이 들릴 정도였다고.

고전무용을 하면서 접한
소리에 푹 빠져 운명처럼
소리꾼이 된 김영임 명창.
그녀는 ‘회심곡’으로 단숨에
‘스타 소리꾼’이 되었다.
고전무용을 하면서 접한 소리에 푹 빠져 운명처럼 소리꾼이 된 김영임 명창. 그녀는 ‘회심곡’으로 단숨에 ‘스타 소리꾼’이 되었다.
A “연습실에 판소리하시는 박동진(1916~2003) 선생님께서 바둑 두러 자주 오셨었는데, 그때마다 제가 소리 연습을 하는 걸 보시곤 ‘저놈은 사람 되겠구먼’ 하고 칭찬해 주셨어요.”

Q 1973년에 데뷔를 하셨어요. 소리 입문 불과 1년 만인데요.

A “소리를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돼서 민속경연대회 대상, 명창대회 대상, KBS 전국민속노래자랑 대상 등을 받으며 조금씩 이름을 알렸죠. 그러다가 어느 날 MBC ‘내 강산 우리 노래’라는 국악 프로그램에서 선배님 한 분이 펑크를 내셨어요. 엉겁결에 제가 대타로 TV에 나가서 소리하고 연기했는데 그게 큰 화제가 되었어요. 젊은 처녀가 구성지게 소리하는 것이 신선하고 예뻤나 봐요. 이후로 계속 방송에 출연하면서 주인공도 맡고 했죠.”

당시 TV에는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출연했다. 그런 시절에 갓 스무 살이 된 신인 소리꾼이 단숨에 주인공을 맡으니 주변의 시샘어린 미움도 많이 받았다. 물론 미워하는 사람보다 좋아하고 아껴 주는 팬들이 훨씬 많았다.

Q 이듬해 ‘회심곡’ 앨범이 ‘대박’났습니다.

머리맡에는 어김없이 장구가
있다는 그녀의 24시간은 늘
소리와 함께 한다.
머리맡에는 어김없이 장구가 있다는 그녀의 24시간은 늘 소리와 함께 한다.
A “TV에 출연하는 저를 보시고 당시 최고의 작곡가 박춘석(1930~2010) 선생님께서 한 번 보자고 하셨어요. 만난 자리에서 ‘회심곡을 부를 줄 아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는 몇 대목만 불렀는데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1년 6개월 전속 계약을 맺었어요. 두 달 동안 이창배 선생님께 회심가를 제대로 배운 후 1974년에 ‘회심가’ 완창 앨범을 냈어요. ‘대박’이라는 말로 다 표현이 안 될 정도였어요.”

단번에 ‘스타 소리꾼’이 되었고 이때부터 ‘김영임=회심가’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당시 국악인으로서 파격적인 행보로 주목을 끌었다. ‘국악인은 한복을 입어야 한다’는 편견을 깨고 주간지 표지 모델을 했고, TV드라마와 광고에도 출연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경기민요의 ‘독창獨唱’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Q 원래 소리는 혼자 하는 게 아닌가요?

A “그때는 이상한 관행이 있었어요. 국악프로그램에서 유명한 명창 선생님 옆에 제자들이 수십 명씩 늘어서서 일명 ‘떼창’을 하는 것이었죠. 부르는 사람마다 개성과 특성이 다른데 똑같이 한복 입고 화장하고 몸짓하며 후렴을 함께 부르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이렇게 자기 이름 석 자를 내지 못하고 소리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주장했죠. 소리에 자신이 있으면 독창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본인의 발전도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독창만 고집했어요. 선생님들께 많이 혼나고 동료들에게 미움도 많이 받았어요. 그래도 저를 좋아해 주시는 팬들이 있으니까. 미움만 받고 살았더라면 지금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죠.”

그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회심곡’ 앨범은 국악계 최초로 밀리언셀러(100만 장)를 돌파했다. 그녀는 전국과 해외를 가리지 않고 소리 공연을 하며 우리의 소리를 만방에 알렸다. 1994년부터 소리꾼 김영임을 대표하는 ‘소리 효孝 공연’을 시작했다.

Q 23년째인데 요즘도 표를 구하지 못할 만큼 인기라면서요.

A “이제까지 130여 개 도시에서 300회 넘게 공연했어요. 관객은 110만 명을 넘었고요. 소리를, 김영임을 좋아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죠. 처음에 공연이 성공하자 시샘도 많이 받았어요. 국악을 대중의 취향에 맞춘다고 하더군요. 상처를 받았지만 좌절하진 않았어요. 저는 언제나 한복 입고 우리 소리를 했어요. 단 한순간도 변질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걸 ‘열린 국악’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대중이 민요를 어렵게 생각하고 멀리 하는 건 국악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Q 공연의 스케일이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A “효 공연은 국악에 드라마와 퍼포먼스를 가미한 국악뮤지컬을 표방해요. 국악도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 수 있는 양면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45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리를 하고 무용도 선보입니다. 무대에 거대한 수묵화를 영상으로 보이고 화려한 조명쇼도 있고요. 이렇게 다양한 무대 연출을 하니 출연자와 스태프들 등 200여 명이 공연을 위해 함께 움직여요. 혹자들은 공연 표 값도 비싸고 공짜표도 안 뿌린다고들 하시는데 저는 그 수입을 고스란히 공연에 투자해요. 요즘은 관객들이 더 잘 아세요. 공연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닌지.”

Q 왜 ‘효’가 주제인가요?

23년째 이어지고 있는 ‘김영임의 소리 효 공연’은 각박한 세상에 효의 중요성을 알리며 지금도 인기 최고의 국악공연으로 인정받고 있다. / 사진 김영임 제공.
23년째 이어지고 있는 ‘김영임의 소리 효 공연’은 각박한 세상에 효의 중요성을 알리며 지금도 인기 최고의 국악공연으로 인정받고 있다. / 사진 김영임 제공.
A “회심곡이 자식이 부모님에 대한 효를 이야기하는 노래잖아요. ‘제가 회심곡으로 큰 은혜를 입었으니 효는 김영임이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사실은 남편(코미디언 이상해)의 아이디어였어요. 앞으로 살면서 점점 자식이 부모를 모르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럴 때 회심곡을 부른 제가 공연을 통해 효라는 메시지를 던지면 좋을 것 같다고요. 그런데 정말 그런 세상이 왔잖아요. 부모·자식 간에도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이런 세상에서 소리로 효의 의미를 전하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어루만져 주는 것에 대해 책임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요.”

올해는 그녀의 소리인생 45주년이 되는 해다. 3월에는 ‘김영임의 소리 孝’라는 이름의 기념앨범을 냈다. 그녀가 직접 프로듀싱부터 믹싱, 마스터링, 음반 재킷 디자인까지 앨범제작의 모든 부분에 참여해 만들어진 앨범이다.

그녀는 국악인으로서 ‘최초’ 타이틀을 많이 가지고 있다. 국악인 최초 밀리언셀러 앨범, 최초 뉴욕 카네기홀 공연, 최초 국악뮤지컬 공연, 최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공연, 최초 런던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 그녀는 항상 도전하고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Q 지난해 ‘힙합의 민족’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해 랩을 선보이셨죠? 덕분에 ‘힙합 할매’란 별명도 얻으셨고.

김영임 명창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힙합과의 콜라보레이션 등 지금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김영임 명창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힙합과의 콜라보레이션 등 지금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A “힙합이란 장르를 알고 싶었고, ‘힙합과 우리의 국악을 접목시켰을 때 정말 이렇게 잘 어우러지는구나’ 하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젊은 사람들에게 김영임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의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알리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Q 처음 하시는 랩이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A “장르가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어려웠죠. 그런데 정서와 한, 흥겨움을 표현한다는 것은 같더라고요. 힙합가수 ‘딘딘’이라는 친구와 함께 연습을 하면서 욕심도 좀 생기더라고요. 예능이지만 어쨌든 순위를 가리는 경합이잖아요. 1등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어떨 때는 잠도 못 자고 랩 가사를 외웠어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젊은 에너지를 많이 얻었어요. 같이 뛰고 같이 울고 웃고 이러다 보니까 너무 좋았어요.”

Q 1년에 30회 정도 공연을 하신다고. 체력이 대단하십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A “저는 우선 잘 먹어요. 요즘 TV에 음식 관련 프로그램이 참 많잖아요. 그런 걸 보고 입맛이 당기면 밤이라도 만들어 먹어요. 워낙 공연을 많이 하고 이동도 많이 해서 체력이 없으면 안 돼요. 예전에는 골프도 좀 쳤는데 요즘엔 등산을 가장 많이 해요.”

Q 주로 어디로 다니시는지?

A “제가 전에 평창동에 한 20년 살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왜 북한산이 그렇게 좋은지 몰랐을까요. 20여 년 동안 북한산 간 게 10번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요즘은 주로 청계산을 올라요. 옥녀봉까지 천천히 올랐다 내려오면 3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는데 그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헬스클럽에서 흘리는 땀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Q 영화 등에서 보면 폭포 아래에서 피를 토하잖아요. 득음하기 위해.

A “저는 그랬던 적은 없어요. 아, 드라마에선 있었어요. 1970년대에 ‘맥脈’이라는 드라마에서 소리하는 역할로 나왔었는데 그때 소리를 내지르다 피를 토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Q 그럼 연습은 주로 어떻게 하시는지.

A “늘 소리를 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머리맡에 장구를 둬요. 침대 옆에도 장구가 있어요. 소리를 내지르고 연습하는 게 다가 아니니까.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장단 맞추면서 흥얼거리고 해요. 소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도 ‘늘 소리를 가까이 하라’고 해요. 수업이 끝나고 책을 덮는다고 연습이 끝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어디에서나 연습하라는 소리죠.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전공하는 소리꾼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우리 소리의 미래를 이끌고 갈 거잖아요.”

운명처럼 소리를 만나 이제까지 앞만 보고 달려와 ‘국민 명창’ 반열에 오른 그녀는 우리의 소리가 세계로 더 널리 알려지고, K-POP 아이돌처럼 전통국악에서도 한류 스타가 탄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오늘도, 내일도 소리를 향해 달릴 것이다. 지난 45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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