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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삶, 예술, 자연… | 한국화가 임무상 화백] “삶의 터전에서 무덤까지 우리 민족은 곡선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월간산
  • 입력 2018.01.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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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한국적 곡선미학으로 그린
초가·산·나무·달, 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 초대전 열어

임무상 화백은 자연의 곡선을 그림으로 그린다. 그는 초가에서부터 시작해 산, 소나무, 달에 이르기까지 곡선의 미학을 표현하고 있다.
임무상 화백은 자연의 곡선을 그림으로 그린다. 그는 초가에서부터 시작해 산, 소나무, 달에 이르기까지 곡선의 미학을 표현하고 있다.

아침부터 큰 눈이 내렸다. 온통 하얀 세상, 출근길에 눈뭉치 하나를 만들어 집 담벼락에 냅다 던졌다. ‘퍽’ 하고 산산이 깨진 눈뭉치를 보며 마음속 갑갑했던 고민들도 하얀 눈 속에 파묻어 버렸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 밤새도록 놓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던 고뇌의 감정들도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우연일까. 이날 만날 화가의 이름이 ‘임무상林茂相(72)’이었다. 한자의 뜻은 전혀 상관이 없지만 이것도 또 하나의 인연일까 싶어 그와의 만남이 무척 기다려졌다. 남양주 홍유릉 근처에 있는 그의 갤러리의 벽도 하얀색이었다. 그 벽엔 그의 산 그림과 소나무 그림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임 화백은 금강산, 백두산 등 우리나라의 산과 우리나라의 기상을 담은 소나무, 토속적인 달 등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화폭에 담아내는 한국화가다. 그럼에도 그는 국내에서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더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에게 ‘마에스트로Maestro(거장)’란 칭호를 부여했다. 현지에서 화가에게 ‘마에스트로’란 칭호를 붙인다는 것은 한 예술가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명예로운 일이다.

Q. 소나무 그림 그리시는 분 이 소나무 좋은 홍유릉 근처에 터를 잡으셨습니다.

A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참 좋습니다. 홍유릉 소나무가 얼마나 기품 있고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눈 내리는 날 홍유릉에 가면 마치 제 개인 정원 같은 느낌이 듭니다.”

Q. 처음 그림을 그리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A “제 고향은 경북 문경의 작은 산골(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읍실)입니다. 사방이 운달산, 단산, 공덕산 등의 산으로 둘러싸여 오로지 하늘만 뚫려 있을 법한 오지 중의 오지마을이지요. 6·25 전쟁 때에도 전쟁을 피해갔을 정도였어요. 거기서 대가족이 모여 살았어요. 식구만 20명 정도였어요. 한 방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자는데 저는 꼭 방 끄트머리에서 잤거든요. 새벽 동틀 무렵 창문에서 서서히 밝게 빚어 나오는 청량한 맑은 빛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어요. 문창호지 위에 그려지는 갖가지 형상들을 보면서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폈죠. 그런 기억들이 그림을 그리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Q. 산골 오지마을에서 화가의 꿈이라.

A “일곱 살 때 나는 장차 화가가 되리라 다짐했습니다. 다행히 주변에서 그런 제 꿈을 많이 지원해 주셨어요. 한학자였던 아버지께서는 읍내 장에 다녀오실 때면 종이를 사주셨고, 문경중학교에서 미술반장을 할 때 미군 구호물자 중 미술용품은 거의 다 제가 받았지요. 여러모로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것들이 일생을 두고 내 화업을 고취시킨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오로지 화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서라벌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라벌고등학교는 예술학교가 아니었음에도 전국에서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학생들이 모였다.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당시 서라벌예대(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는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학교였다. 그래서 서라벌고등학교도 같은 예술 계열인 줄 알고 전국에서 끼 있는 학생들이 대거 몰렸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서울에서 식당 보조, 아이스께끼 장수, 신문팔이, 양담배 장수, 볼펜 장수 등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힘겨운 나날이었으나 ‘남자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나면 성공하기 전까진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서라벌고등학교 야간반에 들어갔고 미술반 활동을 시작했다.

산, 소나무, 달_148x120cm, 2011
산, 소나무, 달_148x120cm, 2011
Q. 마음 편하게 공부하기는 어려웠겠네요.

A “그때의 고생은 말로 다 못 해요. 낮에는 다방에서 볼펜이며 양담배를 팔고, 밤에는 공부를 했죠. 그야말로 주경야독하는 고학생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다니고 서라벌예대에 진학하려 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등록금을 내지 못해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만 두었죠. 그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제가 형제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거든요. 다시 고생이 시작되었죠. 23세 즈음에는 충무로에서 엑스트라와 단역 배우 생활도 2년 정도 했어요. 화가가 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니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에 객기를 부린 거였지요. 그러다 통신대학교에 들어갔어요. 너무 배우고 싶어서요.”

28세 때 결혼한 그는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그림을 독학했다. 결혼하면서도 자신이 화가라는 말을 하지 않아 아내는 그저 저 사람이 취미로 그림을 그리려니 했단다. 그러다 40대 초반인 1985년, 대한민국미술대전과 중앙미술대전에 입선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Q. 그림에 곡선이 많이 보입니다.

A “처음에는 고향마을의 초가집을 그렸습니다. 그것들을 곡선으로 표현했죠. 초가집 지붕의 곡선, 집과 집을 잇는 길의 곡선…. 삶의 터전에서 무덤까지 우리 민족은 둥글고 완만한 곡선 속에서 살고 있어요. 대자연은 곡선미의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도 초가와 기와집은 민족적 정서와 감성을 함축해서 잘 보여 주고 있지요.”

Q. 말하자면 ‘곡선의 미학’입니까?

A “어눌하고 투박하고 두루뭉술한 곡선 속에는 포근한 정감이 서려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하고 질박한 미완성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미의 표상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전 그것을 ‘린隣·Rhin-곡선공동체의 미’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린隣’은 공동체 정신과 한국적 곡선미학이 접목된 새로운 형상화 작업을 시도한 한국성Korean’ty 창출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소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삼라만상을 풀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22년간 초가만 그리다가 산으로 주제를 옮긴 과정이 궁금합니다.

A “2005년에 금강산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화가로서 금강산에 간 것은 무척 감개무량한 일이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선대 화선들과 시인 묵객들이 다녀간 발자취를 고스란히 체득하는 것 같았거든요. 외금강의 만물상을 보면서 곡선의 미학을 발견했습니다. 문득 초가의 곡선을 금강산에 접목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금강산 그림을 그리면서 더욱 자유로워졌습니다. 자연의 곡선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은 소나무와 산, 달로 표현했습니다.

Q. 요즘은 소나무를 가장 많이 그리십니다.

A “제 고향엔 소나무가 아주 많았습니다. 소나무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소나무로 만든 초가에서 소나무를 잘라 깎은 가구를 사용하고 소나무 밑에서 놀았죠.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존재였어요. 그러니까 소나무에 대한 애정은 말할 수도 없지요. 산을 그리게 되면서 자연히 소나무도 그리게 되었죠.”

Q. ‘임무상의 소나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A “제 질곡된 삶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나무는 눈과 비, 바람 등 외부의 고통 속에서도 강직하게 살아남은 존재입니다.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휘둘리지 않고 삶의 가혹한 조건을 견딜 수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굴의 정신으로 삶과 인내의 교훈을 인간에게 보여 주는 존재입니다.”

월송(Moon&pine tree), 70x123cm, 2013
월송(Moon&pine tree), 70x123cm, 2013

Q. 이제까지 보고 그린 소나무 중에서 어떤 소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지?

A “양산 통도사 앞 소나무 숲에서 본 노거송이 가장 감명 깊었고 그것을 그린 그림을 가장 좋아합니다. 2013년에 그린 ‘월송月松’이란 작품인데 현재 이탈리아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Q. 일생의 역작을 꼽으신다면?

A “2011년에 백두산 천지를 그린 ‘신미년 팔월 백두산’과 역시 2011년에 그린 ‘푸른 밤 금강산’을 꼽고 싶네요. ‘신미년팔월 백두산’은 1991년 여름에 백두산 천지를 다녀왔던 감동을 꾹꾹 담아놨다가 20년 후인 2011년에 6개월에 걸쳐 그려낸 500호 대작입니다. ‘푸른 밤 금강산’은 지금까지 작화해 온 금강산 만물상의 완결편으로 작정하고 그린 300호 대작이고요.”

Q. 한국적이고 자연적인 주제를 그리시는 것처럼 쓰시는 재료도 자연친화적입니다.

A “자연에서 나오는 천연염료들을 혼합해 사용합니다. 흙(토분)이나 벼루돌, 도자 안료 등을 섞어서 씁니다. 한국의 빛깔을 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료들이지요. 그래서 제 그림들은 힘과 깊이를 지니고 있으며 표현력에 있어서도 온화한 느낌을 주지요. 같은 색이라도 똑같지 않아요. 그렇게 만들 수 없거든요. 그림 속에 표현되고 있는 오방색은 불가의 탱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Q. 사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유명하십니다.

A “이제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외면도 많이 받았고요. 그림만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학벌과 지연 등이 늘 발목을 잡았어요. 하지만 저는 한 길만 걸었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공감을 얻고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이 잘 팔리는 것, 전시회를 몇 번 하는 게 전부가 아녜요. 정답은 없어요.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을 뿐입니다. 제가 프랑스에 초대된 것은 그 노력이 빛을 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임 화백은 2013년 7월, 프랑스 파리의 갤러리 셀렉티브 아트Selective Art에서 ‘임무상 파리초대전’을 열었다. 2012년, 파리 그랑팔레Grand Palais 출품으로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동양에서 온 낯선 화가의 지극히 한국적인 그림은 프랑스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양산 통도사의 노송을 그린 ‘월송’, ‘隣Rhin’, ‘신금강산도’ 등 한국의 자연을 담은 작품 15점을 선보였다. 천연 혼합 채색을 사용해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적인 빛깔과 질감으로 그린 그림은 현지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언론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해 “화가 임무상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순전히 자신의 나라와 산들 그리고 하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가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신비에 접근하는 일이다.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들을 완전한 평온함 속에서의 관조와 존중의 길로 인도한다”고 평가했다.

이런 성원에 힘입어 그의 초대전은 당초보다 전시기간이 1주일이나 연장되기도 했다. 초대전의 대성공으로 임 화백은 셀렉티브 아트와 전속작가 계약을 맺었다. 5~6명의 작가 작품만 취급하는 파리 중심 갤러리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한 전속작가가 된 것이었다.

임 화백의 그림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에서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에게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임 화백의 그림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에서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에게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Q. 프랑스에 이어 이탈리아에서도 초대전을 열었습니다. 반응이 더 좋았다지요.

A “같은 해 12월 이탈리아 파보다 지역의 갤러리 아티시마ARTISSIMA에서 초대전을 열었습니다. 현지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음악가, 사진작가 등과 기자들까지 많은 인사들이 찾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더군요. 올림픽도 열고 월드컵도 열었는데 한국을 모른다니 좀 놀랐습니다. 하지만 생소한 나라에서 온 동양인 작가의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갈채를 보내주어 주인공인 저로서는 감개무량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림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손은 그저 빌리고 마음의 영혼을 표출하는 것이죠. 그런 점이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의 눈에도 감동으로 다가갔다고 생각합니다.”

이탈리아 초대전 이후 그는 ‘빌라 드라지 몬테그로토VILLA DLAGHI MONTEGROTTO 박물관’ 개관전에 초대 받는 영광도 얻었다. 이 박물관은 1490년 중세 때 세운 고성으로 유명하며 이 성안에 중요한 부분을 시립박물관으로 개관하면서 첫 전시회로 한국 작가인 임무상 화백을 초대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미술계는 그를 ‘마에스트로’라 불렀다. 임 화백은 2014년 4월,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열린 세계 최대 산악개발박람회인 ‘마운틴 플래닛MOUNTAIN PLANET’에 초청받아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Q.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군요.

A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죠.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국내에선 반응이 시원치 않았어요. 프랑스, 이탈리아 초대전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우리나라 언론사들은 거의 도외시 하더라고요. 서글픈 현실이었죠. 만약 제가 미술계를 주도하는 학교 출신이거나 교수 같은 자리에 있었더라면 난리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들 앞에서 저는 그저 가난한 화가일 뿐이었죠. 글로벌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위해 혼신의 노력과 열정을 쏟아 부어 큰 수확을 얻었지만 혼자 힘으로 감내하기란 역부족임을 절감했어요.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어요. 두 초대전 모두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일구어낸 홀로서기의 결과물인 만큼 더욱 값지고 보람을 느꼈어요.”

그의 그림이 좋아서 프랑스 매니지먼트를 자청한 재불 한국인 데레사씨는 현지 신문인 ‘한불통신’에 “임무상 작가는 프랑스, 이탈리아 동시 초대전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알렸다. 한-유럽 FTA 체결 성과도 중요하지만 국가적 차원으로 한-유럽 간 문화교류에도 집중해야 할 것”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Q. 소나무도 많이 심으셨다고.

A “소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솔바람’ 회원들과 이제까지 5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소나무집에서 나서 소나무땔감으로 밥 해먹고 소나무로 만든 도구로 생활하며 소나무 그림을 그려 지금의 위치에 선 만큼 저와 소나무는 불가분의 관계이니 늘 고맙지요. 소나무를 심는 일은 소나무에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등산은 자주 하시나요?

A “주로 ‘솔바람’ 회원들과 갑니다. 전국의 소나무나 나무들을 답사하려는 목적이지요. 지난번엔 태백산에 주목을 보러 다녀왔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꾸준히 산에 다니면서 많은 나무들을 보려고 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A “소나무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이고, 이제까지 방치해 두었던 자료도 정리하려고 해요. 또 하나, 15세 때부터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일기가 있는데 이것을 회화로 옮겨 그리고 있어요. 이것도 차후에 좋은 작품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그림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갤러리를 나와 홍유릉을 걸었다. 오전 내내 내린 눈으로 푸른 소나무가 새하얗게 변했다. 누군가의 발길 하나 닿지 않은 옛 임금의 능은 한없이 고즈넉했다. 임 화백의 그림이 현실에 펼쳐지고 있는 듯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화폭에서 빠져나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오랜 세월 자연의 풍파를 견디며 단단해진 소나무 껍질처럼 그의 얼굴 주름에서도 인생의 질곡을 이겨내 온 거장의 역사가 깊이 패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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