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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김창호 대장 추모 특집ㅣ<6> 산악인 김창호의 삶] 불꽃같이 살다 바람같이 히말라야로 가다

월간산
  • 입력 2018.11.1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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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초등무산소 등정 등 숱한 산악기록 남겨… 영원한 산꾼으로 기억

파키스탄 카라코룸 탐사 중인 김창호 대장. 이때 남긴 기록과 연구가 후의 등반에 밑거름이 된다.
파키스탄 카라코룸 탐사 중인 김창호 대장. 이때 남긴 기록과 연구가 후의 등반에 밑거름이 된다.

카체블랑사(5,560m) 세계 초등정과 혼보로피크(5,500m) 신 루트 등정, 시카라(5,928m) 신 루트 등정, 딜리상사르(6,225m), 아타르코르(6,109m), 하이즈코르(6,105m), 박마브락(6,150m) 4개봉을 단독 세계 초등정, 히말라야 무산소 14좌 완등, 바투라2봉(7,762m) 초등정, 강가푸르나(7,455m) 초등정, 다람수라(6,446m)와 팝수라(6,451m) 신 루트 개척 등….

김창호 대장의 등반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각 등정마다 초인적인 강인함과 치밀한 연구, 뜨거운 열정이 물씬 배어 있다. 국내외에서 받은 대한산악연맹 대한민국 산악대상, 한국산악회 황금피켈상, ‘산악계의 오스카상’인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 등 숱한 수상 기록을 통해 김 대장의 등반업적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엿볼 수 있다.

김 대장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특히 운동을 잘해 핸드볼 지역대표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과묵한 성격이었기에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불타고 있던 사람”이라고 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후배인 김 대장의 부인도 비슷한 성격으로 침착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으로, 2012년 김 대장의 원정등반 비용을 직접 마련해 주기도 했다.

물론, 김 대장은 처음부터 ‘최강’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상처와 좌절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테러리스트에게 총격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 대장은 히말라야로 향했다. 그는 오랜 탐험과 탐사를 통해 강인한 체력과 히말라야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알피니즘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2013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0 to 8848’ 원정대원들. 오른쪽부터 김창호 대장, 전푸르나, 서성호, 안치영, 오영훈 대원.
2013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0 to 8848’ 원정대원들. 오른쪽부터 김창호 대장, 전푸르나, 서성호, 안치영, 오영훈 대원.

서울시립대 산악부에서 등반 시작해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김 대장은 덕률초등, 감천중, 영주 중앙고를 졸업한 후 서울시립대 무역학과에 88학번으로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입부한 김 대장은 보라색 트레이닝복을 트레이드마크로 입고 인수봉에서 바위를 배웠다.

1993년, 국내산에서 싹틔운 등산에 대한 열정을 히말라야에서 이어가게 됐다. 카라코룸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대암벽 그레이트트랑고타워(6,284m)였다. 첫 원정이었기에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쳤다. 20일치 장비와 식량이 눈사태로 사라지는가하면 80m나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였던 벽 등반에 성공하고 귀국했으나, 벽 등반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약 2피치 길이의 설사면을 오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정 실패’라는 눈초리를 받게 됐다.

선배들의 시선이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이겨냈다. 1996년 가셔브룸4봉(7,925m) 동벽 신 루트 등반에 나섰다. 일본의 세계적인 클라이머 야마노이 야쓰시의 자료를 철저히 연구해 7,250m 지점까지 순조롭게 등반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난관이었다. 후배에게 확보를 맡기고 낭떠러지에 붙어 20m쯤 올랐다. 그러나 후퇴 외에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만약 김 대장이 추락한다면 확보를 맡은 후배는 줄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배는 그저 눈물만 흘렸다. 다행히도 김 대장은 아슬아슬하게 후배에 돌아갔다. 그러나 이때의 충격이 컸던 후배는 귀국하자마자 산악부를 탈퇴했다.

이날 이후 김 대장은 자신의 등반 스타일을 확 바꿨다. 산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동료와의 원만한 관계를 최우선으로 두게 된 것이다. 이후 김 대장이 이끌거나 소속됐던 원정대에서 내홍이 일어나거나 관계가 어그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김 대장은 대학을 나온 후 선배들과 아웃도어 유통업체를 창업했다. 제법 번창했으나, 퇴근 후 히말라야 탐험에 대한 뜨거운 열망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2차원의 지도를 펼쳐놓고 3차원의 등반 루트를 구상했으며,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마을과 주민들, 문화를 상상했다.

결국 회사를 정리하고 파키스탄행을 결심했다. 1999년 한 해 동안 두문불출하며 카라코룸에 대해 공부했다. 지도와 등반사, 언어 습득까지 갖은 애를 썼다. 그렇게 떠난 첫 해 탐험은 한 달 동안 몸무게가 20kg나 빠질 정도로 고행이었다. 그럼에도 낭가파르바트의 루팔벽, 환상적으로 펼쳐진 발토로빙하 등 미지였던 카라코룸의 상징들을 만날 때마다 살아 있음을 체감하는 강렬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탐험을 거듭할수록 등반열정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7개월간의 파키스탄 히말라야 탐사를 마친 뒤 선후배들과 함께 원정을 계획했다. 당시 한국 산악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카체블랑사 세계 초등정, 혼보로피크 신 루트 등반, 시카라 신 루트 등정 등 5,000m급 4개 고봉을 등반하는 기록을 냈다.

또한, 파키스탄이 세계 산의 해를 맞아 해발 6,500m 이하의 산은 입산허가나 입산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단독등반을 기획했다. 해발 6,000m급 고산에서 등반기술을 익히고 정신적 고독을 이겨내야만 더 큰 등반을 해낼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에 따라 6,000m급 4개봉 딜리상사르, 아타르코르, 하이즈코르, 박마브락을 단독 세계 초등정하면서 이를 밑거름으로 삼았다.

2003년 파키스탄 대탐사 중 김창호 대장의 비닐로 급조한 캠프.
2003년 파키스탄 대탐사 중 김창호 대장의 비닐로 급조한 캠프.
2001년 힌두쿠시 탐사 도중 설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창호 대장.
2001년 힌두쿠시 탐사 도중 설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창호 대장.
2011년 가셔브룸1봉 정상의 김창호 대장.
2011년 가셔브룸1봉 정상의 김창호 대장.

히말라야 8,000m의 세계에 들어서다

김 대장은 2004년 로체 남벽에서 처음 8,000m급 고봉 등반을 시작했다. 1993년에 처음 히말라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에 비하면 늦은 시작이었다. 비록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뛰어난 영호남 고산 등반가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자기 자신의 등반 실력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있게 된 계기였다.

2005년에는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벽 중앙 직등 루트 세계 제2등이란 기록을 세웠다. 이 루트는 세계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 형제가 1970년 초등한 이후 아무도 재등하지 못하고 있던 루트였다. 김 대장은 이현조 대원과 함께 등정 후 반대편인 디아미르벽으로 하산하면서 탈진과 환각에 시달리며 초주검 상태였지만 다행히 베이스캠프로 귀환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대장이 안전을 강조해 산소를 사용한 등정이었다.

2006년에는 14좌 속도 등반을 시도한다. 비교적 낮은 가셔브룸 1봉(8,068m)과 2봉(8,035m)에서 무산소 단독 등정을 해냈다. 이때부터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 레이스가 시작된다. 특히, 2007년부터는 부산산악연맹과 인연을 맺으면서 부산광역시가 후원하는 14좌 완등 프로젝트인 ‘다이내믹 부산희망원정대’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빠른 속도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2007년 K2와 브로드피크 연속 등정은 김 대장의 고산등반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등정이었다. 당시 홍보성 대장은 “10일 안에 로프를 깔고 마지막 캠프4(8,000m)까지 설치하겠다”는 김 대장의 계획에 대해 “국가대표급 클라이머로 구성된 1986년 K2 원정대도 못 한다”고 일축했으나 김 대장은 9일 만에 계획대로 캠프4를 구축했다.

이로써 고산등반능력을 인정받은 김 대장은 다이내믹 부산희망원정대에 정식으로 발탁된다.

2008년 마칼루(8,463m)를 등정한 후에는 도보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넘어와 2, 3일 만에 로체(8,516m)를 등정했다. 이는 당시 엘리자베스 홀리 여사에 의해 ‘베이스캠프 설치 이후 최단 등정’으로 기록됐다.

14좌 등정 레이스를 펼치는 와중이었지만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미지에 대한 도전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2008년 여름에는 그때까지 인간이 정상을 밟지 못한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바투라2봉 세계 초등정을 이룩했다. 2009년 마나슬루(8,163m), 다울라기리(8,167m)를 등정한 김 대장은 2010~2011년 2년 동안 7개 고봉(가셔브룸 1, 2봉 재등정)을 등정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2013년, 김 대장은 마지막 봉우리인 에베레스트를 해발 0m부터 무산소무동력으로 오르는 ‘0 to 8848’ 프로젝트로 오르면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기록하게 됐다. 소요시간은 7년 10개월 6일, 세계 최단기간 등정이었다.

2006년 중국 티베트 히말라야 탐사 도중 만난 원주민들. 김창호 대장은 현지의 문화와 역사를 중시했다.
2006년 중국 티베트 히말라야 탐사 도중 만난 원주민들. 김창호 대장은 현지의 문화와 역사를 중시했다.
2010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김창호 대장과 서성호 대원.
2010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김창호 대장과 서성호 대원.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원정대. 김창호 대장의 첫 8,000m 고봉 등정이었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원정대. 김창호 대장의 첫 8,000m 고봉 등정이었다.

독보적인 알피니스트로 우뚝 서다

김 대장의 무산소 14좌 완등은 한국 최초이며 아시아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과 세계 최단기간 등정이라는 점에서 각기 평가된다. 먼저, 아시아 최초의 무산소 등정은 당시 서구권 산악인들이 종종 제기한 “아시아 산악인들은 ‘피크 헌팅(정상 사냥)’에 몰두해 있다”는 비판을 되받아친 업적이다. 경쟁적이고 성과주의적인 등반이 만연했던 아시아 산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세계 최단기간 등정은 김 대장 개인의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연구 등이 결합된 탁월한 고산등반 능력을 반영한 기록이다. 특히, 자신의 최단기간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바투라2봉 등 미답봉을 등정하고, 부산원정대를 위해 가셔브룸1봉과 2봉을 재등정하면서 이룩한 기록이기에 더욱 가치가 높다.

김 대장은 14좌 완등 이후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코리안웨이 프로젝트로 등반 열정을 이어가며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독보적인 알피니스트로 우뚝 섰다.

항상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상업적 성공에 무관심하며, 후배들의 길잡이 노릇을 자처했다. 뜨거운 열정을 안고, 묵묵히, 그저 산으로 향한 순수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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