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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백두대간 에코 트레일 l 25~27구간 역사문화] “승려의 거처 아니면 도적 소굴이 될 산”

글·사진 월간산 신준범 기자
  • 입력 2019.02.1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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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대사가 희양산 보자마자 놀랐을 정도로 기 센 명당

거대한 바위인 희양산 봉암. 우측 아래에 봉암사가 보인다.
거대한 바위인 희양산 봉암. 우측 아래에 봉암사가 보인다.

희양산이란 이름으로만 1,000년 넘게 불렸다. 이번 구간 최고봉이 백화산임에도 ‘희양산 구간’이라 부르는 건 산에 얽힌 역사가 깊기 때문이다. 희양산은 신라시대에 봉암사가 세워지면서 이름을 알렸다.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는 봉암사鳳巖寺를 세운 지증대사의 터잡기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881년경, 지증대사가 죽기 1년 전의 일이다. 

문경에 심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증대사가 선禪의 정혜定慧가 넉넉하고 천문과 지리의 이치를 거울처럼 환히 들여다본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가진 땅인 희양산에 절을 지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지증대사는 자신이 이제 늙었고, 20여 년 동안 현계산 안락사安樂寺에 머물고 있었기에 사양했다. 그런데 심충의 청이 워낙 굳건하고, 터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나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지증대사는 희양산을 보자마자 무척 놀란 것으로 추측된다. 대사는 놀라 감탄하며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내뱉었다.  

최치원은 그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쳤는데 마치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으로 치켜 솟아오르는 듯하였고, 물은 100겹으로 띠처럼 둘러싸는데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마침내 대사는 절을 세웠다. 이때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해 사찰을 호위토록 했다. 한 구는 지금의 금색전金色殿에 봉안했다고 하며, 다른 한 구는 어디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는데, 둘 다 현존하지는 않는다. 봉암사 터의 기세가 너무 강해 사찰과 철불로 터의 지맥을 누르고 안정시키며, 탑으로써 중심을 잡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열린 희양산문은 후삼국 격변기에 폐허가 되었고, 935년에 정진스님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숭유억불의 조선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1947년 성철 스님의 주도로 ‘봉암사 결사’로 불리는 일대 사건을 통해 혁신의 싹을 틔우게 된다. 

광복 직후 극심한 혼란기에 성철 스님과 청담·자운·우봉 스님 네 분이 이곳에 모였다. 그들은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운다. 

이후 20여 명의 스님이 결사에 동참했고 법도를 세워 수행의 근간을 확립하게 된다. 이것이 봉암사가 엄격한 수행 도량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문경에서 오르는 등산로를 막게 된 시초다. 봉암사 입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 안에 들어오면 세상에서 알았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라.

1982년부터 등산로를 막게 된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정상에서 “야호” 소리를 지르고,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고기를 굽는 등 수행에 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를 떠나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들도 이곳을 지날 때는 과도한 소음은 자제하는 것이 유서 깊은 바위산 희양산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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