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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새연재ㅣ한국의 알피니스트, 아직 살아 있다 <1> 유학재] 클라이머는 도전과 위험 극복해야 한다

월간산
  • 입력 2019.03.06 11:35
  • 수정 2019.04.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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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등반기술가 꼽혀… 손재주 뛰어나 장비제작수준은 ‘한국의 에켄슈타인

2008년 네팔 누플라(5,885m) 원정, 하이캠프를 떠나 출발하는 대원들 뒤로 (왼쪽부터) 에베레스트, 로체, 아마다블람, 마칼루가 보인다.
2008년 네팔 누플라(5,885m) 원정, 하이캠프를 떠나 출발하는 대원들 뒤로 (왼쪽부터) 에베레스트, 로체, 아마다블람, 마칼루가 보인다.

 “한국의 알피니즘Alpinism은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다. 내가 어렸을 때 읽은 등산백과 사전에는 ‘3,000m 이상의 산을 무상 행위로 등반하는 것을 말하고, 이를 추구하는 자를 알피니스트Alpinist라 한다’고 정의했다. 따라서 3,000m 이상의 산에서 극한 등반, 즉 암벽, 빙벽, 눈 속 비박을 하는 사람을 알피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한국에는 높이 3,000m 이상 산이 없다. 한국적 알피니즘이 모호할 수밖에 없다. 일단 대상되는 산이 없기 때문이다. 전통도 없다. 선배들 추구했던 문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 본격 등반행위는 1950~1960년대 실시됐고, 이때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알피니즘이 형성, 정립됐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알피니스트는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극복해 나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면 무난하겠다.”  

한국의 대표적 전천후 알피니스트 유학재(59) 대장. 그를 왜 전천후로 부르냐면, 그는 암벽·빙벽·장비·환경 등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암벽·빙벽 등반기술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할 정도다. 뚜렷한 8,000m급 등반업적은 없지만 자타가 인정하는 등반기술가다. 

몇 년 전 몇 차례 등산을 같이했던 한국산악회 회장을 역임했고 서울대 명예교수인 장승필 교수는 “내가 만난 산악인 중 최고의 등반기술가”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 교수는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꾸며 유학 간 독일에서 알프스를 오르내렸던 학자이면서 등반가다. 그런 장 교수가 유 대장을 칭찬했기에 당시 상황이 아직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故 황기룡 대원과 함께 2010년 네팔 파리랍차(6,017m) 정상.
故 황기룡 대원과 함께 2010년 네팔 파리랍차(6,017m) 정상.

한국의 대표적 전천후 알피니스트

유 대장은 최고의 등반기술가가 될 자질을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었다. 산악회에 입문한 고1 때인 1977년 한 선배로부터 <등산백과>란 책을 선물 받았다. 다른 책은 펴자마자 졸리고 이내 잠이 들었지만 <등산백과>만은 그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책에서 본 내용을 산에 가서 그대로 따라 실습했다. 그는 “그 책은 나만의 산 세계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워낙 재미있게 보던 그 책을 미술시간에 몰래 읽다 압수당했다.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 볼 책이 아니니 졸업할 때 찾아가라”고 해서 같은 책을 유일하게 돈 주고 구입해서 계속 보고 익혔다. 그는 “등산 관련 내용을 제외한 책은 모두 수면제에 가깝다”고 고백한다. 수면제가 아닌 유일한 책이 등산·등반 관련 책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렇게 밉기까지 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그는 그 책의 모든 내용을 읽고 실습을 통해 머릿속에 각인시켜 놓을 정도였다. 한 번은 설악산 토왕성폭포를 갔다. 선배가 크램폰 밴드를 밟아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고정이 필요했다. 그 책에 나오는 응급처치 요령대로 피켈과 슬링으로 다리를 고정시킨 뒤 안전하게 하산했다. 다행히 응급처치가 워낙 좋아 선배는 더 이상 피해 없이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아리랑 리지등반. 2011년 지금은 폐간된 마운틴 잡지에 5년여간 리지 취재산행 <익사이팅 마운틴></div>을 연재했다.
아리랑 리지등반. 2011년 지금은 폐간된 마운틴 잡지에 5년여간 리지 취재산행 <익사이팅 마운틴>을 연재했다.

그는 이같이 등반장비 관련해서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든 응급처치하는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다. 이같은 자질은 등산장비 개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90년 등산장비업체 ㈜트랑고에 입사한다. 당시 홍성암 사장과 함께 피켈, 아이스바일, 아이젠, 하네스, 헬멧, 카라비너 등의 장비를 개발해서 국내 장비업계의 기술을 선도했다. 

남들이 사용하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장비들을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사용하면서 회사로 돌아와 실제로 제작하곤 했다. 

그는 “클라이밍을 하다 보니 자연히 장비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클라이밍 하면서 불편했던 부분을 해결하면서 썼고, 없는 장비는 만들어서 사용했다. 외국의 장비들도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은 즉시 개선해서 사용하는 데 익숙했다. 이런 게 장비개발과 연결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별명은 맥가이버를 빗대 ‘유가이버’ 혹은 영국의 유명 등반가이자 장비제작자인 오스카 에켄슈타인을 빗대 ‘한국의 에켄슈타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손에 들어가면 젓가락도 등반장비가 되는 등반장비계의 ‘미다스의 손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 그는 등반만, 그리고 등산만 알았지, 돈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한국산악회 센트럴카라코람산군 개척등반 5개년계획에 따라 진행된 1차 2008년 카니바샤샤르(6,500m) 및 글로스터피크(6,000m) 등반 원정 중 카니바샤샤르 5,900m에서의 비박.
한국산악회 센트럴카라코람산군 개척등반 5개년계획에 따라 진행된 1차 2008년 카니바샤샤르(6,500m) 및 글로스터피크(6,000m) 등반 원정 중 카니바샤샤르 5,900m에서의 비박.

8,000m급은 못 했나?안 했나?

그는 스스로 “나는 클라이머”라고 말한다. 산악인과는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클라이머는 도전과 위험, 미지의 세계, 상황의 곤란성을 스스로 극복해 가는 사람이다. 알피니스트와 동격인 셈이다. 이를 추구하는 정신이 알피니즘이다. 

“영어로는 클라이머, 하이커, 백패커 등 개념이 명확히 구분되는데, 우리말은 그냥 산악인으로 뭉뚱그려진다. ‘저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라고 물었을 때 ‘산악인’이라고 하면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린다. 그래서 ‘내가 산악인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그는 천생 클라이머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인수봉을 접했다. 등반으로 접한 게 아니고 북한산 등산 가다 길을 잘못 들어 인수봉을 맞닥뜨린 것이다. 슬리퍼를 신은 채 10m 가까이 올라갔고, “내가 갈 데가 아니구나”하고 돌아섰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게 그에게 산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리고 잊었다. 

고교 1학년 때 “인수봉 한 번 올라가보자”는 산악회 선배들의 말을 듣고 따라 나섰다. 그때 ‘맞아, 내가 어릴 때 못 올라갔던 그 봉우리지. 한 번 가보자’는 궁금증이 생겼다. 등반은 남들보다 탁월한 그의 체질이었다. 암벽등반에 자부심을 느꼈다. ‘산에 간다’는 것과 ‘바위 탄다’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바위 타는 게 재미있었다. 하나를 완성하면 저 너머에 뭐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항상 들었다. 올라가서 너머를 봐야 직성에 풀렸다. 이는 지금도 가지고 있는 산에 대한 화두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그 다음 부분에 대해 항상 궁금증이 생겼다. 그게 지금까지 산에 다니는 유인책인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은 등반에 대한 갈증은 초등으로 풀었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으로 자연 연결됐다. 초등의 묘미와 안 가본 루트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면서 산과 등반활동은 계속됐다. 높거나 낮거나 어렵거나 쉽거나 상관없이 항상 즐겁고 새롭게 받아들여진다. 1년에 설악산을 수십 번 들락거리지만 항상 새롭다. 오늘이 지나면 과거이고, 현재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한다.” 

2006년 꽁데샤르(6,093m) 동계 동릉 등반.
2006년 꽁데샤르(6,093m) 동계 동릉 등반.

그의 산에 대한 도전은 1986년 한국산악회에 가입하면서 본격화된다. 1987년 대둔산 ‘신유길’을 개척 초등했고, 1988년 설악산 토왕성폭포를 1시간 38분 만에 단독 등반한 데 이어 이듬해 설악산 개토왕폭포를 초등하기에 이른다. 그의 빙벽에 대한 갈증은 한반도 최북단 장백폭포에까지 미친다. 1992년 이용대 대장이 이끈 원정대는 조선일보 후원으로 ‘장백폭포 초등’을 성공리에 마쳐 중국 땅에 한민족의 기개를 마음껏 발휘한 쾌거로 기록된다. 

1990년부터 본격 해외원정에 나선다. 그해 파미르 ‘브로드킨(7,545m) 루트’를 한국 초등했으며, 1992년 알래스카 데날리 키차트나 스파이어 동벽(2,905m) ‘코리안 다이렉트’ 초등, 1997년 히말라야 가셔브룸 4봉(7,925m) 서벽 ‘코리안 루트’ 초등, 2008년 네팔 꽁데샤르(6,093m) 동계 한국 초등, 파키스탄 CAC SAR(5,942m) 및 COREAN SAR(6,000m) 초등, 2010년 네팔 파리랍차(6,017m) 북동벽 ‘코리안 루트’ 초등, 2011년 네팔 카로리피크(6,184m) 등반, 2012년 네팔 아마다블람 등반 및 아르헨티나 아콩카구아(6,962m) 등정, 2014년 북미 데날리(6,194m) 등정, 2016년 북미 휘트니(4,109m), 그랜드티톤(4,200m), 데블스타워 등정, 네팔 피크41(6,648m) 북벽 초등정, 2017년 네팔 자보우리(6,166m) 등반, 키르기스스탄 코로나(4,440m) 등정 등을 잇달아 성공한다. 

그의 등반을 가만히 보면, 분명 실력과 기술은 뛰어난 듯하고 초등도 제법 많은데 흔히 말하는 히말라야 8,000급은 거의 없다. 여기에 바로 돈과 거리가 먼 그의 인생이 숨어 있다. 

그는 2006년 한국산악회 실버원정대를 시작으로 원정등반에 다시 도전한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흔히 원정대를 꾸려 8,000m급에 도전하려면 기본 1억 원 가까이 기업체 후원이나 모금이 있어야 한다. 그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높이를 6,500m급으로 내리면 비용이 절반으로 확 줄어든다. 뿐만 아니라 소규모의 원정대로 기술등반 위주로 움직이는 알파인등반을 선택한다. 그가 원하는 대로 높이는 높지 않지만 ‘저기 저 너머 뭐가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초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알파인 스타일로 6,500m 이하의 설벽을 등반하면 비용은 2,000만~4,500만 원밖에 안 든다. 대원들끼리 십시일반 모을 수 있고, 쉽게 떠날 수 있어 그의 등반이력에 8,000m급이 거의 안 보이는 이유다. 그건 그의 인생과도 연결된다. 

2008년 카니바샤샤르 등반 중에 악천후와 식량 부족으로 빙하로 탈출해 비박했다.
2008년 카니바샤샤르 등반 중에 악천후와 식량 부족으로 빙하로 탈출해 비박했다.

산을 보는 단상호수 속의 구슬

그가 산을 다니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동시에 있다. 그는 이것을 ‘호수 속의 구슬’에 비유한다. 호수 속에는 구슬이 꽉 차 있다. 더 이상 채울 공간이 없다. 하나를 넣으면 하나를 빼야 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호수 속의 구슬은 제각각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 어떤 구슬은 공부, 다른 구슬은 직장, 가정, 친구 등으로 메워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 산이란 구슬을 하나 넣으면 다른 기능과 역할을 가진 한 개의 구슬은 빼야 한다. 두 개를 다 얻을 수 없다. 그는 등산과 등반을 택했다. 그가 잃은 건 어렸을 적 친구들과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가정 등이다.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을 버렸다. 그의 인생은 산과 관련한 구슬로만 채워졌다. 그렇다고 그가 후회하는 건 아니다. 결국 모든 선택은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는 첫 해외 등반을 1985년에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이 떠나려던 팀이 미덥잖고 본인 스스로도 ‘내가 과연 이런 자세로 8,000m급을 오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어 포기했다. 동료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과 지식, 재력을 갖췄을 때 다시 도전하자고 다짐했다. 

그 5년 뒤 1990년부터 본격 원정도전에 나섰다. 산을 통해 남을 위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정은 일이십만 원 들여서 가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한 번 갈 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야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산을 대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2년마다 산에 가기’ 팀과 함께 2016년 오른 미국의 와이오밍주 그랜드티톤(4,199m) 정상부.
‘2년마다 산에 가기’ 팀과 함께 2016년 오른 미국의 와이오밍주 그랜드티톤(4,199m) 정상부.
1990년 한국산악회 알래스카원정대에 참여해 키차트나스파이어 동벽(2,950m)을 3일 동안 올라 정상을 등정했다.
1990년 한국산악회 알래스카원정대에 참여해 키차트나스파이어 동벽(2,950m)을 3일 동안 올라 정상을 등정했다.

그는 “나는 다른 부분은 퍼석하기 짝이 없지만 등반을 떠날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한다. 한 번의 실수가 죽음과 직결되고, 실수가 절대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등반만큼은 꼼꼼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산에 갈 때 산을 보고 가야지, 사람을 보고 가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사람을 보고 산에 가면 산을 오래 다니지 못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 산에 갈 때 최대한 나의 긍정적인 부분을 보여 준다. 때로는 이런 자세 때문에 산에 다니는 사람들한테 알게 모르게 이용당하기도 하지만 ‘내가 조금 손해 보면 되지’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러면서 그는 일반인들의 예를 들었다. 

“우리가 흔히 산에 갈 때 어디 가자고 하면, 보통 사람들의 첫 반응이 ‘누구랑 가는데?’라고 묻는다. 산이 좋으면 산에 가면 그만이지, 누구와 가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교훈이 술술 나온다.  

2017년 네팔 자보우리피크(6,166m) 등반 중 비박. 밤새 폭설이 내려 고립됐다.
2017년 네팔 자보우리피크(6,166m) 등반 중 비박. 밤새 폭설이 내려 고립됐다.
1997년 가셔브룸 4봉(7,925m) 등반 시 7,500m 비박.
1997년 가셔브룸 4봉(7,925m) 등반 시 7,500m 비박.

앞으로 계획은?산을 벗어난 적 없다

그는 “나의 인생은 산을 벗어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산이 곧 그의 인생이고 전부라는 의미다. 10대 때 산을 오르기 시작해 지금 40여 년을 훌쩍 넘겼다. 산을 통해서 가정을 만들었고, 굶지 않을 정도로 돈도 벌었고, 친구를 사귀었다. 산을 통해서 일궜지만 산을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산에 대한 그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0세까지 원정 알파인 등반을 할 계획이다. 성공이나 실패에 상관없이 실행에 옮길 예정이다. 

그는 50세 넘어서 앞으로는 ‘닥치는 대로 산이다’라고 여긴 적이 있다. 암벽 등반만 추구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으로 미국으로 세계의 산으로 다닌 적이 있다. 60세까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 그 이후부터는 그 실전적 경험과 정신을 공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강구할 생각이다. 

환경 관련 ‘에코 록 프로젝트Eco Rock Project’는 실제로 그가 등반 못지않게 앞으로 추구할 운동이다. 

“평생 자연을 이용하고 훼손하기만 했지 보존과 보호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산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훼손을 최소화하거나 보호하는 운동을 본격 전개하고 있다. 산에서 볼일을 보면 본인이 챙겨 가져와야 한다. 내가 만든 에코 배낭과 에코삽, 에코봉투 등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산에 다니는 사람은 환경이나 자연보호에 앞장서야 한다. 자연은 후세대에게 물려줄 자연유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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