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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한국의 알피니스트, 아직 살아 있다ㅣ<3> 박정용] 한국 유일의 황금피켈상 받은 클라이머

월간산
  • 입력 2019.05.0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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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창호 등과 함께 받아…등반 중 겁 먹어 정신 더 차린 기억 뚜렷

박정용. 사진 황문성 작가.
박정용. 사진 황문성 작가.

세계에서 인정한 한국등반대가 있다. 산악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프랑스 황금피켈상을 수상한 코리안웨이 강가푸르나 원정대. 그 원정대가 황금피켈상 한국 최초 수상자다. 황금피켈상은 전 세계 산악인을 대상으로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등반을 한 산악팀에게 수여하는 산악상이다. 프랑스 고산등반협회와 산악전문지 <몽테뉴>가 1991년 제정한 상으로, 이 상을 수상한 산악인은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다. 수상자 선정기준이 이 상의 권위와 가치를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장비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신 루트를 등반한 산악인이 선정기준이다.  

그 상을 수상한 한국 원정대원 중 한 명이 박정용. 한국 최고의 클라이머로 꼽히는 고 김창호와 최석문이 동행했다. 이번 호 ‘한국의 알피니스트, 아직 살아 있다’의 주인공은 바로 그다.

주요 등반 경력

2016년 강가푸르나(7,455m) 신 루트 등정

2009년 네팔 히말라야 꽝데(6,187m) 북벽 솔로 등반

2008년 네팔 마칼루(8,470m) 등정 

2007년 네팔 히말라야 꽝데(6,187m) 북벽 등반 

2005년 파키스탄 십튼 스파이어(5,950m) 동벽 한국 초등

2004년 로체 남벽 등반 7,600m

1998년 아시아 챔피언십 국가대표 참가

1991년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등산부로 클라이밍 시작

주최 월간<산> 후원 STANLEY

강가푸르나 남벽의 오버행 빙벽을 오르고 있다.
강가푸르나 남벽의 오버행 빙벽을 오르고 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등반은

역시 황금피켈상을 수상하게 했던 ‘2016년 코리안웨이 강가푸르나 원정’이 그의 등반인생에 있어 가장 인상적이었다. 역설적으로 가장 인상 깊으면서 동시에 가장 겁이 났던 순간이기도 했다. 이 원정대는 고 김창호 대장의 히말라야 14좌 국내 첫 무산소 등정 이후 김창호가 세운 새로운 코리안웨이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인간이 오르지 못한 미등정봉과 고산거벽에 완전한 모험정신으로 도전해서 하나의 등반루트를 만들 계획이었다. 고정로프 없이, 캠프 없이, 고소등반 셰르파 없이, 보조 장비 없이, 순전히 등반자 스스로의 힘만으로 오르는 극단의 알파인 등반을 지향했다. 도전과 모험으로 중무장했지만 제3자가 볼 때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등반이었다. 

원정대는 아샤푸르나Asapurna(7,140m)를 먼저 등반한 후 곧바로 바로 옆 강가푸르나Gangapurna(7,455m)로 갈 예정이었다. 인간의지의 한계 시험대였다. 

박정용은 “아샤푸르나를 등반하면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 난 상태였다. 100m만 올라가면 세계 초등정이라는 영광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성공에 얽매이지 않고 김창호 대장과 최석문 대원에게 못 가겠다고 말했다. 김 대장도 GPS로 7,100m까지 등정했지만 과감히 포기하고 같이 하산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공식 고도가 7,140m인데 시계 GPS로 7,100m까지 올라갔으면 정말 엎어지면 무릎 닿을 데까지 올라간 셈이다. 등정만 못 했을 뿐이지 정상 능선 바로 앞까지 신 루트를 만들었다는 데 만족하고 과감히 내려온 것이다.   

강가푸르나의 7,100m 지점에서 안나푸르나 3봉과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찍었다. 몸무게가 10㎏나 빠진 상태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강가푸르나의 7,100m 지점에서 안나푸르나 3봉과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찍었다. 몸무게가 10㎏나 빠진 상태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강가푸르나 원정 때 몸무게 10나 빠져

그는 아샤푸르나에서 너무 큰 체력소모로 몸무게가 8㎏ 정도 빠졌다. 그 상태에서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바로 강가푸르나 등정에 도전했다. 그는 “한계를 뛰어넘는 등반이었다.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모두 흔들렸다. 등반하는 게 무섭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 두려웠다. 하지만 형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아샤푸르나가 등반 전반기였다면, 강가푸르나는 후반기였다. 그는 마찬가지로 정상을 앞두고 포기하고 싶었다. “형, 저는 여기서 그냥 기다리겠습니다.” 김창호가 “네가 가지 못하면 우리도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한 시간여 후 마침내 강가푸르나 정상에 우뚝 섰다. 

“역시 창호 형은 체력이 뛰어났다. 정상에서도 기록과 사진 촬영을 도맡아 꼼꼼히 했다. 나는 그저 쉬고 싶었다.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정상에서 주저앉았다. 너무 체력이 탈진해서 내려갈 일이 두려웠다.” 

하산길은 1,500m의 수직벽. 하산길이 아니라 하강길이었다. 하산 중 다리가 후들거렸다. 등반인생 중에 이렇게 겁이 났던 적은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잡았다. 암각, 스토볼라드, 아발라코프 시스템, 클라이밍다운, 안자일렌 기술을 구사해서 25번의 하강으로 이틀 걸려 무사히 내려왔다. 그들이 산에 남겨둔 것은 박정용 10㎏, 김창호 8㎏, 최석문 6㎏의 몸무게와 스노바 2개뿐이었다. 완벽히 성공한 알파인 등반이었다. 

십튼스파이어의 정상 50m 아래 마지막 도달 지점을 안간힘을 다해 오르고 있다.
십튼스파이어의 정상 50m 아래 마지막 도달 지점을 안간힘을 다해 오르고 있다.

박정용은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상황은 끔찍했다. 아마 다시 하려면 절대 못 할 그런 등반이었다. 그 두려움과 체력탈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대원들 간의 믿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듬해인 2017년 그들은 한국인으로 첫 황금피켈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프랑스 유명 여성 산악인 카트린느 데스티벨은 수상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팀 김창호, 최석문, 박정용은 네팔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강가푸르나 서봉 남벽을 세 번의 비박으로 등반했고, 한 명이 고소적응으로 기다리는 상태에서 두 명이 정상 100m 근처에서 동료와의 안전한 하산 없는 등정은 의미 없다고 판단해서 내려왔다. 이후 세 명은 강가푸르나 남벽에 고난도 루트를 스피디하게 등반했고, 그 높이에서 알파인스타일로 등정한 최초의 신 루트였다.” 

십튼스파이어의 대암벽 구간을 힘들게 오르고 있다.
십튼스파이어의 대암벽 구간을 힘들게 오르고 있다.

등반을 하는 이유는

그는 고교산악부 출신이다. 부산기계공고 등산부로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호기심 많던 시절 새로운 건 항상 눈에 먼저 들어온다. 하고 싶어진다. 더욱이 새로우면서 도전적인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클라이밍이 눈에 쏙 들어왔다. 하고 싶은 일은 하면서 재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일취월장, 괄목상대 할 정도였다. 

하지만 20세 때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당시 부산 빌라 알파인클럽에서 우리나라 첫 전국 암벽대회를 해운대 백사장에서 개최하면서 인공암벽을 만들어 경기를 했다. 그런데 해운대 백사장 대신 시멘트 바닥인 요트 대회장에 인공암벽을 만들다 15m 아래로 추락했다. 뒤꿈치가 바닥에 닿으면서 뼈가 으스러졌다. 뒤꿈치가 산산조각 났다. 

오히려 이게 천운이었다. 비스듬히 넘어졌으면 뼈가 부러지면서 다른 부위를 찌르는 2차 부상까지 입었을 텐데, 다행히 뒤꿈치만 손상됐다. 엉덩이뼈를 잘게 잘라 이식수술을 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후유증도 없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이때 그는 ‘잘못하면 사고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됐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강가푸르나의 거대한 벽에 다가서고 있다.
강가푸르나의 거대한 벽에 다가서고 있다.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 찾은 게 클라이밍

사고 이후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찾는 데 집중했다. 역시 클라이밍이었다. 클라이밍 선수로 승승장구했다. 1998년 아시아 챔피언십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처음 나간 국제대회에서 12위를 했다. 계속 했지만 그만그만한 성적뿐이었다. 재미가 떨어졌다. ‘다른 거 뭐 할 거 없나’ 두리번거리다 눈에 들어온 게 거벽등반이었다. 

클라이밍에서 쌓은 기술을 거벽등반 할 때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주변 평가도 “빠르고 악착같이 잘 잡고, 단계별로 꾸준히 올라갈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클라이밍이나 거벽등반의 공통점은 놓치면 죽거나 부상이다. 악착같이 잡아야 한다. 

2001년부터 본격 거벽등반 훈련을 했다. 그는 2004년 로체 남벽(7,600m) 등정을 시작으로 2005년 파키스탄 십튼 스파이어(5,950m) 동벽 한국 초등, 2007년 네팔 꽝데(6,187m) 북벽 등반, 2008년 네팔 마칼루(8,470m) 등정, 2009년 네팔 히말라야 꽝데(6,187m) 북벽 단독 등정 등 기록적인 등반을 이어간다. 2008년 마칼루 등정에는 고 김창호와 함께 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등반하는 매순간 만족스런 장면은 있었던 건 아니다. 2007년 꽝데 등반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원정이었다. 실력을 인정받아 주도적으로 원정대를 꾸렸지만 시즌을 잘못 택해서 등반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던지 카라반 도중 안면근육마비가 와서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겪기도 했다. 

십튼스파이어의 나이프리지구간을 지나고 있다.
십튼스파이어의 나이프리지구간을 지나고 있다.

아내는 매순간 등반을 말렸다?

 

그는 1998년 23세 때 일찌감치 결혼을 했다. 7세 연상의 아내다. 클라이밍 하면서 만나 눈이 맞았다. 신부는 결혼하면서 “히말라야 원정 가지 않고 빙벽 등반 하지 않기로 각서를 쓰라”고 강권했다. 각서 대신 말로 대신하면서 넘겼다. “위험한 등반은 절대 하지 않고, 베이스캠프까지만 간다”고. 그 말은 그가 지금까지 매년 아내에게 반복하고 있다. 아내는 지금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 그 반복이 그에게 위기를 대처하게 하는 힘을 주는지 모른다. 초등이라는 유혹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등정이라는 달콤한 매력을 눈앞에서 과감히 버릴 줄 아는 등반을 하게 하는 무언의 힘으로 작용한다. 그 무언의 힘은 부부 간의 사랑이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일 수 있다. 

아샤푸르나의 1,000m 설벽을 오르고 있다.
아샤푸르나의 1,000m 설벽을 오르고 있다.

아내는 지금도 고산등반 격렬 반대

그는 “지금도 아내가 심하게 반대를 한다. 아내의 반대로 전체 원정의 3분의 1밖에 못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반대를 그도 일정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가고 싶은 데 다 갔으면 지금 살아 있지 않거나 미친 놈 됐을 것”이라고 수긍한다. 

그는 좋아서 클라이밍과 거벽등반을 하고 있지만 목숨 걸고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거벽등반 자체가 일상생활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일반인이 볼 때는 목숨 걸고 하는 것같이 보인다. 실제로 좋아서 하는 것과 목숨 걸고 하는 행위의 구분이 모호하다. 그 경계, 기준이 어떻게 될까. 좋은 기준이 하나 있다. 

얼마 전 등반 다큐멘터리 영화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프리솔로Free Solo’. 아무 장비 없이 순전히 손가락만으로 1,000m가 넘는 수직절벽의 암벽을 오르는 내용이다. 그 영화를 본 30년 넘게 클라이밍을 해 온 사람들조차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박정용은 이에 대해 “장비 없이 극단적인 리스크를 안고 하는 등반이라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할 것”이라면서 “알피니스트는 항상 최상의 리스크를 안고 등반하기 때문에 일반인 가치로는 상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면서 “등반행위에 대한 가치도 일반인 가치와 똑 같은 하나의 행위로 보면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일반인이 상상의 산물로 만들어낸 극단의 가치일 수 있으며, 직접 하는 행위와는 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변에서 띄워 주면 더 높은 가치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냥 일상생활 중의 하나로 보면 똑 같은 가치이고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강가푸르나 신 루트를 개척하고 고 김창호 대장과 최석문, 박정용(사진 왼쪽부터)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강가푸르나 신 루트를 개척하고 고 김창호 대장과 최석문, 박정용(사진 왼쪽부터)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 그는 “알피니즘은 산을 한없이 순수하게 대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산을 오르는 행위도 자유의지, 외부 도움을 받든 안 받든 그것도 본인의 의지이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행위,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순수한 등반행위가 알피니즘이라는 것이다. 히말라야 고산 등반가가 정상에서 몰래 산소를 마셨다 하더라도 표시는 안 난다. 하지만 내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순수함이라는 설명이다. 

그 순수는 바로 사람과 통한다. 그가 산에, 아니 등반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한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진심어린 행위가 그 사람이 가진 본심이라고 주장한다. 히말라야 고봉에서 체력이 바닥나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는 서로 속이 다 드러난다. 그럴 때 ‘아, 이 사람은 나하고 코드가 맞구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하고 판단을 내린다. 안 맞으면 맞는 사람을 찾게 되고, 찾아서 원정을 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고산 등반은 사회적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람들 깊은 속마음까지 알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다른 놀이나 행위에서는 그런 재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와 비슷하다”며, 깊이와 깊이는 서로 통한다는 의미로 설명했다.   

그에게 산은 바로 그런 존재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산을 함께 즐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최고의 가치인 셈이다. 그래서 같은 취미를 가진 연상의 아내와 동고동락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연봉 많이 받고 비싼 집에 사는 친구가 부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1년에 한 번 들까말까 하다고 한다. 재미있게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게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그가 좋아하는 그리고 아내도 좋아하는 클라이밍 암장을 부부가 각각 운영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황금피켈상을 수상한 뒤 프랑스 유명 산악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황금피켈상을 수상한 뒤 프랑스 유명 산악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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