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ㅣ익스트림대회 TNF100 KOREA] “중요한 건, 기록! 밥값만 해선 안 된다!”

  • 글 김지섭(노스페이스 애슬리트팀)
  • 사진 노스페이스
    입력 2019.07.11 15:00

    한국 간판 트레일러너 김지섭 선수의 실감나는 우승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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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 초입을 오르는 필자. 빠른 속도로 선두 경쟁을 펼치고 있다.
    작년 TNF100 KOREA 100㎞ 경기에서 우승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입고 말았다. 부상은 의외로 길게 이어졌고, 스스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나는 몸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집중하고 사소한 것부터 한 가지씩 고쳐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부상 부위는 완치되었으나, 전체적인 몸 상태는 제로가 아닌 마이너스라고 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다시 시작한 훈련,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 번의 훈련에 잔부상을 하나씩 얻었다. 잔부상들이 온 몸을 훑어가기 시작했다. 간절함과 꾸준한 살핌에 모든 부상들을 이겨내고, 다시 본 훈련을 시작했다. 마이너스에서 겨우 0으로 만들었으니, 다시 다져갈 일만 남았다.
    TNF100 KOREA는 나에겐 매년 열리는 트레일러닝 대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다. 하지만 지금의 순위에 만족한다면,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경쟁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순위보다는 기록으로 경쟁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훈련을 했다. 식단부터 훈련 내용까지, 실험적인 요소가 다분한, 처음 시도해 보는 것들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밥값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문장이 동기를 부여해 주었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혹독하게 산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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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km 부문 참가자들이 순위 경쟁을 펼치고 있다.
    올해 해치운 신발만 벌써 네 켤레째였지만, 대회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부담감에 극도로 초조해졌다. 부담감을 동기부여의 발판으로 삼으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 않았다. 대회 포스터에  자랑스럽게 내 사진까지 실렸으나, 준비기간 내내 포스터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징크스처럼 대회 직전 감기와 몸살이 찾아와 컨디션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 대회도 비슷했다. 대회 전날까지 체열로 침대가 뜨거워져, 제대로 누워 있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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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을 빠르게 주파하는 선수들.
    밥값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트레일러닝은 평지만 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러닝을 운영하는 자기만의 뚜렷한 주관과 남다른 상황판단, 예리함이 필요하다. 아마 지금 상황에선 예리함보다는 포기를 생각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출발선 앞에 섰을 땐  ‘밥값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작년 100㎞ 경기에 참가했을 때 달려봤던 길이다. 오늘 내가 달릴 길은 그 반쪽인 50㎞ 경기이다. 작년 우승의 좋은 기운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강릉 경포호수까지 뻗은 길을 머릿속에 그렸다. 주요 위치는 아직 선명하다.
    오전 8시 30분. 50㎞ 부문 출발지인 대관령 숲 안내센터에 모든 선수들이 섰다. 출발 신호를 기다린다. 출발선 앞에 나서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출발선 약간 뒤에서 장딴지를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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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km 부문 참가 선수들이 소나무숲을 달리고 있다. 가장 선두에 선 심재덕 선수가 우승했다.
    카운트다운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컨디션이 이지경이니 앞뒤 따질 것 없이 준비한 모든 걸 트레일 위에 쏟아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애초에 순위 경쟁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초반부터 빠르게 속도를 올렸다. 질세라 누군가가 바짝 뒤쫓는다.
    선자령 등산로 입구를 지나 울창한 숲에 들어서니, 아늑한 길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다.
    서늘한 숲속에서도 몸의 화끈거림이 느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땀으로 인해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함께 달리는 상대 선수의 스틱이 땅에 튕기며 경쾌함이 느껴진다. 그 리듬에 발을 맞췄다. 그 선수도 부상으로 인해 몸이 온전치 않다고 들었는데, 역시 실전에서는 힘차게 목적지를 향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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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km 부문 참가 선수들이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선자령은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급하지 않게 이어진 좁은 길에 펼쳐진 초록빛 넓은 초원은 트레일러너를 걷지 않고 뛰게 만든다. 거대한 선자령 표지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으면 좋으련만, 이 길에선 그런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코에 닿을 듯 하늘길이 연이어 굽이친다. 바람개비 풍력발전기의 웅웅거림이 길 위를 압도한다. 첫 번째 체크포인트를 통과하기 전 이어지는 목장 정글은 가장 어려운 길이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작년엔 진창길이었으나, 다행히 쉽게 통과했다. 파였던 길은 반듯하게 채워져 있었고, 위험 구간은 마대로 정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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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 중간에 있는 체크포인트. 선수들의 가장 중요한 휴식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
    첫 번째 체크 포인트에 도착했다. 자원봉사자께서 아이스크림을 내밀었지만, 다급함에 물만 채우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이 길 위에서 포기할 것이 생각보다 많다. 동해 전망대를 넘어 펼쳐질 탁 트인 시원한 조망을 살피지 못하는 아쉬움이 뒤따른다. 대신 선두로 올라섰다.
    곤신봉을 넘기 전, 뒤따라오는 후미 선수와의 거리를 살폈다. 여유 부릴 틈은 없었다. 곤신봉을 넘어서자 날 휘감았던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들었지만, 바람이 달래 줬던 열은 다시 내 몸을 화끈거리게 한다. 식었던 땀이 목덜미에 흐른다. 
    두 번째 체크포인트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바위가 날카롭게 널브러져 있고,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두텁게 낙엽이 쌓여 있다. 이제부터 등산로를 가로지르는 임도가 곳곳에 뻗어 있어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 십상이다.
    긴 내리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착지하고 다시 발을 뻗어 다음 지점에 착지하는 일련의 과정은 다분히 조건반사적이다. 수 만 번 반복 훈련을 했기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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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km 부문 우승 메달을 들고 선 필자. 코스 신기록을 달성했다.
    내리막의 짜릿함과 속도감에 익숙해져 잠시 방심했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몸을 던졌다. 평지도 아닌 내리막에선 아무리 뛰어난 민첩성을 가졌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나마 푹신한 흙바닥 위에 뒹굴었으니 다행이다. 무릎의 상처 정도는 가볍게 무시한다. 혹시나 망가졌을 장비가 신경 쓰일 뿐이다. 평지에서 빠른 러너라고 하더라고 어설프게 내리막에서 속도를 높이면, 급속도로 쌓이는 다리의 피로감에 오르막을 다시 오르기 힘들어진다. 경험을 스승삼아 페이스를 조절했다.
    두 번째 체크포인트인 보현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급한 오르막이다. 서둘러 비어 있던 물통을 가득 채웠다. 자원봉사자의 안내에 따라 다음 코스를 향해 달렸다. 고개를 처박고 오르막을 기어올랐다. 피어나듯 올라오는 흙먼지 사이로 모자챙에 고였던 땀방울이 후드득 바닥에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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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스름을 뚫고 대회장 가까이 해가 떠오른다. 50km 부문 참가자는 이곳에서 셔틀버스 탑승 후, 출발지인 대관령 숲 안내센터로 이동한다.
    결승점 다가오자 눈물이 절로
    조용했던 자원봉사자의 응원소리가 메아리치는 걸 보니 뒤따라온 선수가 벌써 도착했나보다. 곤신봉에서 보았을 땐 상당히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금세 격차가 좁혀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 살피지 않았다. 나의 영역은 내리막이 아닌 오르막에 있다. 
    “50㎞ 선두 주자인가요?”
    자원봉사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못 들은 척 애써 외면했다. 다시 발을 던졌다. 이제 겨우 중반부에 이르렀건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복부 얕은 곳부터 서서히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탈수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이 심란하다.
    물통은 배낭에 넣지 않고 손에 붙들었다. 부지런히 물을 몸에 흡수시켰다. 원래 패턴보다 조금 시간을 당겨 전해질 알약들을 입에 삼켰다. 후반부에 가까울수록 트레일은 적어지고 도로와 임도가 빈번하게 앞에 펼쳐진다. 코너를 몇 번이고 돌았다. 뜨거운 아스팔트 지열이 나를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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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크포인트에서 제공되는 각종 음식들.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다. “지섭씨 힘내요!”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바짝 들고, 코끝이 찡했다. 최악의 컨디션 속에서 움트는 두려움,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길이었다.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응원해 주는 많은 사람들. 
    육체보다 정신적인 무언가가 나를 마지막까지 이끈다. 정신력이 육체를 지배한다. 더 이상 땀은 흐르지 않는다. 찔끔찔끔 입 안에서 흐르던 짠물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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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후반부의 체크포인트에서는 허기진 선수들을 위해 특별 음식이 제공된다.
    어느새 그 끝을 향한다. 허난설헌 기념공원을 지나 자원봉사자의 유도를 따라서 도로를 횡단했다. 이제 3㎞ 정도 남은 결승점을 향한다. 경포호 주변을 둘러싼 순환로를 끝으로 길고 긴 길은 마침표를 찍는다.
    결승점이 다가오자 감정에 북받쳐 눈물이 난다. 잠시 속도를 줄여 호흡을 가다듬는다. 뒤따르는 선수와의 거리가 미심쩍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장 먼저 우승 테이프를 끊었다. 공식기록 4시간 23분 3초! 대회 50㎞ 부문 최단 기록을 세우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퍼지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애당초 느긋함과는 담을 쌓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정신없이 오르내리는 것은 산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각자의 알피니즘은 서로 다르다. 트레일러너의 알피니즘은 가장 가볍게 시작해, 가장 빠르게 산을 오르내림에 있다. 나는 여전히 다음 무대를 향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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