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웅의 고지도이야기 85] 朝淸 경계를 획정한 ‘백두산정계비도’

  • 글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부회장
    입력 2019.08.0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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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정계 시에 그려진 ‘백두산정계비도’(자료 : 서울대학교규장각)
    백두산은 지리적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을 통틀어 가장 높은 산이며, 역사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영산으로 숭앙되어 온 산이다. 또한 중국에서도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르며, 만주족 조상의 발상지로 숭배해 왔다. 청나라 제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는 1677년 내대신 무묵눌武黙訥을 보내 장백산을 답사하고 사례祀禮를 지낸 뒤, 장백산을 국가제사의 대상으로 삼았고, 1684년에는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조선왕조실록에는 勒楚로 하여금 장백산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1708년부터는 예수회 선교사들로 하여금 중국 전역을 측량해 지도를 제작했는데, 이듬해 선교사 레지J. B. Regis 일행이 동북지방의 측량을 맡게 되었다. 측량할 범위는 요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는 흑룡강, 남동쪽으로는 조선과의 변경지역까지였다. 이들은 조선 국경 4km까지 접근했으나, 조선 측의 반대로 더 이상 측량하지 못했다.
    그러자 강희제는 1711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으로 하여금 압록강 일대에서 조선인의 범월犯越 살인사건 문제를 조사했으며, 이듬해인 1712년에는 조선인의 범월 사건을 빌미로 백두산 일대에 국경을 정할 목적으로 목극등을 파견한다는 서신을 조선 정부에 보냈다. 이에 조선은 접반사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를 파견해 국경을 정하도록 했다.
    목극등 일행은 조선 접반사 군관 이의복李義復 일행과 함께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해 5월 15일 백두산 천지 가에 이르렀고, 일행은 그곳 아래 남동쪽 4㎞ 지점인 2,150m 고지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에는 ‘대청大淸’이라는 글자 밑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이라고 썼다. 
    그뒤 목극등은 무산에 도착했을 때, 숙종에게 바칠 지도를 박권에게 건네주었다. 이 지도는 목극등과 동행한 화원 유윤길劉允吉이 그린 것으로, 현재 서울대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첩 <여지도輿地圖>(古 4709-1)에 수록된 ‘임진목호극등정계시소모壬辰穆胡克登定界時所模’이다. 이 지도는 목극등이 건네준 지도를 뒤에 모사한 것으로, ‘백두산정계비도’, ‘백산도白山圖’, ‘임진정계비도 壬辰定界碑圖 등으로도 불린다.
    지도첩 <여지도>는 가로 21.2cm, 세로 31.8cm 크기의 40쪽 짜리 지도첩으로, 천하제지도天下諸國圖ㆍ중국도中國圖ㆍ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圖ㆍ팔도도별도八道道別圖ㆍ유구도琉球圖ㆍ일본도日本圖ㆍ성경여지도盛京輿地全圖ㆍ임진목호극등정계시소모壬辰穆胡克澄定時所模 등의 지도와 함께 도별 지지地誌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첩에 간기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언제 누가 제작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1712년에 세운 정계비가 표시되어 있고, 경상도의 안음安陰과 산음山陰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어 1767년 이전에 제작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백두산정계비도는 종이에 채색필사로 그렸고 크기는 가로 42.4cm, 세로 31.8cm이다. 지도에 그려진 범위는 북쪽은 백두산, 남쪽은 혜산惠山, 서쪽은 무산茂山까지의 넓은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상단에는 “1712년(숙종 38) 목극등이 경계를 정할 때 박권 정계사康熙五十一年 我肅宗三十八年 壬辰穆胡克澄定時所模 朴權定界使”라는 표제가 쓰여 있다. 
    왼쪽 상단에는 백두산과 함께 천지가 크게 그려지고, 천지에서 북쪽으로 송화강이 발원하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발원한다. 천지 근처에서 동남류해 중간에서 끊겼다가 감토봉甘土峰 근처에서 솟아 무산 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두만강이다. 끊긴 곳에 ‘입지암류入地暗流’라고 표기한 것은 땅속으로 하천이 흐른다는 뜻이고, 감토봉 위에 표기된 ‘수출水出’은 하천이 솟구친다는 뜻이다. 
    정계비는 ‘강원비江原碑’라고 표기되었고, 그 옆에 표기된 ‘옥문玉門’은 ‘토문土門’의 오기인 것 같다. 가늘게 그려진 붉은 선은 목극등 일행의 경로이고, 빗금처진 붉은 선은 박권 일행의 경로이다. 
    역관 김경문金慶門으로부터 전해들은 정계 시의 상황을 기록한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기白頭山記>에 따르면, 일행은 5월 7일 혜산진을 출발해 이튿날 검천釰川을 건너 곤장昆長 귀퉁이에 도착했을 때 목극등은 연로한 박권과 이선부가 백두산에 오를 것을 허락하지 않아 팀이 갈리게 된다. 목극등과 조선 접반사 군관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북상하게 되고, 박권 일행은 삼지연을 거쳐 무산으로 하산하게 된다. 경로에 표시된 삼각형 기호와 원 기호는 일행들이 지숙止宿한 곳이다. 
    당시 수석 역관이었던 김지남金指南은 목극등과 접반사 박권이 국경문제로 교섭할 때 통역을 맡았는데, 그가 기록한 <북정록北征錄>에 따르면 5월 5일 밤 목극등이 변경지역에 대한 정보를 묻자 김지남은 “장백산 꼭대기의 큰 호수 남쪽이 바로 조선의 경계입니다”라고 답했다. 출발 이튿날 목극등이 김지남도 제외시키자 이때 김지남은 백두산 답사 뒤 지도를 그려 줄 것을 청했다. 이에 목극등이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라고 했다. 
    5월 15일 ‘목극등이 백두산 동쪽 가의 가장 작은 물줄기를 토문강의 근원으로 삼았다’는 서신을 군관 이의복이 무산에 보냈다. 그뒤 박권이 “임강대臨江臺 근처에서 대홍단수大紅丹水로 합쳐지는 물줄기가 진실로 두만강이며, 대인大人이 찾은 물줄기는 대홍단수의 상류”라고 주장했으나, 목극등은 서신으로 “압록강과 토문강 두 강이 모두 백두산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발원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고 있으니, 원래 강의 북쪽을 중국의 영토로 정하고 강의 남쪽을 조선의 영토로 정한 것은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 논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김지남의 비갈碑碣에 이런 글이 있다. 
    목극등이 건네준 그림을 숙종께 바치자 숙종은 그림 위에 “그림을 보니 오히려 장엄한데, 산에 오른 기상은 어떠했을까, 지난날 경계를 다투던 근심이, 이로부터 저절로 사라졌다네繪畵觀猶壯 登山氣苦何 向時爭界慮 從此自消磨”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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