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여성 백두대간 단독 일시종주기<16>] 이를 꽉 물고 견디며 하루에 52㎞를 걷다!

  • 글 사진 성예진(블랙야크 셰르파)
    입력 2019.10.31 15:30

    공사 중인 칠보산 지나 비법정 코스 우회하여 장성봉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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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은 어둠이 내린 정자에서 등산화를 벋고 뻗어버렸다.
    9월20일 일시종주 27일차
    은티재~은티마을~연풍~각연사~칠보산~스무살이계곡~장성봉~막장봉~투구봉~제수리재~관평삼거리~버리미기재~벌바위 52㎞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으아! 정말이지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다. 기지개를 켜는데, 웅성웅성 주위가 시끄러워진다. 조용하던 산 속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굴까. 한 둘이 아닌 것 같아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다. 대화를 통해 짐작한 그들은 네댓 명쯤 되는듯하다. 산객의 대화라기엔 무언가 수상하고, 약초꾼이라기엔 어설픈 대화를 나누며 산 깊은 곳으로 사라진다. 이내 소리가 멀어지고,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은 탓에 괜히 숨죽여 있던 나는 빠르게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내 부산스러움에 옆에서 곤히 자던 상진 오빠도 일어났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조용히 일어난다는 것이 깨워버리고 말았다. 
    애써 정한 계획이 소용없어진 순간이다.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며 다음날 일정에 대해 열띤 토론을 끝낸 뒤였다. 다음 코스가 국도를 우회해야 하는 길이니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서두르기로 하고, 오빠는 조금 천천히 움직여 시간을 맞추기로 했다. 이미 잠이 깨어버린 탓에 같이 하산하는 걸로 하고 오빠도 짐을 정리한다. 내 덕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고생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태여 정할 필요 없었는데. 아무렴 어때! 덕분에 하산길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여행의 매력이다. 
    혼자 내려갈 거라 생각했는데 옆에 누군가 함께 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같이 걷는 길이 즐겁기만 하다. 은티마을까지 2㎞가 조금 넘는다. 내리막인데다 길마저 좋아 눈 깜짝 할 새 마을까지 내려왔다.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걸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이렇게만 걸을 수 있으면 하루 온종일도 걷겠다.
    이제 다시 혼자다. 은티마을에서 국도를 경유해 쌍곡휴게소까지 걸을 계획이다. 쌍곡휴게소 이후에는 막장봉과 장성봉을 오르는 코스인데, 좀 더 길게 진행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 거란 판단에 오늘은 쌍곡휴게소까지만 걷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국립공원인 탓에 하산 시간에 제한이 있어 오르기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까닭이다. 하산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 덕분에 여유가 생겨 쌍곡으로 가는 길에 각연사를 들머리로 칠보산에 오를 계획을 세웠다. 국도로 돌고 돌아 다시 들머리를 찾는 걸음이지만 기왕 돌아가는 길이라면 도로보다는 산길을 경유하는 편이 더 마음이 끌린다. 백두대간은 아니지만 100대 명산에 속하는 칠보산 정상 인증도 겸할 수 있으니 1석 2조인 셈이다. 쌍곡휴게소를 들날머리로 하면 칠보산에서 쌍곡휴게소로 하산하는 길과 쌍곡휴게소에서 장성봉까지 오르는 탐방로가 있어 여러모로 좋은 선택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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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루봉 휴게소의 잊지 못할 양식 요리. 등산학교 동기인 상진 오빠가 사준 돈가스&오므라이스였다.
    등산학교 동기인 상진 오빠는 “맛있는 밥 한 끼 사주고 보내고 싶다”며 차를 몰아 연풍 시내에 아침 식사 할 곳이 있는지 알아보러 떠났다. 식당을 물색하는 동안 나는 내 걸음에 충실하기로 했다. 은티마을에서 연풍까지 갈 수 있는 만큼 걸어 내려간다. 각연사로 가려면 어차피 연풍 시내를 지나야 하기에 걸음을 서두른다. 연풍까지 절반 정도 남았을까? 오빠가 차를 타고 돌아왔다. 연풍에는 마땅히 아침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다고. 대신 연풍에서 근무하는 지인에게 근처 시루봉 휴게소를 추천받았다고 한다. 은티마을에서 연풍까지 절반 정도 내려온 시점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걸음이다. 잠시 밥만 먹고 돌아와야지! 돌아와서 다시 이곳에서부터 걸어야 하기에 주위를 잘 살피며 밥을 먹으러 떠난다.
    나는 돈가스&오므라이스를, 오빠는 제육볶음. 양식과 한식을 고루 시켰다. 휴게소 음식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양송이 스프와 바게트 빵까지 곁들여진 나름 구색을 갖춘 양식 차림에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오빠가 주문한 한식도 반찬 가짓수도 많고, 맛도 괜찮았다. 게다가 휴게소인데도 직원분이 서빙까지 해주었다. 샹들리에와 고급스러운 조명 아래, 화려한 인테리어가 더해져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온 기분마저 드는 시루봉 휴게소였다. 이렇게 제대로 차려서 먹는 것이 얼마 만인가. 대간길에서 이런 호사스러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와! 돈가스 정말 맛있어요!” 감탄을 연발하며 먹는데, 오빠가 한 마디 했다. “지금 너 상태로 맛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라며 많이 먹으라고, 부족하면 더 먹으라고 한다. 휴게소에서의 한 끼에 이렇게나 행복해질 수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봐도 신기하기만 하다. 대간길 위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행복한 식사였다. 
    스낵코너에서 군것질 거리 몇 개를 집어 들고 다시 대간길로 향한다. 식사를 하고 나오며 과자 진열장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였다. 지금 당장 먹고 싶진 않지만 길을 걸으면 저 간식들이 언제고 생각날 때가 있을 거란 생각에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구태여 무게를 더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손에는 이미 초콜릿 하나와 과자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공사가 한창인 시골 도로에서 상진 오빠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담백한 인사를 주고받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오빠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연풍을 지나 하천을 건넌다. 시골 내음 물씬 풍기는 농로를 지나고 끝없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걷는데, 지도를 보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차량의 통행이 많은 길이 이어진다. 쌩쌩 달리는 차들이 내 곁을 빠르게 지난다. 때로는 큰 덤프 차량이 만들어내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린다. 위험한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화물차가 지날 때는 긴장하며 갓길 쪽으로 바싹 붙어 걷는다. 차들이 워낙 빠르게 달려 ‘고속도로로 잘못 올라온 걸까’하는 걱정도 했지만 이내 길가에 사과판매점과 매점, 국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에 한숨 덜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 자전거를 처음 사고 기쁜 마음에 창녕 할머니 집에서 대구까지 자전거를 탈 때, 실수로 고속도로로 올라가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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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보산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은티재에서 악휘봉, 악휘봉에서 은티재, 그리고 은티재에서 은티마을을 지나 도로를 따라 이곳까지. 악휘봉에서 막장봉까지의 구간이 비법정 탐방로인 까닭에 한참을 돌아오느라 고생을 하긴 했지만 이 길을 지나며 생각하니 잘 견뎠다 뿌듯한 마음이 나를 토닥여준다. ‘도로를 조금만 더 걸으면 산길로 들어갈 수 있으니 힘내서 걷자!’
    각연사로 가는 길.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다리를 지나기도 했다. 풀숲에 쌓여 잘 보이지 않는 비상계단을 발견했다.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희미하지만 남아있다. 무슨 보물을 발견한 양 기뻤다. 이 길로 내려가면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마을 사람들만 지날 법한 길처럼 보이는데, 내 눈에 들어온 것에 감사했다. 그냥 지나지 않고 둘러보길 잘했다. 걸음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쁜 순간이었다.
    각연사에서 칠보산까지의 길은 익숙하다. 비교적 최근에 명산100을 위해 지난 길이라 낯설지 않다. 활목재와 청석재로 나뉘는 구간에서 청석재를 거쳐 칠보산에 올랐다. 이전에도 이 길로 올랐던 기억이다. 짧은 코스를 택하다보니 매번 청석재로, 같은 길을 지나는 것 같다. 청석재 직전부터 정상까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새로운 계단을 만들고 있었고, 공사용 자재가 쌓여 있는 양을 보니 근처에 인공 구조물을 몇 개 더 설치할 모양인가보다. 공사 중인 아저씨들과 인사하며 정상으로 향하는데 공사 구간이 많았다. 인공적인 계단보다 자연 그대로의 것이 더 좋은데. 공사 현장을 지나며 아쉽기만 했다.
    칠보산 정상 부근도 공사가 한창이다. 자재를 자르다가 내가 올라가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공사 중 산객들이 지나다니면 불편할 법 한데도 어찌나 친절한지. 미안할 이유가 없었지만 괜히 죄송해지는 걸음이었다. 아저씨 한 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셔서 칠보산 정상에서 셀카가 아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로써 칠보산도 ‘명산100 어게인’ 인증을 하게 되었다. 공사 자재로 둘러싸인 칠보산 정상석. 색다른 인증이 되었다. 감사를 전하고 절말 방면으로 길을 서두른다.
    정상에서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다. 예상한 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절말로 내려가며 고민에 휩싸인다. 장성봉까지 갈 수 있을까? 약 3㎞ 정도 내려가면 쌍곡휴게소로 내려가는 길과 장성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전에 고민을 끝내야 했다. 정말 1시간 내내 고민스러웠다. 계획을 달리해 장성봉, 막장봉을 올라야 하나, 아니면 애초에 계획대로 쌍곡휴게소까지만 가야 할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3시까지 갈림길에 도착하면 장성봉까지 가기로 했다. 4시간 정도면 충분히 제수리재까지 하산이 가능할 것 같았다. 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진다. 3시까지 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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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 자재가 쌓인 칠보산 정상에서. 감사하게도 인부 아저씨가 찍어주었다.
    공사 현장을 지나 깨끗한 구조물들을 밟으며 내려간다. 새로 설치하고 이 길을 지난 몇 안 되는 사람일 테다. 나도 이 구조물이 생기기 전에 칠보산에 올랐으니 “예전에는 말이야”라고 이야기 할 거리가 생겼다. 산에 다니다 보면 어른들이 종종 예전에는 길이 험했는데 요즘은 길이 좋아졌다며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멀게만 느껴졌는데, 산행을 하다 보니 나도 이런 일을 겪는구나 싶어 신기하기만 했다.
    정말 딱 3시에 갈림길을 지났고, 한치의 고민 없이 곧장 장성봉으로 향했다. 남은 길에 대한 고민은 내려오며 한 것으로도 충분했다. 장성봉까지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제수리재까지 제 시간에 내려가는 것에만 총력을 기울인다. 500m 마다 나오는 안내표지에 매 구간 시간을 계산하며 빠르게 내달린다. 거의 뛰다시피 속도를 올렸고, 장성봉과 막장봉 갈림길에 배낭을 내려두고 장성봉에 올랐다. 장성봉까지 마지막 1㎞가 고비였다. 급경사를 오르다 순간 허기가 몰려와 초코바 세 개를 욱여넣었다. 넉넉하진 않아도 순간 당이 확 끌어 오르며 기운이 났다. 혹시 몰라 여러 개를 챙긴 것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배가 고파 주저앉을 뻔했다. 그렇게 장성봉까지 무사히 올라 다시 갈림길로 돌아왔다. 장성봉 이후 대야산까지 비법정탐방로인 까닭이다.
    배낭 안에 남아 있던 햄버거로 다 해결하지 못한 허기를 달래고, 막장봉으로 걸음을 옮긴다. 신기하게도 햄버거 하나에 배고픔이 가라앉았다. 열량이 높은 덕이다. 많이 메고 다닐 수만 있다면 햄버거만큼 좋은 행동식도 없는 것 같다. 맛도 좋고, 열량도 높고, 무엇보다 내 입맛에 맞으니 거부감 없이 잘 들어간다. 대간에 들어선 이래 피자와 햄버거를 가장 맛있게 먹은 것 같다. 대간길 위에서 건강한 맛의 음식은 썩 내키지 않았다. 평소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인스턴트 음식의 위력을 새롭게 발견했다. 햄버거를 사준 상진 오빠에게 다시금 고마움이 밀려온다. 정말 나를 여러 번 살린 셈이다.
    갈림길에서 막장봉은 그리 멀지 않았다. 햄버거의 힘으로 금세 올랐고, 제수리재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일까? 긴장을 늦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멀리 구름 사이로 노란 빛이 비치기 시작할 때 암릉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분명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음에도 여기까지 어언 40㎞를 숨 가쁘게 달려온 나에게 잠깐 휴식을 주고 싶었다. 아직 2㎞ 남은 하산에 대한 걱정 보다 숨 가쁘게 달려온 하루에 대한 뿌듯함에 젖어, 붉게 변하는 석양을 바라본다. 무척 감동적인 그림이다.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제수리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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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장봉으로 이어진 가파른 바윗길. 하루 동안 워낙 긴 거리를 걸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쉽지 않았다.
    온 세상이 흔들린다. 바람이 거세지다 못해 굵직한 나무마저 뽑을 기세로 세차게 불어댄다. 흔들리는 세상 속으로 몇 걸음이고 걸어 들어간다. 그 기세가 심상찮다. 주말 내내 예정된 태풍의 영향인듯 보인다. 가벼운 우천이면 좋으련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이번에도 태풍의 영향권인 탓에 주말이 지나고 나면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다. 대간을 걸으며 벌써 두 번째 맞는 태풍이다. 무슨 태풍이 이리 많이 생기는지. 가을에 태풍이 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자연 현상임에도 이리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걸 보면 평소 얼마나 날씨에 무심했는지 알 수 있다. 나무가 격렬하게 춤을 추니 내가 비틀거리는듯 느껴진다. 걷다보니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음에도 정말 내가 취한듯 느껴진다. 피곤이 극에 달한 상태라 피곤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했을 테다. 바람에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피곤에, 흔들리는 나무에 취해 걷고 또 걷는다.
    산 넘어 산. 아니 산 넘어 암릉이다. 예상치 못한 암릉, 로프가 즐비한 코스에 당황스럽다. 장성봉과 막장봉의 갈림길에서 탐방안내소에 전화해 제수리재로 내려가는 코스의 난이도를 물어보고, 보통 정도의 난이도라 설명을 들은 뒤였다. 지금의 내게는 보통의 난이도가 어려움 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피곤이 극에 달한 탓이다. 나는 왜 이 길을 막연히 편안한 길일거라, 육산일거라 생각했을까. 종일 긴 거리를 달려왔기에 3㎞ 정도의 거리를 얕잡아 봤다가 큰 코 다쳤다. 안일한 마음을 가졌던 나를 탓해본다. 마지막까지 쉽지 않은 대간길이다.
    하산이 예상보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별 탈 없이 무사히 제수리재로 내려왔다. 시계는 정확히 저녁 7시를 가리킨다. 어둠이 내려앉은 국도는 정적만이 흐르고, 인적 드문 길의 스산함 만이 자리하고 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국도변. 헤드랜턴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반사경이 나를 맞아준다. 주위를 둘러봐도 텐트 칠 만한 장소가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오늘 밤, 부모님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로 하셨다. 내일부터 3일간 태풍을 동반한 비소식이 있어 오늘까지만 운행을 하고, 이후 기상 상황에 따라 최대 이틀은 철수를 결정했다. 아마 지금쯤 아버지는 막 퇴근했을 테고, 어머니는 내게 올 준비를 끝냈을 것이다. 대구 집에서 이곳까지는 2시간 정도 거리, 집과 회사를 오가는 시간,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10시쯤 이곳에 도착할 것 같다. 아직 3시간이 남았다. 마냥 쉬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좀 더 걸어볼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제수리재부터 대야산 입구까지 모두 도로를 따라야 하는 길인 탓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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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장봉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걸음은 이미 버리미기재로 향하고 있다. 고민 없이 걷고 있는 것이다. 지도를 보니 벌바위까지 8㎞ 정도 되는 거리이다. 제수리재 아래 관평삼거리를 지나 버리미기재에서 벌바위, 대야산 시작점까지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벌바위까지 모두 내리막이다. 제수리재에서 내려와 버리미기재까지 짧은 거리를 오르는 것 외엔 모두 내리막이다. 터덜터덜 힘없이 간다. 제수리재에 도착한 뒤로 긴장이 풀려 몸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걸어지는 내 몸이 신기하면서도 고맙다. 인체의 신비에 감탄하고 있다. 매일 같이 한계점을 찍을 수 있는 것에 신기한 나날이다. 벌바위에 도착하면 50㎞는 거뜬히 채울 것 같다. 언제 이만큼 걸은 것인지 어느새 휴대폰 화면 속 걸은 거리가 46㎞를 훌쩍 넘어가고 있다. 많이 걸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수치로써 확인하는 거리는 실로 놀랍다. 발바닥은 감각이 없어진지 오래고, 퉁퉁 부어오른 발의 느낌이 전해진다. 마치 곰발바닥으로 변한 것 마냥 퉁퉁 부어오른 발이다. 
    통증이 심해 쉬어가고 싶었지만 길가에 갓길이 드물어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왔다, 다왔다’ 속으로 되뇌며 힘겹게 벌바위에 도착했다. 마을 회관 옆 정자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배낭을 벗어던질 힘조차 없어 배낭 멘 채로 철퍼덕 누워버렸다. ‘오늘 하루도 끝났구나’ 안도하며 그대로 5분을 쉬었다. 대간의 후반부에 접어들며 힘에 부치는 날들이 이어진다. 매일 매일 하루를 견딘다는 마음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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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이 퉁퉁 부어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GPS앱인 트랭글을 종료하며 오늘 하루 걸은 길을 확인했다. 지도에 내가 걸은 길이 붉은 줄로 표시되어 있다. 내가 걸으며 만든 52㎞의 루트. 스스로 생각해도 경악스러운 거리다. 지도에 표시된 그림으로 보니 실로 놀랍게만 느껴진다. 내가 걷긴 했지만 어찌 걸었을까 싶을 만치 긴 거리. 여태 걸은 걸음 중 당일 거리로 단연 가장 긴 걸음이다. 오늘을 잘 버텨낸 내가 대견하기만 하다. 이제 내일 하루만 더 걸으면 이틀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다.
    멍하니 앉아 쉬고 있으니 슬슬 한기가 느껴진다. 고어텍스 재킷과 오버트라우저를 주섬주섬 입고, 빵빵한 배낭에 기대어 부모님을 기다린다.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주위를 서성이는 고양이를 바라보기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진을 정리할 힘도, 기사를 쓸 힘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배까지 고픈 탓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축 늘어진 채로 가만히 앉아 눈만 끔뻑이며 기다린다. 배는 점점 고파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추위가 내 전신을 휘감는다. 가냘픈 가로등만이 지키고 있는 어두컴컴한 시골길. 
    저 멀리 골목 어귀에서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느껴진다. 부모님일까? 기대하며 바라보다 이내 부모님의 차가 아닌 걸 알아채고 실망하길 여러 번. 이제는 아무 느낌이 없다. 배고프던 느낌도, 시리던 손발의 느낌도 사라진지 오래다. 오랜 기다림에 감각마저 잊혀진듯 하다. 1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차 한대가 골목을 지난다. 이번에도 아니겠지. 대체 언제 오시는 걸까. 생각하며 눈을 감는데 정적을 깨고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진아!” 이젠 환청이 들리나보다 했는데, 반복해서 들리는 이름에 보니 멀리서 나를 찾는 부모님의 목소리. 반가운 마음에 버선발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발이 퉁퉁 부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반가움을 대신한다. 대간은 지극히 현실이다.
    젖은 옷부터 새것으로 갈아입고 두터운 패딩을 걸쳐 온기를 찾는다. 몸이 따뜻해지니 살 것 같다. 배낭에 다운재킷이 있었음에도 지저분한 몸이 신경 쓰여 입지 않은 탓에 덜덜 떨면서 기다렸다. 마침 클렌징 티슈가 똑 떨어져버려 몸을 닦을 수 없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몇 푼 안 되는 옷을 아끼려다 고생만 했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오늘의 고생담을 풀어낸다. 입을 뗄 힘조차 없어 기운 없는 채로 젓가락질하기 바빴는데, 밥이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간 새로 생긴 에피소드를 풀어내고 있었다. 따뜻한데다 배까지 부르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금세 졸음이 밀려온다. 52㎞를 걸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쏟아지는 잠을 피할 새 없이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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