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 ‘알피니즘’ㅣ<2> 근현대 알피니즘의 분화] ‘전략파’와 ‘낭만파’가 이끌어 온 알피니즘

  • 글 오영훈 기획위원
    입력 2020.05.19 17:49

    전략파는 가이드 원정대, 낭만파는 슈퍼 알피니즘으로 각각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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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대의 오스카 에켄슈타인.
    알피니즘은 대상지나 등반 방식, 개인 성향과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됐다. 먼저 암벽등반과 볼더링, 빙벽등반이 갈라져 나왔다. 8,000m급 고산의 정상 수집형 등반과 고산거벽등반도 각각 별도의 분야가 됐다. 고산 스키활강, 패러글라이딩, 베이스점프 등 새로운 하산 방식도 등장했다.
    근현대 알피니즘의 발달을 이끌어 온 두 개의 큰 축은 ‘전략파’와 ‘낭만파’다. 전략파는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 가용한 장비를 충분히 사용해 등정 가능성을 전략적으로 높이는 알피니스트들을 일컬으며, 낭만파는 소규모 원정대로 가능한 인간의 힘을 사용해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을 말한다. 초기 근대 등반사에는 전략파와 낭만파가 함께 등반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각각 가이드 원정대와 슈퍼 알피니즘으로 진화했다.
    전략파와 낭만파의 갈등을 처음 볼 수 있는 사례는 히말라야 원정의 표본이기도 한 마틴 콘웨이(1856~1937)의 1892년 카라코룸 원정이다. 콘웨이는 시간 순으로 원정기를 정리했고, 현지 정부의 공식 협조도 얻었다. 언론사와 독점 계약을 맺고 전속 화가를 대동했다. 오늘날로 치면 촬영대원인 셈이다. 또 현지인인 인도 구르카 용병 네 명을 처음으로 짐꾼이 아닌 등반대원으로 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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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주역, 조지 말로리.
    당시 원정대원 면면은 화려하다. 후에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두 차례나 이끈 찰스 브루스 장군,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를 초등한 스위스 가이드 마티아스 추르브리겐, 현대식 12발 크램폰의 시초격 장비를 고안한 오스트리아의 오스카 에켄슈타인(1859~1921) 등이다.
    콘웨이와 에켄슈타인은 전략파와 낭만파를 대표한다. 둘은 원정 내내 티격태격했다. 마주치는 산마다 올라보겠다는 에켄슈타인을 저지하다 마침내 콘웨이는 원정 도중 그를 유럽으로 돌려보내고 만다. 에켄슈타인은 주류 영국산악회 회원들의 관행이던 가이드를 대동하고 오르는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기 힘으로 오르는 과정에 알피니즘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선 유별나게 손끝으로 매달리는 동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에켄슈타인은 오늘날 볼더링의 창시자로 꼽힌다.
    전략파와 낭만파의 어색한 동거는 한동안 계속됐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명언을 남긴 조지 말로리(1886~1924)는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낭만파로 1920년대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서 등반을 주도했다. 말로리 뒤에는 전략파 알렉산더 켈라스(1868~1921)가 있었다. 켈라스는 1910년대 히말라야 원정대의 전략을 책임진 숨은 공신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21년 1차 에베레스트 원정 당시 산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객사하고 말았다. 주변인들은 켈라스가 살아 있었다면 에베레스트 초등이 더 빨랐을 거라며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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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숨은 주역인 알렉산더 켈라스. 화학자이기도 한 켈라스는 1910년대 히말라야 원정등반을 다니며 고소에 반응하는 신체를 연구하기도 해 ‘고소의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갈등 속에서도 알피니즘 고집한 초기 낭만파
    20세기 초 낭만파로 으뜸가는 알피니스트는 빌 틸먼(1898~1977)과 에릭 십턴(1907~1977)이다. 이들은 ‘치고 빠지는’ 소규모 원정 방식을 도입해 1930년대 히말라야 등반을 주도했다. 틸먼은 1936년 4명의 영미 원정대를 이끌고 당시 등정된 산 중 최고 높이인 난다데비(7,816m)를 초등하는 기염을 토해 큰 화제를 모았다. 틸먼은 1938년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8,300m 지점까지 오르는 기록도 세운다.
    한편 1930년대 유럽은 전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5차례 연속으로 낭가파르바트(8,126m)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총 26명이 사망하는 처참한 결과를 남겼다. 종전 후 원정에 참여한 산악인들에게는 나치즘에 봉사했다는 비판이 가해졌고, 대규모 원정대에 대한 거부감을 처음으로 일게 만든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국가주의가 서구 열강의 등반을 좌우했다. 십턴은 1951년에 영국 정찰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의 네팔 방면 아이스폴 지대 등반 가능성을 타진하는 성과를 거뒀다. 등정 가능성이 무르익은 1953년, 소규모를 고집하던 십턴은 갈등 끝에 대장직을 내놓고 원정대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장교 출신의 존 헌트가 대장을 맡아 등반을 진행, 영광스러운 에베레스트 초등 소식을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에 맞춰 본국으로 타진하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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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소규모 등반의 선구자였던 1935년 봄의 에릭 십턴.
    낭만파의 선두였던 십턴은 에베레스트 초등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것에 낙심하고 산을 떠났다. 다른 낭만파 산악인들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위압적인 전략파 대장과 군대식 원정대 문화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자신들의 알피니즘을 고집했다.
    헤르만 불(1924~1957)은 1953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등정시도를 그만두고 내려오라는 대장의 명령을 못 들은 체하고 산소통, 동료의 도움 없이 홀로 등정에 나서 무사히 정상에 섰다. 당시 유행하던 경향과는 상반되게 소규모 낭만파 등반에 심취한 그는 그런 자신의 등반을 ‘서부 알프스 방식’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듬해 파키스탄의 K2(8,611m)에서는 더 큰 갈등이 있었다. 발터 보나티(1930~2011)는 이탈리아 K2 원정대에 막내로 참여했다. 그러나 정상 공격 직전 보나티는 마지막 캠프 근처까지 올라왔다가 길을 잃었다. 동사를 면하고 가까스로 내려온 보나티는 당시 캠프에 있던 등정조가 등정 욕심에 사로잡혀 자신을 외면했다고 비난했다. 등정조와 이탈리아산악회는 오히려 보나티가 등정 욕심을 못 이겨 홀로 정상을 향하려 했다고 서로 비난했다. 이 갈등이 법정공방으로까지 번지고 장기화되자 분을 참지 못한 보나티는 1964년 겨울 마터호른 초등 100주년을 기념해 북벽을 5일에 걸쳐 단독으로 오르는 대단한 등반을 마치고 전격 은퇴를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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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자레 마에스트리.
    1964년은 중국의 시샤팡마를 끝으로 히말라야 14좌 초등이 완료된 해다. 이후에도 전략파가 주도하는 대규모 원정대는 한동안 이어졌다. 1970년 안나푸르나(8,091m)의 깎아지른 남벽을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1934년생)이 이끈 원정대가 초등에 성공했다. 히말라야 8,000m급 봉에서 노말 루트가 아닌 어려운 루트를 택해 오른 최초의 등반이었다.
    보닝턴은 다른 뛰어난 팀들이 번번이 실패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도 1975년에 성공했다. 이 원정은 등정 성공에 따른 보너스까지 포함한 대규모 기업후원을 받았기에 최초로 상업성이 가미된 등반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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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로토레. 사진 위키피디아.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시대
    낭만파와 전략파의 갈등은 히말라야가 아닌 남미에서 폭발했다. 1970년 이탈리아의 체자레 마에스트리(1929년생)는 침봉 세로토레(3,128m)를 다른 4명의 대원과 함께 150kg의 휘발유 컴프레서를 끌고 가며 벽에 400여 개의 볼트를 설치하고 올랐다. 원래 마에스트리는 자유등반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으나, 1959년 세로토레 등정 후 하산 중 동료가 카메라와 함께 추락, 사망하면서 등반 사진을 제출하지 못해 사람들이 등정을 믿어 주지 않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볼트를 박고 정상에 오른 것이었다.
    마에스트리 비판의 선봉장은 같은 이탈리아인인 당시 26세의 라인홀트 메스너(1944년생)였다. 메스너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낀 티롤 출신이다. 티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두 나라에 분리·합병되기 전까지 로마제국 이후 줄곧 독립을 유지해 온 지역이다. 그렇다보니 메스너에게 국가주의적, 집단주의적 등반은 원천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다.
    메스너 자신이 국가주의적 성격의 대규모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혹독한 고생을 했다. 1970년, 독일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서 비고 4,500m 거벽 루팔벽을 동생과 함께 올라 초등하며 정상에 섰지만 반대편으로 내려오다가 동생을 잃었다. 슬픔에 싸일 틈도 없이 메스너를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대단한 횡단 등반 업적을 완성하기 위해 구조를 기다리지 않고 지친 동생을 데리고 모험을 감행했다는 비난이 원정대 내부에서 제기되면서 수십 년에 걸친 상호비방과 법정공방으로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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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로토레 상단 벽에 아직 매달려 있는 마에스트리의 콤프레서. 사진 레드불.
    메스너는 등반가들이 볼트로 ‘불가능을 죽여 없애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머메리, 불 등이 보여 준 등반이야말로 ‘정당한 등반By fair means’이라고 천명했다. ‘정당한 등반’이라는 말은 앨버트 머메리(1855~1895)로부터 기원한다. 그는 1880년 알프스 당 뒤 제앙(4,013m)을 오르다 정상 근처 절벽 앞에서 ‘정당한 수단으로는 절대 불가’라면서 돌아섰다. 이로부터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몸의 힘만으로 오르는 등반을 ‘정당한 등반’이라 부르는 관행이 시작됐다.
    메스너는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섰다. 1975년 가셔브룸 1봉(8,080m)을 알파인스타일로 올라 8,000m급 고산도 경량등반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1978년에는 페테르 하벨러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산소통을 쓰지 않고 올랐다. 이어 1980년에는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단독으로 올랐다. 모두 세계를 놀라게 한 대단한 등반이었다. 이후 메스너는 1986년 최초로 14좌 완등을 이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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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마터호른 북벽을 단독으로 오르다 비박 중인 발터 보나티의 사진이 당시 한 월간지 표지를 장식했다.
    1980년대, 슈퍼 알피니즘의 시대
    1970년대 이후 서구 등반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히피문화와 낙관주의, 개인주의가 가미된다. 자신을 내세우는 경쟁심에 등반은 더욱 저돌적으로 변했다. 낭만파의 서부 알프스 방식은 알파인스타일이나, 정당한 등반 등으로 불리며 알피니즘의 주된 추세로 자리 잡았다.
    메스너의 14좌 등반은 언론에 오르내리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반면 전위적인 등반가들은 이를 숫자놀음이라 비웃으며 ‘슈퍼 알피니즘’이라고도 불리는 고산 경량등반 장르를 개척한다. 대표적인 등반이 영국의 더그 스코트(1941년생)와 알렉스 매킨타이어(1954~1982)의 1980년 시샤팡마(8,027m) 남벽 알파인스타일 등반이다. 8,000m급 고산의 고난도 루트를 경량 방식으로 오른 최초의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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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이탈리아 K2 원정대에 참여한 발터 보나티(왼쪽)와 다른 대원. 사진 K2 라 베리타.
    매킨타이어와 폴란드인 보이테크 쿠르티카(1947년생)의 1981년 다울라기리(8,167m) 등반, 스위스인 에르하르트 로레탕(1959~2011) 팀의 1985년 다울라기리 동벽 동계 초등, 쿠르티카와 오스트리아인 로베르트 샤우어(1953년생)의 1985년 가셔브룸 4봉(7,925m) 서벽 등반 등이 슈퍼 알피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등반으로 꼽힌다.
    슈퍼 알피니즘은 ‘등반을 위한 등반’이라는 철칙으로 요약된다. 쿠르티카는 같은 폴란드인인 예지 쿠쿠츠카(1948~1989)와도 친했는데, 그는 1980년대 폴란드 산악계의 주역으로, 메스너와 14좌 완등을 벌이다 1987년에 두 번째로 성공한 인물이다. 14좌를 15번 올랐는데, 이 중 신 루트 9차례, 알파인스타일 8차례, 동계 4차례 등 대담한 등반을 펼쳤다. 그러나 쿠르티카는 그의 등반마저도 “기록을 위한 등반에는 영혼이 없다”며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슈퍼 알피니즘 자체는 너무 극단적이라 실제로 실천한 알피니스트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경량·속공 방식은 이후 서구 산악계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최대한 간소한 준비로 어려운 루트를 오른다는 태도다. 산의 높이는 중요치 않았다. 실제로 2015~2018년도 황금피켈상 본선에 오른 등반 197선 중 7,000m 이상의 산을 오른 등반은 전체 10% 남짓인 19차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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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단독으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라인홀트 메스너. 8,000m에서 행한 최초의 단독등반이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의 신예 등반가들도 대단한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펼쳤다. 1990년대 이후 시들했던 일본 산악계는 최근 ‘기리기리보이스’라 불리는 몇몇 20대 등반가들이 출현해 알래스카를 중심으로 고난도 등반을 펼치며 2009~2013년 사이 황금피켈상을 네 차례나 수상했다.
    중국은 1990년대 북경대 산악부를 중심으로 조금씩 알피니즘이 활성화되고 있다. 얀동동(1984~2012)은 2009년 중국 쓰촨성 쓰구냥(6,250m) 남벽 등 여러 차례 고난도 등반으로 세계적 이목을 끌었으나 안타깝게도 크레바스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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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 알피니즘을 이끌었던 보이테크 쿠르티카. 사진 데스니벨.
    서구 낭만파와 다른 ‘동구권 알피니즘’
    슈퍼 알피니즘의 시대를 논할 때 폴란드, 러시아 등 동구권 산악인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폴란드 산악인들은 히말라야에 봄과 가을 시즌에 이어 ‘제3의 시즌’인 동계 등반을 시작한 주역이다. 이들은 1974~1975년 겨울에 8,000m급에서 최초로 로체(8,516m) 등반을 시도했다. 비록 정상은 오르지 못했으나 이후 1980년 2월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1988년까지 8,000m급 7개 봉의 동계 초등을 일궈냈다. 히말라야 14좌 동계 등정 릴레이는 동구권 붕괴 후 한동안 뜸하다가 폴란드 산악인들이 2005년, 20012년, 2013년에 각각 하나씩 더 추가했다.
    8,000m급 동계등반에 폴란드인만 도전한 것은 아니다. 낭가파르바트는 2016년 2월 동계 초등되기까지 30여 년 동안 각국에서 30여 차례의 원정대가 시도했었다. 마지막 남은 봉은 K2(8,611m)로 폴란드·러시아·이탈리아 산악인들의 각축전이 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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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알파인스타일 등반을 이끌었던 얀동동. 사진 미국산악연감.
    이탈리아의 시모네 모로(1967년생), 러시아의 데니스 우룹코(1973년생) 등은 ‘외로운 늑대’ 같은 대중적 이미지를 쌓으며 SNS로 팬과 소통하며 동계등반에 뛰어들었다. 이외에 일본의 노부카즈 쿠리키(1982~2018), 독일의 요스트 코부쉬(1992년생) 등도 최근 겨울 시즌 에베레스트에서 극단적인 단독등반을 시도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소련 치하 20세기 대부분을 세계와 단절된 채 정부 지원 속에 독자적인 등반전통을 일궈갔다. 매년 텐산, 파미르, 카프카스 산군 등지에서 고산등반 전국대회를 펼쳐 극한등반의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인들은 물밀 듯 히말라야로 몰려와 대단한 등반을 펼쳤다. 자누(7,710m) 북벽 직등루트 등반으로 2004년 황금피켈상을 수상한 알렉산더 오딘초프(1957년생)는 노르웨이 트롤 월, 페루 와스카랑(6,768m), 파키스탄 라톡 3봉(6,949m) 서벽 등 세계 10대 거벽을 러시아식으로 오르겠다는 ‘러시아 빅월 프로젝트’를 추진해 대단한 집념으로 성공시켰다. 또 다른 러시아 원정대는 2007년까지 미등으로 남아 있던 K2 서벽에 석 달 동안 매달린 끝에 대단한 직등루트를 뚫는다. 16명이 마치 시계태엽처럼 조를 바꿔가며 이룩한 팀워크 등반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등반에 대해 소규모를 강조하는 서구 낭만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고정로프를 대량으로 사용한 자누 등반은 함께 황금피켈상 후보에 올랐던 미국의 스티브 하우스로부터 “이건 현대 알피니즘과 맞지 않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규모가 더 컸던 K2 서벽 등반은 아예 황금피켈상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이에 분개한 러시아 산악인들은 그해부터 ‘러시아 황금피켈상’ 제도를 신설,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 산악인들이 모여 서로 우열을 견주는 장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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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동동이 오른 중국 쓰구낭 남벽 직등루트.
    ‘전략파’의 新형태, ‘가이드 원정대’
    1996년 5월 10~11일 에베레스트 정상부에 폭풍이 닥치면서 총 8명이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벌어졌다. 현장에 있던 존 크라카우어는 이듬해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출간했고 이는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책은 미숙한 초보자를 무리하게 등반시킨 가이드 원정대를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데, 당시 가이드로 구조를 위해 사투를 벌였던 러시아의 아나톨리 부크레예프(1958~1997)는 <더 클라임>을 출간해 둘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크레예프는 가이드 등반이 꼭 나쁜 것은 아니며, 철저한 훈련과 적응등반으로 안전한 등반을 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때부터 가이드 원정대는 ‘상업원정대’로 불리며 ‘초보자가 돈으로 정상을 산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가이드 원정대는 1960년대부터 시작한 네팔의 트레킹 관광산업에서 점차 발전해 나갔다. 7,000m 이상의 산에서 처음으로 가이드를 고용한 사례는 1977년에 미국인 2명이 13명의 고객을 대동하고 인도 눈쿤(7,077m)을 오른 등반이다. 8,000m급 산에서는 1985년 미국의 부호 딕 배스가 숙련 등반가 데이비드 브레셔스를 고용해 에베레스트를 오른 게 최초다. 이후 가이드 원정대는 꾸준히 증가해 오늘날 고산등반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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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원정대가 2007년 개척한 K2 서벽 직등루트.
    에베레스트 남쪽 산중에서 500여 년을 살아온 셰르파족은 1907년 노르웨이 원정대에 짐꾼으로 참가한 뒤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20년대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서는 평지가 아닌 산에서 짐을 나르는 고소포터로만 활약했고, 1939년 미국 K2 원정대에서 처음으로 8,000m급 정상 공격조에 편입됐다. 1954년의 오스트리아 초오유 원정대에서는 전진, 후퇴 등 결정을 내리는 위치로 격상됐다. 이후 셰르파 없는 히말라야 원정대는 드물다. 셰르파들은 등반에서 항상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실질적인 등반을 도맡는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셰르파족이 소유한 원정대행사가 자체적으로 8,000m급 가이드 원정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히말라야 14좌를 네팔인 최초로 완등한 밍마 셰르파(1978년생)가 설립한 ‘세븐서밋트렉’은 에베레스트에서 2012년 처음으로 서양 대행사보다 더 큰 규모로 원정대를 조직할 정도로 성장했다. 풍부한 현장경험과 적은 수수료가 비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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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빅월 프로젝트를 이끈 알렉산더 오딘초프. 사진 안나 피우노바.
    2020년 현재 세븐서밋트렉을 포함한 셰르파 소유 4~5개의 대형 대행사가 다른 10여 개 네팔 및 국제 대행사와 함께 히말라야 원정대의 등반을 대행하고 있다. 네팔만이 아니라 중국·파키스탄·인도의 산들까지 셰르파들이 파견되어 가이드 등반을 이어가고 있다.
    가이드 원정대의 주 고객은 영국인·독일인·미국인 등 서양인과 일본인이었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는 중국인·인도인 및 중동 출신이 대거 늘어나고 있다. 급증하는 중국인 수요에 맞춰 여름에 중국령 무즈타그아타(7,509m), 가을에 마나슬루(8,163m), 이듬해 에베레스트를 연속으로 오르는 등반 패키지가 최근 유행하고 있다. 이 신흥국 산악인들은 셰르파에 대한 인종주의적 태도가 없고, 경제력도 있어 앞으로 히말라야 등반의 주역이 될 수 있다.
    가이드 원정대가 쉬운 산만 오르는 것은 아니다. 미등봉 초등 등반, 알파인스타일 등반까지 자체 모객 원정대를 결성하고 있다. 세븐서밋트렉은 2020~2021년 K2 동계초등 상품을 출시하고 모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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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등반의 최대 원정대행사가 된 세븐서밋트렉의 설립자 밍마 셰르파(왼쪽)가 라인홀트 메스너(가운데)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만났다. 사진 세븐서밋트렉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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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원정대행사가 설치해 준 대원 개인용 텐트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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