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옛 문헌에 나오는 ‘한반도 명산’ <6> 조선왕조실록⑤] 세조 때는 1년 새 기우·기청제 동시 지내
글 박정원 선임기자
입력 2020.05.2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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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에서 한 달에 몇 번 기우제 올리기도…풍수·명당에 대한 기록도 안 빠져
<세종실록>148권부터 155권까지는 전국 명산과 대천, 지리적·문화적 특성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한 사실상 최초의 관인 지리역사서를 완성했다. 지금까지 전하는 이 지리지는 현대에도 매우 유익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세종 이후 명산에 대한 기준이나 시각이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문종실록>2권 문종 즉위년(1450) 6월에 경상도 각 수령에게 기우제 지낼 것을 허락한다는 제목하에 ‘경상도 감사 보고에 6월 이후로 비가 시기를 어기어, 지금 화곡禾穀 이삭이 날 때를 당하여 말라죽을 염려가 있으므로, 이미 각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친히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하니, 청컨대 본도의 악岳·해海·독瀆·명산名山·대천大川에 향과 축을 내리어 비를 빌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시대에는 명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게 국가와 지방관청의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다. 문종 1년에도 비슷한 내용의 기록이 소개된다.
<문종실록>13권 문종 2년(1452)에는 임금의 병이 낫지 않으므로 조관들을 보내어 명산·대천의 신에게 기도하게 하다는 제하의 기록에서 ‘의정부에서 임금의 병환이 낫지 않는 이유로써 조관을 나누어 보내어 가까운 명산·대천의 신에게 기도했는데, 축문은 모두 동궁이 서명한 것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의 명산은 기우제를 지내는 데 이어 치병의 대상으로서도 활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양 주변의 산뿐만 아니라 여러 도의 명산대천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뒤이어 계속 소개된다.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허약한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병환 때문에 고생한 사실도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단종실록>2·6·7권에도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그대로 소개된다. 여기서 특징적인 부분만 소개하면, 단종 1년(1453) 7월 의정부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를 청하다는 제하의 기록에서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呈文에게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번 7월 초3일에 북교에서 기우하였으나, 아직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청컨대 다시 풍운뇌우단(조선조 때 바람·구름·우레·비를 맡아 보던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단壇. 서울 남교 청파역 부근에 있었는데,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음)과 한강·삼각·목멱의 우사단雩祀壇(하늘에 비를 빌던 기우제를 지내던 단)에서 빌게 하소서. 또 듣건대, 경기·충청도·강원도·황해도·전라도가 모두 가물다 하니, 청컨대 아울러 향과 축문을 내려서 관찰사의 수령관 및 소재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악·해·독과 명산대천에 빌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다.
명산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천신과 산신에 지내는 제단을 마련해서 봄·가을 정기적으로 최소한 지방수령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조선시대 들어서 명산에서 산신제를 지낸 기록은 없어졌지만 다소 변형된 형태로 기우제나 치병제를 계속 지냈다. 그런데 왜 명산에서 이 같은 제사를 지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만 일단 전체 기록을 먼저 살펴본 뒤, 그 이유에 대한 의미를 한번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