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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감동산행기] 오! 설악이여! 공룡이여!

장광현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 입력 2020.05.2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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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진달래가 핀 설악산의 아름다운 주능선.
털진달래가 핀 설악산의 아름다운 주능선.

금요 무박이일 설악산행 버스의 여유 좌석이 있다는 W산악회에 한 자리를 예약했다. 설악의 백미인 공룡능선을 걸어 보고 싶었다. 단독 무박 산행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십중팔구 시시각각 산행의 세세한 부분을 홀로 판단하면서 고독을 친구 삼아 걷는 힘든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 거리낌 없이 오롯이 혼자서 보고 생각하고 느끼며 걷는 등 여러 이점도 있을 것이다.

새벽 1시30분경 도착한 설악휴게소, 지붕 위에 하현달이 걸린 휴게소의 너른 주차장에는 버스 한 대만 서 있을 뿐 한산하다. 휴게소 슈퍼 주인은 요즘 산행버스 수가 많이 줄었다며 푸념을 내뱉는다. 요즘 설악을 찾는 사람도 많이 줄어 버스 한 대에 여러 산악회 산객을 함께 태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시 버스는 오색 남설악탐방지원센터 앞으로 이동했다. 산객들이 잠시 후 오전 3시에 열릴 입구 주변에서 분주히 산행채비를 갖추고 있다. 나 역시 이들과 함께 어둠에 잠겨 있는 설악의 품으로 들어선다.

오색은 설악 최고봉인 대청봉으로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의 출발점으로 종주산행객들이 밤을 달려 몰려든다. 정상으로 곧바로 치고 오르는 길이니 결코 녹록하지 않은 여정이다. 초입부터 앞뒤로 늘어선 산객들의 긴 행렬은 어둠에 덮인 산길을 따라 이어지고 발자국 소리, 스틱이 바닥을 치는 소리, 몰아쉬는 숨소리와 함께 무슨 시름인지 잠 못 드는 휘파람새의 울음은 그치지 않고 산객을 따라온다.

제1쉼터를 비롯해 등산로 옆에 간간이 나타나는 작은 공터들마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짧은 휴식을 하는 산객들로 빈 공간이 없다. 대청봉 아래 1.8km 지점 설악폭포가 가까워지자 어디서부턴가 알게 모르게 슬며시 다가섰던 오른편 계곡 물소리가 점점 커지며 더욱 우렁차게 들려온다.

폭포 물소리가 뒤에서 희미해질 즈음 가파른 길 왼편으로 끝청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편 능선 위로 트인 하늘에는 여전히 하현달이 밝다. 조팝나무 얼레지 개별꽃 노랑제비꽃 등이 어둠이 걷힌 산길 옆에서 수줍게 산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대청봉이 가까워질 무렵 날은 이미 밝았고 뒤돌아보니 멀리 겹겹이 늘어선 산들이 구름에 묻혀 밀려오는 파도처럼 능선만 드러내고 있다.

바위로 덮인 대청봉에는 산객들이 빼곡하다. 천불동계곡 오른편 화채능선 너머 동해로 흘러드는 쌍천 하구에 반사되는 태양빛이 강렬하다. 남서쪽 사면엔 진분홍 털진달래가 멀리 구름과 어우러진 검푸른빛 산군들과 대조를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삼삼오오 모여 아침을 먹는 산객들로 빼곡한 중청대피소 부근에서 배낭을 열고 허기를 달랬다. 중청을 비껴지나 소청에서 희운각대피소로 간다. 가파른 돌계단의 연속이다. 길을 오르내리는 산객들 중엔 프랑스어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공룡능선에선 곳곳에서 수많은 비경을 만날 수 있었다.
공룡능선에선 곳곳에서 수많은 비경을 만날 수 있었다.

온갖 비경으로 가득 찬 공룡능선

멀지 않은 무너미고개에서 천불동계곡과 공룡능선으로 길이 갈린다. 왼편으로 길을 잡으며 공룡능선의 경계로 들어섰다. 몸은 이미 한계인 듯 피로가 밀려든다. “공룡능선에 8시 이전에 들어서야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산행대장의 말이 자꾸 귀에 걸린다. 체력소모를 최대한 줄이며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신선대 좌측을 비껴 돌면 내려앉은 능선 너머로 노인봉, 1275봉, 천화대 범봉, 나한봉과 세존봉, 황철봉 등 북으로 이어지는 공룡능선 산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은 능선 아래 나뭇가지와 잎을 흔들고 암벽에 부딪치며 매섭게 몰아친다.

암봉 아래 좁고 험한 암벽 사이를 지나고 벼랑을 오르내리는 공룡능선 구간 곳곳은 천하에 둘도 없을 비경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비경에 취하면서도 서둘러 벗어나기를 바라던 공룡능선 구간은 마등령에 닿으면서 끝이 난다.

마등령에서는 오세암 쪽으로 길을 잡았다. 보살, 처사님들과 마주치며 몇 마디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재작년 이맘때 봉정암에서 오세암과 영시암으로 내려오는 길에 공양물이 든 바랑을 메고 산비탈을 힘겹게 오르는 노보살님들을 많이 만났었다. 때론 사진을 부탁하면 찍어드리고, 할머니에겐 힘내라는 가벼운 격려의 말도 해드리고, 거리를 묻는 분들에게는 대강의 거리와 소요시간을 알려 주기도 했다.

2년 만에 다시 들른 오세암. 마침 공양시간이라 누구에게나 열어 놓은 큰 밥솥의 쌀밥과 미역국을 사발에 말아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들이켰다. 계단을 따라 동자전으로 올라 합장하고 서둘러 영시암으로 향했다.

픽업 시간에 맞춰 용대리에 도착할 수 있을지 계속 걱정된다. 영시암까지 2.5km의 길이 몇 배로 느껴진다. 예전처럼 산객들과 불자들로 붐비는 영시암을 서둘러 지나서 백담사로 향한다. 좌측에 백담계곡을 끼고 걷는 끝날 줄 모르게 지루하게 느껴지던 3.5km 길이 끝나고 백담사에 도착하면서 길고 힘들었던 산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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