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일종의 마약이야. 꽂히면 어찌 할 수 없어”

입력 2020.06.05 09:42

[창간 기념 독자 인터뷰ㅣ51년 구독자 김원식님]
산비둘기산악회의 속 깊은 맏형, 1969년 창간호부터 월간<山> 전권 보유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작은 충격을 받았다. 월간<山> 전호가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었고, 등반장비와 등산용품이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책과 등산 장비를 제외하곤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있어, 생활이 독서와 등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가 2011년이었다. 2005년부터 산악인 인터뷰를 해왔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사실 그는 인터뷰하기 어려운 성향이었다. 웃기만 할 뿐 극도로 말을 아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웃음으로 답하니, 기사를 쓸 건더기가 없었다. 
김원식(80) 독자는 스스로를 낮추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수십 년간 본지를 구독한 까닭을 묻자 “버리기도 그렇고 우리나라 등산사니까…”라고 웃으며 말을 감추었다. 그의 발이 시선을 끌었다. 두 발 다 엄지발가락이 바깥쪽으로 이상하게 휘어 있었다. 작은 암벽화를 워낙 오랜 세월 신다 보니 발가락이 변형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산을 묻자 한참 말이 없던 그는 “어느 산을 좋다고 하면 다른 산이 서운해 할 것 같아서 얘기 못 하겠다”고 말했다. 산에 대한 수식은 전혀 없지만, 가장 진심어린 단어를 택하고 있었다.
그가쓴 山시집 <구름 위에 띄운 엽서(1997년 발간)>를 읽으며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산은 결코 나를 원하지 않는데 나 혼자 산을 좋아합네 하면서 산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가. 수려한 암봉마다 하켄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 볼트를 박고……. 진정 산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오늘부터 등산을 그만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산은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하나의 목마름이다.’
당시 월간<山> 500호 발간 기념으로 인터뷰한 후 그와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지난해 50주년 창간기념 행사 때도 초대를 사양했던 그가 먼저 전화를 해왔다.    
그는 “우이암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 소 귀라는 뜻의 우이동牛耳洞, 우이령의 기원이 된 우이암牛耳巖이 진짜 우이암이 아니란 것. 1960년대 당시 우이암 부근의 원통사 스님들은 관세음보살이 아이를 업은 모습을 닮았다 하여 ‘관음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악회 선배도 1960년대 당시 “김군, 저게 진짜 우이암이야”라고 일러주었다.
그 당시에도 관음암을 우이암으로 잘못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우이암은 우이동과 우이령길에서 잘 보이는데, 우이동계곡으로 뻗은 지능선상에 있다. 당시에는 민둥산이라 우이동에서 훨씬 잘 보였다고 한다. 우이령길을 넘을 때 이 바위가 솟은 모습이 마치 소귀처럼 2개가 뾰족 솟은 것 같다고 하여 ‘예부터 소귀바위’라 불렀고, 우이령·우이동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수십 년이 지난 근래의 어느 날, 그는 선배에게 들었던 얘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등반장비를 꾸려 개척산행을 하여 실제 우이암을 답사했다. 바위 크기는 관음암(우이암이라 불리는 원통사 부근 바위)과 비슷하지만 등반성이 없다는 것. 그는 “수려한 바위는 아니지만, 소귀를 닮은 바위임은 분명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명이 바뀐 사례는 흔하다. 사람들의 혼동이나 지도 제작과정에서 실수로 이름이 바뀐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것을 잘잘못을 가려 되돌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김원식 독자는 “멋있는 바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이동이란 지명을 있게 한 바위란 건 알려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소신을 밝힌다.
김원식 독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1941년 밀양에서 태어나 20세에 상경한 그는 온갖 일을 다 했다. 자동차와 중장비업체에 납품하는 유리 제조 회사인 ‘동원유리’를 세워 회사를 운영했다.
수직으로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 회사를 크게 키울 기회가 많았지만 직원 한 명만 두고 적당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운영했다. 의아한 표정의 기자에게 그는 “산에 다니기 위해 일했다”며 “그래서 이런 인생을 살아온 것”이라 했다.
“사당동에서 우면산 약수터를 아침마다 다녀왔어요. 빙벽등반 프런트 포인트 근육 단련하려고 앞꿈치를 세워서 뛰어다녔어요. 산에 다니기 위해서 운동하고, 산에 다니기 위해서 돈 벌었어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힘든 거예요. 그때는 히말라야 가기 위해서 자기 집 저당 잡히고, 빚지고 그랬어요. 좋은 직장 사표 내서 원정 가고…, 우리 세대는 그렇게 산을 다녔어요.”
그는 “독신주의자거나 산과 결혼한 건 아니다”라고 얘기하지만 그의 말을 들을수록 산과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아가씨들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해오면 그는 “주말은 산에 가야 하니 평일에 만나면 안 되냐”고 할 정도로 산에 빠져 있었다. 지나고 돌이켜보니 “혼자 살 팔자였다”며 “인생 살다 보면 안 되는 것도 있더라”고 담담하게 얘기한다.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라 자처하는 그는 백두산과 금강산이 몹시 가고 싶었으나 가지 않았다. 그는 “구차하게 중국으로 백두산 가고 싶지 않았고, 구차하게 배 타고 임시방편으로 금강산을 가고 싶지 않았다”고 평생 지켜온 소신을 말한다. 
평생 TV 없이 살아
그는 국내산만 죽어라 다녔다. 1966년 산비둘기산악회에 가입하여 평생 산악회 활동만 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주 산행을 했으며, 몸이 아파서 산을 갈 수 없을 때 외에는 한 달 이상 산을 가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오직 산만 다녔다.
그가 산악회 신입회원일 때,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선배들이 얘기했던 “우리는 여기서 같이 흰 머리를 날릴 거야”라는 말을 잊은 적 없다. 선배들의 뜻을 이어 “산악회원이 아니라 가족이다. 후배는 산에 같이 다니는 반려자”라고 그 역시 생각해 왔다. 군대식 산악회 문화가 팽배하던 시절이었지만 “후배들을 졸병처럼 생각한 적은 없다”고 단언한다. 
19세 아래인 산악인 유학재씨를 등반에 입문시킨 것도 그였다. 어린 학생이 샘터 청소를 하는 걸 기특하게 여겨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산악회에 가입시키게 되었다. 산악회 맏형이 된 지금은 후배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서 잘 안 가요. 후배들은 40~50대가 많은데 제가 산에 가면 좀 천진난만해져요. 50대로 젊어진달까. 후배들에겐 나이 80에 50처럼 행동하니 주책처럼 보이겠지요. 혼자 하루에 최소 2만 보는 걷고,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산에 갑니다. 매일 불암산 약수터 다니고, 저녁에 중랑천을 1시간 30분씩 걸어요. 건강의 비결이 아니고 습관이에요. 평생 집에 TV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 습관이 생길 수 있었어요. 낮에 책 읽고 신문 보고 산책하고, 코로나 없을 때는 지하철 타고 많이 다녔지요.”
1980년대 백두대간 개념이 세상에 나오기 전, 태백산맥을 개척산행으로 종주했다. 나이가 들면서 둘레길을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간한 걷기길은 다 걸었으며, 남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섬진강을 모두 혼자 일시종주 방식으로 걸었다. 그는 “혼자서 걸어보니 참선이 정적인 명상이라면 걷는 것은 동적인 명상”이라고 어느 교수의 말을 빌려 얘기한다.
혼자 열흘 이상 걷다 보면 장거리 길만의 희열이 생긴다고 한다. 일주일 이상 걷다 보면 몸의 리듬이 걷는 데 최적화되어 그런데서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는 것. 그렇게 전국 방방곡곡을 걸으면서 ‘내가 가난하게 태어나서 많은 것 누리고 사는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김원식 독자에게 소망을 물었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겠어요? 그냥 이렇게 오늘처럼 즐겁게 사는 거죠. 나이 먹으니까 학벌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어요. 건강한 게 최고예요.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지금 로또  당첨되어도 아무 소용없어요."
산악회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는 종종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매주말 인수봉 1박2일, 선인봉 1박 2일 번갈아 가던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곤 속 깊은 곳에서 울림처럼 “산은 일종의 마약이야. 꽂히면 어떻게 할 수 없어”라고 툭 뱉어냈다. 
그 말에 그의 80 평생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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