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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창립 55주년 산악회] “오래된 역사보다 지금도 활동하는 우리가 자랑스럽다!”

글 김정도 산비둘기산우회
  • 입력 2020.08.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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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ㅣ창립 55주년 산비둘기산우회]
창립 55주년 맞은 산비둘기산우회 인수봉에서 기념등반

인수봉의 아름다운 바윗길 가운데 하나인 비둘기길.
인수봉의 아름다운 바윗길 가운데 하나인 비둘기길.

지난 7월 4일, 서울 북한산 인수봉 서면의 비둘기길에서 산비둘기산우회 창립 55주년 기념등반이 있었다. 매년 열리는 행사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행사의 규모를 최소화했다. 이번 등반에는 남정호, 김인배, 오명덕, 장수영, 곽검용, 김인수, 윤성영 등 1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해 조촐하게 진행됐다.

산비둘기산우회는 1965년 봄, 산을 좋아하는 열혈남아들이 고교 동창과 동네친구라는 연결고리 하나로 의기투합해 태동됐다. 당시 창립멤버들의 나이라 해야 겨우 10대후반. 혈기 하나로 뭉쳤으니 경제적으로나 등반 기술적으로나 보잘 것 없었음은 자명했다. 그래도 매주 토요일이면 짐을 꾸렸고, 인수봉과 도봉산의 이 바위 저 바위를 열심히 올랐다. 매년 겨울이면 속초로 가는 새벽버스를 타고 44번 비포장국도를 달려 설악산 동계등반도 갔다.

1967년에는 바위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올랐을 인수봉 서면 비둘기길 개척에 나섰다. 당시의 개척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도 가지 않았고, 갈 생각조차 못했던 곳에 길을 내기로 한 것이다. 청계천 공구상을 돌아다니며 구한 쇠사슬과 자동차 볼트를 나무자루 해머와 점핑공구로 설치했다. 암벽에 매달려 온종일 두들겨봐야 볼트 구멍 두 개가 고작이었다.

혹자들은 ‘비둘기길이 쉽다’고 편히 말하곤 하지만, 등반 기술이 일천하던 시절 인공등반으로 오르며 만든 길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인수봉의 아름다운 바윗길을 꼽을 때 절대 빠트릴 수 없는, 여전히 많은 산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인수봉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한
산비둘기산우회 회원들.
인수봉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한 산비둘기산우회 회원들.

인수 비둘기샘 만들어 보수 관리

산비둘기산우회는 1970년 인수 야영장에 샘터 하나 변변히 없던 시절 ‘인수 비둘기샘’을 만들어 많은 산꾼들의 갈증을 풀어 줬다. 이 샘은 인수산장의 식수원 역할을 했고, 가뭄에는 위 수덕암(현재 인수암)에서 물을 길어다 쓸 정도로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많은 이들의 생명수 역할을 톡톡히 셈이다. 산비둘기산우회는 샘을 만든 후에도 보수 의무를 자임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관리를 이어가고 있다.

우이동 솔밭에서부터 정비도 안 된 도선사길(1970년대 초에 포장됨)을 거쳐 한 포대에 40kg이나 되는 시멘트 10여 포를 야영장으로 올렸고, 모래는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바위 밑에서 한줌씩 긁어모아 샘 공사를 했다. 막일과는 거리가 먼 회원들의 고생이 심했다. 훗날 “손바닥이 시멘트 독으로 구멍이 났다”고 과장해 말하며 웃을 수 있는 좋은 추억이었다.

1966년 시詩 좋아하고 산 좋아하는 김원식 선배님이 산비둘기산우회에 합류해 산악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는 <월간山> 6월호(608호) 독자 인터뷰에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산지를 보유하고 있는 인물’로 소개된 바 있다. 그 선배로 인해 산비둘기산우회 회원들은 산악관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둘기길은 1967년 인공등반 방식으로 개척했다.
비둘기길은 1967년 인공등반 방식으로 개척했다.

1970년대 백두대간이라는 말조차 알려지기 이전 1:25,000 지도를 이어 붙여 수년에 걸친 태백산맥 종주와 경기도 광주산맥을 종주했던 일은 산비둘기산우회가 남 못지않은 도전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해외 원정등반은 꿈도 못 꾸던 1970년대 회원들의 호기로운 제안으로 히말라야 원정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그게 어찌 쉬운 일이던가. 미루고 미루다, 결국 1990년 히말라야 닐기리 북봉(7061m)으로 어렵게 해외 원정등반을 떠나 김연수, 박주홍 대원이 등정을 했다.

인수봉 서면 비둘기길 크랙을 등반 중인 클라이머.
인수봉 서면 비둘기길 크랙을 등반 중인 클라이머.

산우회의 역사 중 가장 안타까운 일은 많은 산 친구들을 잃은 것이다. 2000년 고 박영석 대장이 K2에서 마지막으로 14좌를 완등하는 날 대원으로 참가한 박영도 산우가 8,200m 지점에서 실족해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고 박영도 산우와 푸모리에서 세상을 떠난 고 김지연 산우를 기리기 위해, 2007년 추모를 겸한 북한산성 종주 행사 중 용혈봉에서 낙뢰사고로 안영채를 비롯한 4명의 산우를 잃기도 했다. 그 외 몇 명의 산우들이 산악인 추모비에 잠들어 있어, 남은 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산악혼으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 마음을 표현한 김원식 선배님의 글을 여기 옮긴다.

‘하이커는 산에서 여가를 즐기고 알피니스트는 산에서 고난을 즐긴다.’

‘하이커는 산정에서 산을 찬미하고 알피니스트는 인생을 찬미한다.’

‘하이커는 산에 결코 인생을 걸지 않는다.’

산비둘기산우회는 55년 역사의 의미보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음을 큰 자랑거리로 여긴다. 그 세월 속에 어린 고교생 신분으로 산비둘기산우회에 들어와 걸출한 산악인으로 성장한 유학재와 서울특별시산악연맹을 이끌고 있는 김인배 회장을 배출한 것도 우리 산비둘기산우회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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